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 모대(牟大)가 올린 표문(表文)
(앞부분 누락)주 001
번역주 001)
“… 공에 대하여 보답하고 부지런히 힘씀을 위로하는 것은 실로 그 명성과 공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가행주 002영삭장군주 003 저근주 004 등 4명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나라의 환란을 물리쳤으며, 뜻과 용기의 결단성과 굳셈은 위의가 명장과 비등하니, 나라의 든든한 성이요, 사직의 튼튼한 울타리라 할 만합니다. 공을 논하고 노고를 헤아리면 마땅히 환히 드러나는 자리에 있어야 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잠시 임시직을 가수(假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은혜로움을 베푸시고 가엾이 여기시어 가수(假授)를 제(除)하여 주십시오. 영삭장군 면중왕주 005 저근은 중요한 일을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을 열거할 만하니 지금 가행관군장군주 006· 도장군주 007·도한왕주 008으로, 건위장군·팔중후주 009 여고는 젊은 나이부터 보좌하여 충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으므로 지금 가행 영삭장군·아착왕주 010으로, 건위장군 여력은 본바탕이 충성스럽고 정성스러우며 문무가 매우 뛰어나므로 지금 가행용양장군·매로왕주 011 『남제서』 백제국전은 처음 시작 부분의 원문 일부가 결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北宋의 王欽若이 1013년 완성한 『책부원구』 外臣部 기록을 통해 『남제서』의 결락된 부분 324자를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兪元載, 1993). 『책부원구』의 내용을 소개하면, “武帝 永明 八年(490) 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 其拜受不亦休乎”이다.
번역주 011)
으로, 광무장군 여고는 중요한 일에 충성을 다하고 국정을 빛내고 선양했으므로 지금 가행건위장군·불사후주 012라 하였습 니다.”주 013 邁盧 : 馬西良(전북 沃溝 일대) 또는 馬斯良縣(전남 長興郡 會寧 일대)으로 비정된다(末松保和, 1949 ; 千寬宇, 1979). 웅진도독부 예하 13현 중에도 매라현이 등장하는데, 13현이 모두 충청도 일대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에 장흥군 회령 일대로 보기는 곤란하다. 1995년 부여 궁남지에서 발견된 ‘西部後巷’ 목간에서는 “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어 매라성, 즉 매로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 더 확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목간을 호적과 관련된 목간으로 본다면, 왕도 사비의 서부 후항에 거주하는 사람이 보유한 토지이므로 매라성을 왕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비정할 여지도 있다(김영심, 2003). 그러나 현재까지는 서부 후항에 거주하는 왕경인 사달사가 매라성에 논을 소유한 사실을 말해준다거나(이도학, 2003), 서부 후항의 유식계층과 귀인이 하나의 호로 편제되어 매라성의 수전 5형을 지급받아 사민된 것으로 보면서(이경섭, 2010) 매라성을 전북 옥구로 비정하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다.
번역주 013)
王·侯號 : 백제에서 왕·후가 등장하는 시기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근초고왕이 자신은 대왕으로서 왕이나 후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칠지도의 ‘侯王’은 육조시대 금석문에 보이는 일반적인 길상구일 뿐이지 이미 백제사회 내에서 후왕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근거로 삼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칠지도의 후왕 단계와 개로왕대의 좌·우현왕 단계, 지명이 관칭된 왕·후호 단계를 구분해서 봐야 할 듯하다. 칠지도의 ‘후왕’이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근초고왕이 대왕으로서 왕이나 후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거나(노중국, 2000), 『송서』 百濟條에도 좌현왕·우현왕이 보이기 때문에 이들과 弗斯侯 등 왕·후호의 사여를 통해 개로왕 자신은 大王으로 격상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坂元義種, 1978b). 대왕제가 실시되어 백제왕은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하면서 그 신료들을 왕·후·태수로 임명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모색해나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梁起錫, 1984).
