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봉(衣縫; 기누누히)
의봉(衣縫; 기누누히)
백제국(百濟國)의 신로명(神露命; 가무로노미코토)에서 나왔다.
【주석】
1. 의봉(衣縫)
의봉은 화천국(和泉國) 신별 「의봉」 조에도 게재되어 있다.
의봉(衣縫; 기누누히)이라는 씨명은 의복을 짓는 일에 종사한 의봉부(衣縫部; 기누누히베)를 관할하는 반조씨족(伴造氏族)이나 그 부민의 후손이었기에 붙은 씨명이라 추정된다.
의봉씨(衣縫氏)는 본조 외에도 화천국(和泉國) 신별(神別)에 게재된 ‘요속일명(饒速日命) 6세손 이향아색웅명(伊香我色雄命)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의봉씨가 있다.의봉씨 일족은 화천국 신별 「의봉」 조(703) 참조.
의봉은 화천국(和泉國) 신별 「의봉」 조에도 게재되어 있다.
의봉(衣縫; 기누누히)이라는 씨명은 의복을 짓는 일에 종사한 의봉부(衣縫部; 기누누히베)를 관할하는 반조씨족(伴造氏族)이나 그 부민의 후손이었기에 붙은 씨명이라 추정된다.
의봉씨(衣縫氏)는 본조 외에도 화천국(和泉國) 신별(神別)에 게재된 ‘요속일명(饒速日命) 6세손 이향아색웅명(伊香我色雄命)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의봉씨가 있다.의봉씨 일족은 화천국 신별 「의봉」 조(703) 참조.
*의봉에 관한 전승 기사
『일본서기』 응신(應神) 14년 2월조에 “백제 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는데 이름이 진모진(眞毛津)이었다. 지금 내목의봉(來目衣縫; 구메노키누누이)의 시조이다”라고 적혀 있고, 응신천황 37년 2월 시월(是月)조에는 “이달에 아지사주 등이 오(吳)에서 축자로 왔다. 이때 흉형대신(胸形大神)이 공녀(工女)들을 원했기 때문에 형원(兄媛)으로 하여금 흉형대신을 받들도록 하였다. 이는 즉 지금의 축자국에 있는 어사군(御使君; 미츠카히노키미)의 선조이다. 이 세 명의 여자를 데리고 진국(津國)의 무고(武庫)에 도착했을 때 천황이 이미 죽어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초료존에게 헌상하였다. 이 여인들의 후손은 지금의 오의봉(吳衣縫; 구레노키누누히)과 문옥의봉(蚊屋衣縫; 가야노키누누히)이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일본서기』 웅략(雄略) 7년 시세조에 인용된 혹운(或云)에서는 “어떤 책에서는 길비신제군이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한수인부(漢手人部; 아야노테히토베), 의봉부(衣縫部; 기누누히베), 육인부(宍人部; 시시히토베)를 바쳤다고 적고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 웅략 14년 정월 병인삭 무인조에는 “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 등이 오국의 사신과 함께 오(吳)가 바친 수말재기(手末才技)인 한직(漢織; 아야하토리), 오직(吳織; 구레노하토리) 및 의봉(衣縫)인 형원(兄媛; 에히메)과 제원(弟媛; 오토히메)을 거느리고, 주길진(住吉津; 스미노에노츠)에 머물렀다. 이달에 오의 사절을 위한 길을 만들어 기치진로(磯齒津路)와 통하게 하고, 오판(吳坂)이라고 이름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 읍보군(揖保郡) 이세야조(伊勢野條)에는 “의봉저수(衣縫猪手; 기누누이노이테)와 한인도량(漢人刀良; 아야히토노토라) 등의 선조가 이곳으로 와서 살면서 신사를 산봉우리에 세워 공손히 제사지냈다”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14년 2월조에 “백제 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는데 이름이 진모진(眞毛津)이었다. 지금 내목의봉(來目衣縫; 구메노키누누이)의 시조이다”라고 적혀 있고, 응신천황 37년 2월 시월(是月)조에는 “이달에 아지사주 등이 오(吳)에서 축자로 왔다. 이때 흉형대신(胸形大神)이 공녀(工女)들을 원했기 때문에 형원(兄媛)으로 하여금 흉형대신을 받들도록 하였다. 이는 즉 지금의 축자국에 있는 어사군(御使君; 미츠카히노키미)의 선조이다. 이 세 명의 여자를 데리고 진국(津國)의 무고(武庫)에 도착했을 때 천황이 이미 죽어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초료존에게 헌상하였다. 이 여인들의 후손은 지금의 오의봉(吳衣縫; 구레노키누누히)과 문옥의봉(蚊屋衣縫; 가야노키누누히)이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일본서기』 웅략(雄略) 7년 시세조에 인용된 혹운(或云)에서는 “어떤 책에서는 길비신제군이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한수인부(漢手人部; 아야노테히토베), 의봉부(衣縫部; 기누누히베), 육인부(宍人部; 시시히토베)를 바쳤다고 적고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 웅략 14년 정월 병인삭 무인조에는 “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 등이 오국의 사신과 함께 오(吳)가 바친 수말재기(手末才技)인 한직(漢織; 아야하토리), 오직(吳織; 구레노하토리) 및 의봉(衣縫)인 형원(兄媛; 에히메)과 제원(弟媛; 오토히메)을 거느리고, 주길진(住吉津; 스미노에노츠)에 머물렀다. 이달에 오의 사절을 위한 길을 만들어 기치진로(磯齒津路)와 통하게 하고, 오판(吳坂)이라고 이름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 읍보군(揖保郡) 이세야조(伊勢野條)에는 “의봉저수(衣縫猪手; 기누누이노이테)와 한인도량(漢人刀良; 아야히토노토라) 등의 선조가 이곳으로 와서 살면서 신사를 산봉우리에 세워 공손히 제사지냈다”라고 적혀 있다.
2. 신로명(神露命)
신로명은 여기에만 보인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로(神露)가 ‘가무로’라고 읽히는 백제인의 이름이며 명(命) 자는 사주(使主; 오미)나 의미(意彌; 오미)라는 말이 전화되어 사용된 것이라 추정하였다.
신로명은 여기에만 보인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로(神露)가 ‘가무로’라고 읽히는 백제인의 이름이며 명(命) 자는 사주(使主; 오미)나 의미(意彌; 오미)라는 말이 전화되어 사용된 것이라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