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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3. 크라스키노성의 역사적 고찰

발해는 698년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동모산(東牟山: 현재 중국 길림성 소재)에서 진(振, 震)이란 국호로 건국하였다. 이후 발해는 당 및 돌궐, 거란, 남쪽의 신라, 동해 건너 일본과 개방적 대외교류를 지속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칭송되었다. 고왕 이후 15대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 통치 시기까지 전국을 5개의 중심 도성(京), 15개의 부(府), 62개의 주(州)로 나누고,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 영주도 등의 대외교통로를 두어 동아시아의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발해가 당시 주변국과 교류한 역사사실을 담은 사료들을 통해 보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시호 및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황제국가를 표방하고 부여와 고구려를 계승하였던 독립 국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는 무왕 인안 8년(727년)부터 마지막왕 대인선 13년(919)년까지 모두 34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반대로 일본은 13회에 걸쳐 발해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렇다면 일본도의 출항지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정교회의 승원관장이자 중국학 전문가였던 팔라디 카파로프가 1870년 8월 23일자 제정러시아 지질학협회에 보낸 서한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중국의 문헌자료들을 참고하여 “포시에트에는 얀추(얀치헤)강과 기찐(까진)강 사이에 옛날 군항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팔라디 카파로프는 지금의 크라스키노성 일대에 ‘옛날 군항’의 존재를 추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1871년 4월에 제정러시아 지질학협회의 위임에 의해 극동지역을 여행하면서 크라스키노성을 발견하였지만 제염 저장소의 흔적으로만 판단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이 유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졌으며 1958년에야 고고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때에는 이 유적을 12~13세기의 금대 여진유적으로 잘못 판단하였다. 크라스키노성이 발해의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60년과 1963년에 러시아의 저명한 동양학 전문가인 E.V.샤브꾸노프가 이 유적에 대해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발해유물을 확인하면서 부터였다. E.V.샤브꾸노프는 크라스키노성을 발해 동경 용원부 염주의 치소였고 그리고 발해와 일본 간의 교류가 이루어졌던 장소로 추정하였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크라스키노성은 발해 염주의 치소이자 일본도의 출항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당서』 「발해전」의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고 용원부 또는 책성부라 하였고 경, 염, 목, 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 … 용원의 동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는데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獩貊故地爲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 龍原東南濱海 日本道也)라는 기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 동경 용원부는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훈춘의 팔련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팔련성에 있었던 동경 용원부에서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주가 바로 일본도의 바닷길 기점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닷가에 위치하였던 주(州)로는 소금 염(鹽)자를 쓰고 있는 염주임은 누구나 쉽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크라스키노성은 팔련성에서 본다면 동남쪽에 해당된다. 더욱이 크라스키노성 주변으로 흐르고 있는 쭈까노브까 강이 과거에는 얀치헤(중국어명칭 岩杵河 yanchuhe)로 불리고 있었는데 염(鹽 yan)과 암(岩 yan)이 동일한 음으로 발음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염주의 치소, 다시 말해서 염주성이 지금의 크라스키노성이라는 의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요사』 「지리지」의 염주와 개주 진국군에 대한 기록도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이었다. 해양, 접해, 격천, 용하 4개의 현이 있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수는 3백이었다. 개주에 예속되었다. 서로 1백 40리 떨어져 있다”(鹽州 本渤海龍河郡 故縣四 海陽 接海 格川 龍河 皆廢 戶三百 隷開州 相去一百四十里). 