그러나 본서에 보이는 여러 지명 + 왕·후호는 구체적 지명이 붙고, 또 이들이 임지를 옮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왕후제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왕·후제를 의례적이라거나 대중국 관계상의 필요로만 한정지을 수 없다.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허봉이 아니라 현실적인 세력의 크기가 반영되었으며, 백제국 내에서 일정한 기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후호를 백제 사회 내부의 운영원리로 파악하고 지방통치 문제와 관련시킨 연구가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왕·후호제가 지방 지배와 관련이 있다고 보되, 담로제와는 별개로 보는 견해(坂元義種, 1978b)와 무령왕대의 담로제 실시와 관련시켜 보는 견해(김영심, 1997), 왕·후제에서 담로제로 계기적으로 변화했다는 견해(정재윤, 1992) 등 세부적으로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왕·후호를 소지한 자가 사여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노중국, 2006 ; 노중국, 2012b), 고흥 길두리 금동관과 왕후제를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보는 견해(문안식, 2007)도 나오고 있으나, 그동안 지방 통치와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어왔던 금동관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본서에 보이는 여러 지명 + 왕·후호는 구체적 지명이 붙고, 또 이들이 임지를 옮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왕후제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왕·후제를 의례적이라거나 대중국 관계상의 필요로만 한정지을 수 없다.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허봉이 아니라 현실적인 세력의 크기가 반영되었으며, 백제국 내에서 일정한 기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후호를 백제 사회 내부의 운영원리로 파악하고 지방통치 문제와 관련시킨 연구가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왕·후호제가 지방 지배와 관련이 있다고 보되, 담로제와는 별개로 보는 견해(坂元義種, 1978b)와 무령왕대의 담로제 실시와 관련시켜 보는 견해(김영심, 1997), 왕·후제에서 담로제로 계기적으로 변화했다는 견해(정재윤, 1992) 등 세부적으로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왕·후호를 소지한 자가 사여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노중국, 2006 ; 노중국, 2012b), 고흥 길두리 금동관과 왕후제를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보는 견해(문안식, 2007)도 나오고 있으나, 그동안 지방 통치와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어왔던 금동관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모대주 014
번역주 014)
가 또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광양태수 겸 장사주 015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조선태수 겸 사마주 016 신 양무, 행선위장군 겸 참군주 017 신 회매 등 3명은 뜻과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과 정성이 일찍부터 드러나 지난 태시 연간(465~471) 나란히 송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은 신의 사신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 지극한 공로를 생각하면 마땅히 관작을 올려주어야 하니 삼가 선례에 따라 각각 임시직을 가수(假授)하였습니다. 또한 천자의 은택은 영험하고 아름다워 만 리 밖까지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의 뜰을 친히 밟으면서 신뢰를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어여삐 여겨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해주십시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적이 일찍부터 드러났고 공무에 부지런히 힘썼으므로 지금 가행용양장군·대방태수주 018로, 양무는 뜻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놓지 않으니 지금 가행건위장군·광릉태수주 019로, 회매는 뜻을 가짐이 주도면밀하여 여러 차례 근면한 공을 세웠으니 지금 가행광무장군·청하태수로 하였습니다.”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아울러 장군호를 주고 태수직을 제수하였다. [백제왕은]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으로 삼았다. 牟大 : 백제 24대 동성왕으로, 479~501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牟大’ 또는 ‘摩牟’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牟大’·‘麻帝’·‘餘大’로, 『일본서기』 雄略紀와 武烈紀에는 ‘末多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출자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문주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삼근왕의 堂弟로, 『일본서기』 웅략기에는 곤지의 아들로 나오고 있어 서로 일치한다. 本書에는 牟都의 孫으로, 『양서』에는 牟都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모도가 문주왕이라면(李基東, 1974) 국내의 사서와 혈연상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중국 측의 기록이 대체로 실제 혈연에 근거하여 기술되었다기보다는 관념상 왕위 계승을 부자 승계로 기록한 사례가 많음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곤지의 아들로 보는 설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알자복야를 겸한 손부를 사신으로 보내 명을 내려, [모]대를 작고한 할아버지 모도주 020
번역주 020)
