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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1. 크라스키노성의 구획과 유구배치

1980년부터 2018년까지 28번의 여름 발굴조사 시즌에 걸쳐 53개 구역에서 실시된 크라스키노성에서의 발굴조사는 몇몇 지점에 집중되어 실시되었다.
성 내부에서 발굴조사가 된 장소들은 사찰이 위치하는 서북지역과 ‘十’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도로가 조사된 중북지역으로 크게 구분되고 있다. 그 외에도 매우 작은 면적이긴 하여도 성의 중남지역과 동문지 주변 등이 조사된 적이 있다. 서북지역은 석축담장에 의해 북쪽의 사찰구역과 남쪽의 주거구역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다. 하지만 사찰구역의 동쪽 부분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이곳은 유구의 성격을 통해 그 경계를 대략적으로 구분된다. 때문에 발굴조사가 비교적 넓은 면적으로 실시된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 중북지역 주거구역에서는 유구 배치와 구획 문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은 석축담장과 성벽에 의해 남쪽과 서쪽, 북쪽 경계가 잘 구분된다. 동쪽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못하지만 제31구역의 와실유구와 그 남쪽 제33a구역의 방형 초석건물이 사찰구역의 동쪽 경계 가까이에 위치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와실유구와 방형 초석건물은 사찰과 관련된 유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곳 동쪽의 제37구역, 제41구역, 제45구역에는 이미 “주거지” 등으로 보고된 유구들이 위치한다.
사찰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에 처음 금당지의 초석과 와적층을 확인한 후 25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인 2006년에 마침내 종료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주거구역과 도로구역에서 5개 혹은 그 이상의 생활면이 확인됨으로 인해 과거 사찰구역에서 생토로 인식되었던 토층의 밑으로 계속해서 문화층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때문에 사찰구역에 대한 재발굴조사가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다.
사찰구역의 유구는 크게 석축담장, 금당지 및 관련 유구들, 전각지, 방형 초석건물지, 와실유구, 우물, 가마터들, 그리고 기타 유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도시구획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유구는 사찰구역과 그 바깥을 구분하는 석축담장이다. 석축담장은 1994년에 제10구역에서, 1995년과 1996년에 제12구역에서 각각 조사되었다. 사찰구역의 남(서)쪽에 서서북-동동남 방향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축조되어 있다. 금당지의 기단 남서변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담장을 경계로 북쪽은 사찰구역이고, 남쪽은 주거구역이다. 석축담장의 동쪽(정확하게 말하는 동동남쪽) 부분에는 중문으로 명명된 문지가 위치한다. 이 중문지는 너비가 3.9m이다. 석축담장은 이 중문지의 서쪽으로 길이 22.8m, 동쪽으로 길이 8m로 각각 확인되었다. 따라서 중문지를 포함하는 담장의 전체 노출 길이는 34.7m이다. 담장의 서쪽 끝부분은 성벽과 거의 접하고 있지만, 성벽과의 사이에 약 1m 정도 단절부가 있다. 때문에 발굴조사단은 성벽과 석축담장 사이의 이 단절부에는 사찰구역으로 내왕할 수 있는 쪽문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쪽문 지붕도 기와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중문지는 단절부 모양으로 확인되었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고, 또한 와편과 토기편들도 수 겹이 깔려 있었는데 문길을 포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중문지는 안쪽으로 정확하게 금당지의 계단 쪽으로 향한다.