개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주 진국군.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는 예맥의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경주라 하였고 발해가 동경용원부라 하였다. 궁전이 남아 있었다. 경주, 염주, 목주, 하주의 군무를 총괄한다”(開州 鎭國軍 節度 本濊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殿 都督慶鹽穆賀四州事). 『요사』「지리지」 이 두 기록은 요의 개주가 발해 당시의 동경용원부였고 염주는 해양, 접해 등의 바다 해자가 붙은 현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염주는 개주, 다시 말해서 동경용원부와 17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일본으로 보낸 34회의 사절단 중 33회의 사절단이, 그리고 일본이 발해로 보낸 13회의 사절단이 각각 모두 염주성을 통해 왕래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양국을 왕래한 선박이 크라스키노성에 바로 정박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유적 가까이의 동해 엑스뻬지찌야 만은 깊이가 얕기 때문에 선박은 인접하여 위치하는 포시에트 만에 정박을 하였을 것이고 나룻배 등 작은 배에 걸아타고서 이 성 가까이로 접근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발해는 일본도를 통해 다양한 상품을 교역하였다. 발해에서는 주로 담비가죽, 호랑이가죽, 곰가죽, 표범가죽, 인삼, 잣, 꿀을 가져갔고, 일본에서는 주로 여러 종류의 비단과 솜, 금, 수은, 금칠, 칠, 수정염주 등을 보내었다. 발해는 적게는 1척 많게는 17척의 배를, 사절단은 적게는 23인으로 많게는 359인으로 구성하여 일본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크라스키노성 발굴조사에서는 일본도를 통한 발해와 일본 양국 간의 교역의 증거가 거의 발견이 되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크라스키노성이 사절들 및 그 사절들과 동행한 상인들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해 사절단의 최종 목적지는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평안경이었고, 일본 사절단의 최종 목적지는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 구국, 중경, 상경, 동경 등이었다. 그러므로 크라스키노성은 발해 사절단의 출항지, 일본 사절단의 입항지 역할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크라스키노성에서는 이 성이 육로와 해로의 연결거점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1980년부터 시작된 이 유적에서의 발굴조사에서 쌍봉낙타의 뼈, 청동 쌍봉낙타상, 금박구슬, 화병모양 거란토기 등과 같은 서역-북방과 관련된 유물들과 함께 해로를 통해 신라와도 교류하였음을 보여 주는 편병, 반대로 발해의 놀이문화가 서쪽으로 위구르에서도 공유되었음을 보여주는 고누판 등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당과의 교역을 보여주는 자기들이 깨어진 편 상태이기 하나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쌍봉낙타의 뼈와 청동으로 만든 쌍봉낙타상은 크라스키노성이 육로와 해로의 연결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낙타의 뼈는 2012년도에 크라스키노성의 제48구역에서 출토되었다. 쌍봉낙타의 제1지골로서 길이가 8.2㎝이다. 연해주는 몬순 기후로서 겨울에 습하기 때문에 낙타는 사육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유적에서 출토된 낙타 뼈는 낙타를 주요 운송 및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일단의 대상들이 내륙지역에서 이곳 동해 바닷가까지 직접 왕래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서쪽에서 이곳까지 온 상인들은 다음에는 배를 타고 해로를 통해 일본 혹은 신라까지도 왕래하였을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이 낙타의 뼈는 발해유적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서 발해시기 동서간의 문화교류를 증명하는 지극히 중요한 유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발해 때에 시작된 낙타를 이용한 동서간의 왕래는 발해 이후 여진시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사실은 12세기 후반~13세기 초로 편년되는 연해주 노보고르제예브까 산성의 여진 문화층에서 발견된 다른 낙타의 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크라스키노성에서는 그 3년 후인 2015년도에 정말 예기치 못하였던 매우 중요한 유물을 하나 더 발견하게 된다. 바로 청동으로 만든 쌍봉낙타상이다. 제47구역의 섹터 2에서 구들이 딸린 18호 주거지보다 더 아래의 문화층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쌍봉낙타의 형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크기는 1.8×1.9㎝로서 매우 작지만 쌍봉낙타의 머리, 가슴, 2개의 혹, 4개의 다리, 그리고 꼬리가 매우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에 우리 발굴단원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기쁨을 표현하였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쌍봉낙타의 형상은 한나라, 서위, 북조 등의 도용, 특히 당의 삼채도용과 무덤벽화에서 많이 찾을 수 있고, 소그드의 동전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그드의 부하라 오아시스에 위치하는 바라흐샤 성터에서 출토된 소그드의 동전에는 목 수염이 없는 것과 목 수염이 무성하게 나 있는 두 종류의 쌍봉낙타가 표현되어 있다. 