를 이은 백제왕으로 삼으면서 말하였다. “아아! 생각건대 그대들은 대대로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그 정성이 먼 곳에서 드러나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상전(常典: 변하지 않는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잇게 하였으니, 가서 공경할지어다. 경건하게 아름다운 사업을 이어받을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에게 조서를 내리니, 이제 모대에게 할아버지 모도의 작위를 잇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겠다. 왕위에 오름에 인장과 끈 다섯, 동호죽부주 021 牟都 : 백제 22대 文周王으로, 475년에서 477년까지 재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文周’, 같은 책 細註와 『일본서기』 웅략기 21년조에는 ‘汶洲’로,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文明’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 사서 중 『송서』에는 ‘餘都’, 本書에는 ‘牟都’로 표기되었다. 『남제서』의 모도는 문주왕으로 보는 견해(李基東, 1974)가 일반적이다. 모도의 출자에 대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국내 기록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전하고 있으나, 『일본서기』 웅략기 21년조의 細注에는 “汶洲王蓋鹵王母弟也”라고 하여 개로왕의 아우로 기술하였다. 문주가 통상 王弟가 임명되는 상좌평에 임명된 것을 고려하면 개로왕의 동생이며, 461년 무렵 왜에 파견된 곤지의 형으로 보는 주장(李基白, 1959 ; 千寬宇, 1976b ; 李道學, 1984)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번역주 021)
넷을 주니, 왕이 이를 공경하여 받으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주 022
銅虎竹符 : 銅虎符와 竹使符를 가리킨다. 동호부는 범의 형상으로 만든 구리 兵符로서 郡國의 守相들이 지녔다. 대나무로 만든 竹使符는 한나라 때 태수를 임명할 때에 주었던 부절로 군사를 징발할 때에만 사용되었다. 두 가지 부절은 모두 사신들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범의 형상을 가진 割符인 ‘虎符’는 오른쪽 신체와 왼쪽 신체로 반으로 분리되며, 잔등 위 평면에 篆書로 虎符를 준다는 글을 좌우 절반으로 나누어 기록하는데, 맞추면 전체 문장이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구리로 만든 동호부가 사용되지만,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호부도 있었고, 호형 할부만이 아니라 魚符·馬符·竹符도 있었다고 한다(방선주, 1973).
이 해에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해 그 나라 경계에 들어오니,주 023
번역주 023)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 등을 보내 무리를 이끌고 오랑캐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 … :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10년(488)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자치통감』 卷136 世祖武皇帝 永明 6년(488)조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남제서』의 기록과는 2년의 차이가 있다. 당의 許嵩이 756년 무렵 완성했다고 하는 『건강실록(建康實錄)』에도 “魏虜征之 大破百濟王弁都”라는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나라 때 이 사건이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육로상으로 고구려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백제와 北魏 사이에 ‘기병 수십만’에 의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기사를 둘러싼 해석은 논란이 되고 있다. 먼저 이 기록을 신뢰하여 북위가 海路로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1977). 이와는 달리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관련시켜 북위 군대가 고구려의 영역을 통과하거나 혹은 ‘수십만 기병’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백제 영토에 침입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므로 백제가 영유한 요서 지방의 영토에 침입한 것이라는 견해(金庠基, 1967)와 백제가 중국 대륙 동해안에 일정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백제와 북위 양국의 전쟁은 발해만 주변이나 산동반도 남부의 어느 곳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方善柱, 1971)도 있다. 한편 魏虜를 백제의 실제 전쟁 상대로 기록된 ‘匈梨’, ‘匈驪’와 연결시켜 고구려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견해(兪元載, 1992), 북위와 고구려의 연합군으로 보는 견해(朴眞淑, 2000) 등도 있다. 따라서 본 기사에 대해서는 전쟁의 주체 및 시기, 장소는 물론 전쟁의 성격 등의 측면에서 총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건무 2년(495) 모대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신은 예로부터 분봉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더하여 절부와 부월주 024을 받아 여러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저근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받아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490)에도 험윤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핍박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크게 당황하여 바닷물이 들끓는 것처럼 붕괴되었습니다. 달아나는 틈을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봉이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조용해진 것은 실로 사법명 등의 지략 때문이니 그 공훈을 헤아려 마땅히 표창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매라주 025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벽중주 026왕으로, 해례곤을 행무위장군·불중주 027후로 삼았고, 목간나는 전부터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돈대]과 배를 공격하여 빼앗았으므로 행광위장군·면중후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은을 특별히 베풀어 관작을 제수해주시기를 청합니다.”