석축담장 안의 유구배치는 “위생활면” 금당과 중문을 중축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중문과 금당의 정면 계단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금당의 정면 기단가장자리와 석축담장이 평행을 이룬다는 사실도 사찰구역 내부는 일정한 공간적 배치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간생활면”의 금당지와 담장으로 보고된 유구들도 기본적으로는 “위생활면” 금당지와 동일한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중간생활면”의 유구들은 석축담장보다는 제51구역에서 2018년에 조사된 가장 아래 생활면의 도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찰구역 내의 다른 중요한 건물 중의 하나는 방형의 석축기단으로 된 전각지로서, 1994년에 제9구역에서 조사되었다. 금당지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15m 거리에 위치한다. 사찰구역의 다른 한 중요 유구는 초석 건물터이다. 2005년 제32구역과 2006년 제33-a구역에 걸쳐 조사되었다. 평면상 장방형이다. 모두 16개의 초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축은 동북-남서 방향이다. 이 건물터는 제3생활면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아마도 “중간생활면” 금당과 동일 시기일 것이다. 사찰과 관련된 건물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용도는 분명하지 못하다. 사찰구역 내의 다른 한 중요한 유구로는 와실유구가 있다. 와실유구는 2003년과 2004년에 제31구역에서 조사되었다. 금당지의 동북쪽 모서리에서 동쪽에서 14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사찰구역 내의 이 와실유구는 지하에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서늘하였을 것이고, 따라고 상하기 쉬운 음식 등을 저장하였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찰구역에는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우물도 있었다. 우물은 1997년과 1998년에 제15구역에서 조사가 되었다. 금당지의 남서쪽 모서리에서 약 18.3m의 거리에 위치한다. 우물의 서쪽 가까이에는 성벽이 지나간다. 사찰구역의 남서쪽 모서리 안쪽에 해당된다.
사찰구역 내에서는 그 외에도 기와를 생산한 1호부터 12호까지의 가마터들과 다른 2기의 추정 가마터, 그리고 제철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노 등의 생산시설이 조사되었다. 가마들은 제1생활면에 속하는 것들도 있고, 또 제2생활면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다만 이 생산시설들은 모두 사찰구역 내의 중요 건물들 외곽에 분포하고 있으며, 사찰의 구성요소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마들은 모두 사찰 내 건물들의 지붕에 사용될 기와를 생산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역할이 끝난 다음에는 바로 폐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생산시설들은 비록 사찰구역 내에 위치는 하지만 사찰의 구성요소는 아니고 필요시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보조시설로 보아야할 것이다.
크라스키노성의 사찰구역은 석축담장에 의해 또렷하게 구분되고 있지만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달리 금당과 추정 종루, 창고시설 등만 확인되었고, 탑, 강당 등의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 위치하는 제34구역, 제40구역, 제44구역, 그리고 제48구역 동쪽섹터에서는 제5생활면 혹은 제6생활면까지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그 아래는 발굴조사 당시 생토로 파악하였던 토층이 위치한다. 이 4개의 발굴구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 각 발굴구역의 유구들은 독립적으로 위치하는 것도 있지만 이웃하는 발굴구역들에 서로 걸쳐서 위치하는 것도 다수 있다. 때문에 이 4개 발굴구역의 발굴조사 내용에 대해서는 한꺼번에 살펴보는 것이 전체적인 유구배치 상황을 판단하는데 그리고 유구의 겹 놓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1생활면에서 1호 주거지와 2호 주거지, 1호 건물지와 2호 건물지는 모두 네 모서리가 근 방위방향으로 방향이 동일하다. 특히 구들의 평면모양이 ‘ㄷ’자인 1호 주거지의 경우에는 출입구가 남남서쪽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사찰구역의 “위생활면” 금당과 동일한 배치방향을 가진다. 이 사실은 크라스키노성의 건물들은 적어도 서북지역의 경우 남남서향이었음을, 즉 남향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1호 건물지와 2호 건물지 사이에 약 4m의 빈 공간이 있고, 또 1호 주거지의 남동쪽 옹에서 1호 건물지와의 사이에 약 2.7m의 빈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각 건물들 사이에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호 주거지와 2호 주거지는 서로 거의 인접하고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집들이 벽체를 공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제2생활면에 속하는 여러 유구들 중 주거지는 9호, 20-21호, 22호, 23호 주거지가 있다. 다만 9호 등의 주거지들은 모두 일부분씩만 조사되어 전체 양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잔존하는 구들이나 건물의 벽체 혹은 건물의 기단은 하나같이 모서리들이 근 방위방향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제2생활면과 제1생활면 모두 동일한 구획의도에 따라 건물들이 축조되었음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주거지들의 윤곽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들의 배치양상에 대해서는 논의하기가 힘들다.
제3생활면에는 4호, 10호, 11호, 14호, 15호 주거지 등이 해당된다. 이 유구들 중 14호 주거지의 경우에는 구들이 남아 있지만, 4호, 11호, 15호 주거지는 구들도 확인되지 않았고, 또 주거지의 윤곽선도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구의 방향에 대해 판단하기가 힘들다.