발해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출토된 쌍봉낙타 도용의 예는 요녕성 조양시 황하로당묘(1호 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쌍봉낙타 도용이 2점 출토되었는데 그 중 1점에는 호인 한 명이 낙타 등 위에 얹은 짐 위에 앉아있다. 당의 도용에 표현된 쌍봉낙타들에도 대개 호인이 함께 표현되어 있어 당시 쌍봉낙타는 호인, 다시 말해서 소그드인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동해 바닷가에 위치하는 크라스키노성까지 발해 당시에 서역의 소그드인들이 드나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발해와 소그드의 왕래에 대해서는 노보고르제예브까 마을 일대에서 우연히 발견된 소그드 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발해 당시 낙타가 사육된 지역에 대해 살펴본다면 제일 먼저 몽골과 투바를 중심으로 한 위구르와 남부 시베리아 하카시야 지역의 예니세이 키르기스를 거론할 수 있다. 『신당서』 「회골전」에는 탁타(橐它)로 표기된 낙타가 위구르와 예니세이 키르기스에서 사육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하카시야 지역에는 예니세이 키르기스시기에 남긴 바위그림에 쌍봉낙타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탁타는 쌍봉낙타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날 몽골과 고르느이 알타이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쌍봉낙타를 통해 그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크라스키노성에서 확인된 낙타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확단하기도 매우 힘들다. 다만 당시 쌍봉낙타가 호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음을 염두에 둔다면 서역에서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고, 그리고 최소한 서역-북방지역과 관련된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금박구슬은 2009년에 크라스키노성의 제40구역에서 출토되었다. 크기는 0.5×0.6㎝, 구멍의 직경은 0.2㎝이다. 이 유물은 발해유적에서는 처음 발견된 금박구슬로서 발해의 대외교류에 있어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금박구슬은 신라, 가야, 백제 등의 유적에도 출토된 것이 있고, 남방의 바닷길과 북방의 초원길을 따라 오래전부터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금박구슬은 기원전 3세기경에 처음 등장하였고, 이집트, 서아시아, 이란,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흑해북안, 중앙아시아, 남시베리아, 한국, 일본 등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 유물을 발견한 러시아의 E.I.겔만은 이 금박구슬이 근동지역의 한 공방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의 금박구슬은 서기 2세기 이후에 유행한 동남아시아, 특히 타일랜드 지역의 금박구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발해의 크라스키노성에서 출토된 금박구슬은 이와는 달리 초원길을 따라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크라스키노성에서는 거란과의 교역을 보여주는 유물도 출토되었는데 바로 화병모양 거란토기이다. 이 유물은 1998년에 크라스키노성의 우물 내부퇴적토에서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동체의 2/3지점에 최대경이 위치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잘록하게 좁아지는 목의 가운데 부분 및 목과 어깨의 경계 부분에 각각 1줄씩을 돌대를 가지고 있다. 바닥의 가운데에는 둥근 원이 하나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동체 하단부에 짧은 띠 모양의 누른 무늬를 9줄 연속적으로 베풀어놓았다는 것이다. 토기의 전체 높이는 24.2㎝이다. 발굴 보고자들은 이 토기를 거란 토기로 보고하면서 거란이 발해를 정복할 때에 거란 군대가 이곳까지 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 형태의 화병모양 토기는 실제로 거란 유적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었으며 동체 하단부에 상기한 것과 동일한 문양이 시문되어 이 문양이 거란 토기에 매우 특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거란에서는 이와 동일한 형태의 자기 혹은 시유 토기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토기는 거란 토기임이 분명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토기의 형태 및 문양의 특징이 요 건국 이전과 이후가 아직 잘 구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물 내에서 이 토기는 바닥보다는 약간 더 위에서 편병을 포함하는 다른 발해의 완형 혹은 완형에 가까운 토기들과 함께 출토되었고, 이 토기 포함층 위로는 기와와 토기의 편들이 퇴적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발굴 정황 때문에 발해 멸망 당시에 폐기되었을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물을 폐기하면서 굳이 토기들을 폐기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이 토기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물을 보관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우물에서 출토된 다른 토기들도 크기가 이 화병형 토기와 비슷한 항아리들 혹은 편병으로서 모두 액체용기를 저장하기에 적당한 것들이다. 