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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승리한 중국 병사들이 철수할 경우 왜노(倭奴)가 다시 침범할 경우에 대한 대응책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선국왕에게 보낸 자문(咨文)

68. 經略咨會審察倭情商確戰守
  • 발신자
    흠차경략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병부우시랑 송(宋)
  • 발송일
    1593년 3월 7일(음)(만력 21년 3월 7일)
발신: 흠차경략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병부우시랑 송(宋)
사유: 왜정에 관한 일입니다.
 
이제독의 계품에 의하면 “2월 18일 가정(家丁) 사경(査慶) 등을 조선 통사와 함께 파견하여 왕경 동문 밖을 정탐하게 했는데, 풀을 베던 왜노 4명을 만나 각정(各丁)이 즉시 앞으로 향하여 쏘고 베었습니다. 적이 도망쳤는데 생포한 왜노 일명 신팔라라고 하는 자가 본직에게 도착하여 역심(譯審)하였습니다. 본 왜적의 공초에서 말하기를 ‘왜병이 여러 번의 전투에서 입은 손상이 매우 많습니다. 다만 관백의 법도(法度) 때문에 감히 소굴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경의 성 내부에는 3~4만 명이 있으면서 8개의 진영을 연결하고 있으며, 성 밖의 용산관(龍山館)주 001
각주 001)
한성 외부 용산 지역에는 용산창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용산창을 중심으로 방어 시설을 만들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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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평행장(平行長)이 세 군데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또 지난번 논의할 때 관백으로부터 지시를 구했는데, 관백이 말하기를 「평양과 개성은 이미 지난해에 취한 것인데 어찌 가벼이 버리는가.」 하면서 왜적 무리에게 왕경을 사수할 것을 전해 알렸습니다. 요컨대 3월 안에 직접 20여 만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절반은 왕경에서 병력을 합하여 적을 막고, 절반은 바다를 따라 중국을 나누어 침범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이제독의 당보에 의하면, “본월 20일 은밀히 초정(哨丁) 김자귀(金子貴) 등을 조선 통사와 함께 파견하여 몰래 밤중에 왜적이 주둔한 처소와 용산관의 군량과 말먹이를 쌓아 둔 23처로 가서, 서북풍을 타고 명화(明火)와 독화(毒火)를 사용하여 불화살을 일제히 어지러이 쏘아 대자 창고와 초타(草垜)주 002
각주 002)
직역하면 ‘풀로 만든 벽’으로, 용산창을 방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방어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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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불화살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을 본 왜적은 우리의 전력의 허실을 알지 못하여 엎드린 채 감히 화재를 막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불을 놓아 남관방옥(南關房屋)을 스스로 불태웠습니다. 또 함경도 왜노에 관한 정보를 얻었는데, 지난번에 고산․철산관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왕경과 2백여 리 떨어진 곳에 왔다가, 왕경으로 분집(奔集)했다고 합니다. 살펴보니, 성 밖에 진영을 만들고 있는 왜적들은 우리 병사를 실로 겁내고 있으며, 이번의 군량 방화로 식량이 끊기어 끝내는 방옥을 스스로 불태우기까지 했으니, 왜적이 비록 무리지어 있으나 세력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이로 인하여 퇴주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이제독의 당보의 의하면, “먼저 보낸 가정 사경(査慶) 등의 보고에 이르기를, ‘왜노 약 3~4백이 진시(辰時)에 강을 건너 신시(申時)까지 계속 갔다가 다음날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보고가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살펴보니, 본부가 병사를 통솔하여 속국을 구원하는 명을 받들고, 평양을 공격하여 찾은 다음 개성에 도달하고 벽제관에 이르기까지 싸우면 싸우는 대로 승리하였습니다. 파죽지세를 타고, 왕경을 되찾아 조선을 온전하게 하고, 추한 무리를 멸하여 화의 근본을 끊고자 하였으나, 비가 오는 날씨로 인하여 도로가 진창이 되어 병사와 말이 진격하기 불편해졌습니다. 따라서 잠시 날이 개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왜노로 하여금 왕경에 모두 모여 안팎을 굳게 방어하게 하였는데, 이는 관백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이니, 만일 이같이 그들이 많고 우리가 적을 때에는 단지 병사를 나누어 막아 지킬 수 있을 뿐이니, 오래되면 비용이 적지 않습니다. 혹시 왜노가 세력이 무너졌다 하여 도망치거나, 혹은 통공 요구가 허락되었다 하여 돌아간다면, 해국은 땅은 넓고 병사는 미미하여 방수하기에 자못 곤란합니다. 만약 중국의 관병을 남기자는 논의를 하고자 한다면, 해국이 군량과 말먹이가 충분하지 않아 호궤하고 포상할 자원이 전무합니다. 구원한 이래 중국은 이미 백만금을 썼는데 군사는 항상 싱거운 음식만 먹을 뿐, 짜고 비린 음식이 함께 입에 들어간 적이 없으니, 만약 강제로 머무르게 하여 오래되면 반드시 변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중국 병사들을 모두 철수한다면 혹 왜노가 이를 엿보아 알고 해국을 다시 침범할 것이나, 병력이 이미 단약하고 화기와 병기 또한 없으니 어떻게 해야 막아 수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원려(遠慮)하지 않을 수 없는 바입니다. 마땅히 자문으로 알려 드립니다. 이에 마땅히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해국 배신을 독령하여 대소 관원이 함께 모여 마음을 다하여 강구하고 널리 여러 의견을 모으십시오. 지금 왜노가 설령 병사를 증강한다면 파견된 중국의 병마가 분방하는 것 외에 해국의 병마가 마땅히 어떻게 막고 방수할 것인지, 군량과 말먹이는 어디에서 운반할 것이며 응용하기에 충분한지 여부를, 만약 왜노가 도망쳐 가고 우리 병사가 개선한다면 왕경․개성․평양 등의 지역에서 관병을 어디에서 조발하여 어떻게 수어할 것인지를, 만약 왜적 무리가 다시 와서 갑자기 침범한다면 마땅히 어떻게 막을 것인지, 군병이 충분히 믿을만한지 여부, 기계의 완비 여부 및 능히 보전할 수 있는지 여부를, 만약 중국 병사를 남길 것을 요청하고자 한다면 군량․말먹이․기갑․군장을 어떻게 마련할지, 어떤 은냥으로 지출을 감당할 것인지를 의논하십시오. 만약 군량과 말먹이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고 무기와 화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군사를 남기고자 해도 어려울 것이니 팔도의 관병을 마땅히 소집할지 여부에 대해서 하나하나 좋은 의견에 따르고 모두 명백하게 헤아려 의논하여 문서가 도착한 지 5일 내에 자문으로 회답한다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겠습니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조선국왕에게 보냅니다.
 
만력 21년 3월 7일.

  • 각주 001)
    한성 외부 용산 지역에는 용산창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용산창을 중심으로 방어 시설을 만들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직역하면 ‘풀로 만든 벽’으로, 용산창을 방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방어벽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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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중국 병사들이 철수할 경우 왜노(倭奴)가 다시 침범할 경우에 대한 대응책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선국왕에게 보낸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1_0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