서북지역의 남부 주거구역에서 제4생활면에 속하는 주거지는 5호, 13호, 24호가 있다. 그중24호 주거지에는 구들이 조사되었는데 구들의 한쪽 모서리가 근 방위방향으로 나있어 제4생활면에서도 건축물들의 기본 방향은 모서리들이 근 방위방향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5호 주거지의 네 모서리가 근 방위방향인 사실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제5생활면에는 6호, 12호, 28호 “주거지”가 속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유구들은 모두 수혈식이고, 구들이 없다. 또한 노지도 분명하지 못하다. 도면에 제시된 평면모양의 틀리지 않았다만 주거지의 방향도 일정하지 못하다. 때문에 이 유구들이 정말로 주거지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만약에 이 유구들이 주거지라면, 제5생활면 단계에서는 아직 성에 대한 구획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판단해야할 것인데, 이것은 중북지역 주거구역의 조사결과와 모순된다.
중북지역 주거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1년에 제47구역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의 ‘十’ 자 모양으로 서로 교차하는 도로에 의해 도시구획이 분명하게 확인된 지역이다. 도로는 2011년에 그 존재가 확인되었고, 2013년, 2014년, 2015년에 계속해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중북지역에서는 동서방향 도로가 62.5m, 남북방향 도로가 16.3m 길이로 각각 확인되었다. 도로의 너비는 측구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때문에 도로 노면과 주변의 토양의 차이에 의해 혹은 도로의 노면에 깔은 돌의 분포범위를 통해 도로의 너비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들은 발굴구역 혹은 섹터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도로의 원래 너비를 실제로 반영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처음 도로의 존재가 확인된 제47구역 섹터3에서는 제1생활면의 도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 갈색 사질토층의 전체 너비가 약 5.8m이었다. 2013년에 제47구역의 섹터8에서 길이 10.7m로 조사된 동동북-서서남 방향(이하 동서방향)의 도로는 돌을 깐 부분의 너비가 120~180㎝에 불과하였다. 제50구역의 섹터2와 섹터3에서 확인된 도로에 돌이 깔린 부분의 너비는 약 3.5m이었다.
중북지역 주거구역에서 동서, 남북 방향으로 서로 교차하는 ‘十’자 모양으로 배치된 도로는 크라스키노성 내부가 도로들에 의해 정연하게 구획되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도로의 다른 교차지점이 아직 확인되지 않아 도로에 의해 구획된 각 구간, 즉 방의 크기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큰 도로에 의해 구획된 ‘방’이 다시 몇 개의 세부단위로 구획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도 있다. 바로 2011년에 제47구역에 섹터1과 2012년에 제47구역의 섹터4에서 조사된 석축담장기초와 19호 주거지의 동벽이 그것이다. 이 석축담장기초와 19호 주거지의 동벽은 남북 방향 도로와 약 21m의 거리를 두고 서로 평행을 유지한다. 이 사실은 ‘방’ 내부가 동서 너비 21m 정도의 세부단위로 구획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남북너비는 얼마나 되었는지 아직은 추정할 수 없다.
중북지역 주거구역에서는 ‘十’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도로의 서북부분에서 18호 주거지, 19호 주거지, 1호, 2호, 3호 저장구덩이가 각각 조사되었다. 또한 주거지들 사이에는 빈 공터도 존재한다. 도로의 서남부분에서는 25호 주거지, 26호 주거지, 27호 주거지 등이, 동북부분에서는 22호 주거지 등이 각각 조사되었다. 다만 이 주거지들 중 25호와 27호 주거지는 제1생활면이 아니라 제2생활면 혹은 제3생활면에 속한다. 이 주거지들은, 훼손이 심하여 방향을 알기 힘든 22호 주거지를 제외하고, 모두 구들의 방향이 도로와 동일하다. 이 사실은 중북지역 주거구역의 집들이 도로들에 의해 구획된 일정 면적의 공간 내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방’ 내에 주거지들, 마당들, 저장시설 등이 일정 구역을 차지하게 배치되었음도 말해준다.