이 토기들은 인위적인 폐기보다는 물을 길으면서 빠뜨린 것이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이 거란토기는 거란 군대가 아니라 그 이전 거란인의 왕래에 대해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신라와의 교류를 보여 주는 편병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크라스키노성에서 2점의 편병이 출토되었다. 1점은 1998년에 우물에서 거란 토기와 함께, 다른 1점은 2015년에 제50구역의 저장시설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우물 출토 편병은 한쪽 면이 납작한 1면 편병이며 납작한 면의 양쪽 가장자리에 4개의 귀-손잡이를 부착한 것이다. 귀-손잡이는 지금은 1개만 남아 있지만 나머지 3곳에 부착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편병의 전체 높이는 23.4㎝이다. 저장시설에서 출토된 편병은 모양이 우물에서 출토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편병은 일면 편병이며 짧은 목과 외반하는 구연을 가지고 귀-손잡이가 없다. 이 편병은 높이가 18.2㎝로서 앞의 것에 비해 작은 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가지 종류의 편병 모두 통일신라가 남긴 울릉도 천부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편병은 천부동 1호 석실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판박이인데 똑같이 네 개의 귀가 있고 일면 편병이다. 차이가 있다면 크기와 목의 유무 그리고 귀-손잡이의 세부 형태이다. 천부동 1호 석실무덤 출토 편병은 높이가 37.5㎝로서 크라스키노성에서 출토된 것 보다는 규모가 더 크며, 목이 없고, 귀-손잡이가 고리모양으로 되어있다. 두 번째의 편병은 천부동 2호 석실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일면 편병은 장도 청해진유적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다만 통일신라의 편병은 구연부가 반구형으로서 크라스끼노 성 출토 편병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편병은 아직 일본에서는 발견된 것이 없고 또 발해와 서쪽으로 이웃하였던 거란지역과 그 남쪽의 당에서도 확인된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이 편병은 발해와 통일신라 사이의 교류관계를 증명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유물임을 알 수 있다. 발해와 통일신라 사이에는 신라도가 있었는데 이 길은 육로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와 통일신라는 육로 외에 바닷길을 통해서도 서로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크라스키노성에서 발견된 당나라와의 교역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절강성의 월주요, 하북성의 정요와 자주요, 그리고 호남성의 장사요에서 생산된 자기 유물들을 들 수 있다. 이 유물들은 수량이 많은 것은 아니며 또한 대부분의 경우 작은 편 상태이지만 크라스키노성에서 꾸준하게 출토되는 유물 중의 하나이다. E.I.겔만은 이 자기들은 육로가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 발해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당과 관련된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는 삼채기가 있다. 당삼채로 알려져 있는 이 용기들은 일반적으로 당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E.I겔만은 발해에서도 삼채기를 생산하였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발해삼채로 부르고 있다. 당삼채와 발해삼채의 차이는 유약에 포함된 납 산화물 함량의 차이인데 당 삼채에는 납 산화물의 함량이 28.6~33.1%로 작다면 발해삼채에는 그 함량이 56.32~72.79%로 매우 높다. E.I.겔만은 발해가 삼채를 생산하게 된 것은 안록산의 난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당에서 삼채산업이 붕괴되고 그로 인해 삼채를 생산하였던 장인들이 멀고 살길을 찾아 발해로까지 온 결과일 것으로 보았다.
지금까지는 발해로 유입된 외래의 요소에 대해 기술을 하였다면 아래에서는 발해에서 서쪽으로 간 놀이문화 중의 하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바로 고누에 대한 이야기이다.
2004년에 크라스키노성의 기와벽실로 명명된 유구에서 기하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사암 판돌이 하나 출토되었다. 이 기하무늬는 네모가 2개 중첩된 모양이며 각각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선이 그어져 있어 사실은 참고누판을 새긴 것이었다. 다만 이 판돌의 외연이 모두 결실되어 있어 바깥쪽으로 세 번째의 네모가 더 새겨져 있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가 못하다. 이 사암 고누판은 크기가 19~21㎝이고 두께는 8.5~10㎝이다.