도로의 서북부분에는 18호와 19호 주거지 사이의 제47구역 섹터2에서 25호 주거지 구들로 보고된 석열유구가 하나 있다. 이 유구는 북북서-남남동 방향으로 2줄을 돌을 평행하게 배치한 석열 형태의 구조물이다. 이 석열이 노출된 길이는 약 1.2m이고, 석열의 너비는 약 0.58m이다. 이 유구는 25호 주거지 구들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이 석열을 이루고 있는 2줄의 돌들은 양쪽 측면 쪽이 면을 맞추고 있고, 또 그 안쪽은 간격도 불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면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들의 고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안쪽에서 그을음 등의 흔적도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유구의 북쪽 부분은 제47구역의 제1부분에, 남쪽 부분은 발굴구역 남쪽으로 계속될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조사되지가 못하였다. 그런데 주목을 끄는 것은 이 석열유의 방향이 남북방향 도로와 동일하고, 그리고 남북방향 도로와 석축담장기초의 거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석열은 18호 주거지의 담장기초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동시에 너비 약 21m 세부단위 구획을 다시 세분하는 담장의 기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북지역의 도로는 제47구역 섹터 3에서 제5생활면까지 조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곳의 제4생활면 도로는 위의 제1, 제2, 제3생활면 도로에 비해 서쪽으로 약 1m 이동되었다. 참고로 제4생활면 도로에서 돌을 깐 노면의 너비는 3.6m 이상이었다. 하지만 방향은 제1생활면부터 제5생활면까지 모두 동일하였다.
크라스키노성의 중북지역 주거구역에서 조사가 된 동동북-서서남 방향(대략 동서방향)과 북북서-남남동 방향(대략 남북방향)의 서로 교차하는 도로의 존재는 이 성내부가 일정한 면적으로 구획된 계획도시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도로는 동서방향으로 약 62.5m, 남북방향 약 16.3m 길이로 각각 확인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도로의 교차지점이 한 곳만 확인되어 도로에 의해 구획된 각 단위 ‘방’의 크기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교차 지점의 북서쪽에서 조사된 석축담장기초와 19호 주거지의 동벽이 동일한 방향으로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고, 또 남북방향 도로와 약 21m의 거리를 두고 평행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도로의 두 교차지점 내부가 다시 일정 규모로 세부 구획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중북지역 주거구역에서는 다수의 주거지와 저장용 움들, 주거지들 사이의 공터 등이 조사되었다. 주거지들은 방향이 모두 한 변은 동동북-서서남 방향, 다른 한 변은 북북서-남남동 방향으로서 도로와 동일하다. 또한 저장용 움들도 주거지와 도로 사이의 일정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도로 교차지점의 어느 한 방향으로도 건축물의 배치상태를 전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만큼의 면적이 발굴되지 못하였다. 향후 도로의 다른 교차지점들을 찾아내고 그리고 그 교차지점들 안의 ‘방’의 내부를 비록 하나라도 전면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북지역 주거구역의 제47구역 섹터3에서는 도로가 제5생활면까지 조사가 되었다. 그런데 각 생활면의 도로 방향이 모두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 사실은 크라스키노성은 처음부터 계획도시로 축조되었음을 그리고 처음 계획된 구획이 성 존속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유지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 제4생활면까지의 주거지들이 모두 일정 방향으로 배치된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다만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5생활면의 “주거지”로 보고된 유구들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도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은 석축담장에 의해 그 남쪽의 주거구역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곳에는 석축담장의 사이에 난 중문과 사찰구역 내의 “위 생활면” 금당의 정문이 동일한 축 선상에 위치하는 것이 주목된다. 중문과 금당 중문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그 주변에 다른 사찰관련 건물들을 배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금당은 크게 부각되었지만 탑지, 강당지, 회랑 등은 전혀 확인되지 못하였다. 추정 종루, 추정 저장창고, 우물 등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이곳에서 조사된 가마들은 사찰의 구성 요소라기보다는 사찰 건물에 사용된 기와 등의 물품을 생산하였던 임시 생산시설이었다. 그런데 이 사찰구역을 구분한 석축담장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석축담장 아래로 금당으로 곧장 향하는 도로가 확인되었고, 또 “중간생활면” 금당지와 담장도 조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간생활면” 금당지와 담장도 “위생활면” 금당지 등과 동일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사찰구역 역시 처음부터 크라스키노성의 전체 구획에 맞추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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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라스키노성의 구획과 유구배치 자료번호 : kr.d_0016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