한국에는 고려시대까지의 참고누판으로 경상북도 칠곡의 송림사 오층전탑에서 수습된 전돌 고누판 1점, 황해도 봉천의 원산리 도자기가마터 출토 갑자, 즉 갑발에 그려진 갑발 고누판 1점,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전돌 고누판 2점 그리고 고려시대 항몽유적지인 제주 항파두리유적 출토 고누판이 1점 있다. 원산리 도자기가마터 출토 갑발 고누판은 갑발의 바닥이 원형이라서 고누판의 가장 바깥쪽 선이 네모가 아니라 원이었다.
송림사의 고누판은 6세기 중엽일 가능성이 제기된 상태이다. 하지만 송림사 5층 전탑이 진흥왕 5년(544)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이후 고려 선종 9년(1092), 조선 숙종 12년(1686), 철종 9년(1858) 등 수 차에 걸쳐 중창을 하였기 때문에 보수를 하면서 고누판이 그려진 전돌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원산리 청자가마터 유물은 10세기 초, 개성 만월대와 항파두리 유적 출토품은 13세기로 각각 편년된다.
고누판은 몽골의 하르-발가스 성터와 길림시 송원시의 탑호성에서도 출토된 것이 있다. 둘 다 참고누판이다. 하라-발가스는 쿠툴룩-빌게 가한이 745년에 세운 위구르 한국의 수도로서 840년 경 예니세이 키르기스의 공격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 점토판에 새김으로 그린 고누판은 궁전(혹은 사원) 건축물이 있는 성의 서쪽에 위치하는 한 건물터에서 출토되었다. 이 건물터에서는 9개의 원형 주좌 방형 초석과 함께 당나라 시기의 수막새도 1점 발견되었다. 하라-발가스는 예니세이 키르기스의 공격 이후 완전히 불에 타 폐기되었고 이후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 이후의 유물로는 개별 지점들에서 몽골시기의 토기편이 간혹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사실은 이 유적의 초석 건물터에서 출토된 고누판이 하르-발가스가 위구르 한국의 수도로 사용되었을 당시의 유물임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탑호성은 요금대의 유적이다.
고누판과 비슷한 혹은 동일한 모양의 문양은 남카프카스와 동유럽 등에서 확인된다. ‘바빌론 기호’라고 불리는 이 문양은 기원전 수 천 년 전부터 최근의 건축물에까지 확인되며 ‘지옥신의 요새’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바빌론의 기호’와 참고누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외 인도의 카주라호 버마나 사원의 돌난간과 바라하 사원의 난디 사원(서기 900년 건립)의 바닥과 난간에도 고누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고누는 한국의 중요한 전통놀이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에도 고누를 두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고누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장족, 산동성 연태, 광서성 북해, 복건성의 여족 등도 즐기고 있고, 몽골에서도 ‘지르게’로 불리며 지금도 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놓고 볼 때에 만약에 송림사 5층 전탑의 고누판이 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맞다면 고누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여 초원길과 바닷길을 통해 서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이른 연대를 보이는 고누판은 크라스키노 성터와 하르-발가스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 구국시기에 이미 존속을 시작하여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크라스키노 성은 서기 8세기 초부터 10세기 1/4분기까지 사용된 유적이다. 때문에 이 두 유적 출토 고누판은 아직은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발해와 위구르 한국과의 인적 교류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은국이 제기한 ‘고누 길’은 시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크라스키노 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발해의 활발했던 대외교류에 대해서도 증명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서역-북방, 당, 통일신라 관련 유물들은 크라스키노 성이 육로와 해로의 연결거점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낙타를 탄 그리고 낙타에 짐을 실은 대상들이 이곳까지 왕래하였고, 발해와 일본의 사절들이 이곳을 지나 상대방의 도성을 왕래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염주성은 발해 육로의 동쪽 끝 지점이었으며, 발해 일본도의 바닷길 시발점이었고,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로 가는 길목의 역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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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크라스키노성의 역사적 고찰 자료번호 : kr.d_0016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