또한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신이 파견한 행용양장군·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 행건무장군·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참군·행진위장군·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직 공적인 것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운 일에 처하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지금 사신의 임무를 맡아서는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 지극한 정성을 다했습니다. 실로 관작을 올려주는 것이 마땅하여 임시로 관직을 주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조께서 특별히 은혜를 내리시어 관직을 제수해주십시오.” 조서를 내려 허가하고 아울러 [장]군호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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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남제서』 백제국전은 처음 시작 부분의 원문 일부가 결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北宋의 王欽若이 1013년 완성한 『책부원구』 外臣部 기록을 통해 『남제서』의 결락된 부분 324자를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兪元載, 1993). 『책부원구』의 내용을 소개하면, “武帝 永明 八年(490) 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 其拜受不亦休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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邁盧 : 馬西良(전북 沃溝 일대) 또는 馬斯良縣(전남 長興郡 會寧 일대)으로 비정된다(末松保和, 1949 ; 千寬宇, 1979). 웅진도독부 예하 13현 중에도 매라현이 등장하는데, 13현이 모두 충청도 일대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에 장흥군 회령 일대로 보기는 곤란하다. 1995년 부여 궁남지에서 발견된 ‘西部後巷’ 목간에서는 “邁羅城法利源水田五形”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어 매라성, 즉 매로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 더 확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목간을 호적과 관련된 목간으로 본다면, 왕도 사비의 서부 후항에 거주하는 사람이 보유한 토지이므로 매라성을 왕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비정할 여지도 있다(김영심, 2003). 그러나 현재까지는 서부 후항에 거주하는 왕경인 사달사가 매라성에 논을 소유한 사실을 말해준다거나(이도학, 2003), 서부 후항의 유식계층과 귀인이 하나의 호로 편제되어 매라성의 수전 5형을 지급받아 사민된 것으로 보면서(이경섭, 2010) 매라성을 전북 옥구로 비정하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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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3)
王·侯號 : 백제에서 왕·후가 등장하는 시기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근초고왕이 자신은 대왕으로서 왕이나 후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칠지도의 ‘侯王’은 육조시대 금석문에 보이는 일반적인 길상구일 뿐이지 이미 백제사회 내에서 후왕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근거로 삼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칠지도의 후왕 단계와 개로왕대의 좌·우현왕 단계, 지명이 관칭된 왕·후호 단계를 구분해서 봐야 할 듯하다. 칠지도의 ‘후왕’이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근초고왕이 대왕으로서 왕이나 후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거나(노중국, 2000), 『송서』 百濟條에도 좌현왕·우현왕이 보이기 때문에 이들과 弗斯侯 등 왕·후호의 사여를 통해 개로왕 자신은 大王으로 격상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坂元義種, 1978b). 대왕제가 실시되어 백제왕은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하면서 그 신료들을 왕·후·태수로 임명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모색해나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梁起錫, 1984).
그러나 본서에 보이는 여러 지명 + 왕·후호는 구체적 지명이 붙고, 또 이들이 임지를 옮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왕후제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왕·후제를 의례적이라거나 대중국 관계상의 필요로만 한정지을 수 없다.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허봉이 아니라 현실적인 세력의 크기가 반영되었으며, 백제국 내에서 일정한 기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후호를 백제 사회 내부의 운영원리로 파악하고 지방통치 문제와 관련시킨 연구가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왕·후호제가 지방 지배와 관련이 있다고 보되, 담로제와는 별개로 보는 견해(坂元義種, 1978b)와 무령왕대의 담로제 실시와 관련시켜 보는 견해(김영심, 1997), 왕·후제에서 담로제로 계기적으로 변화했다는 견해(정재윤, 1992) 등 세부적으로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왕·후호를 소지한 자가 사여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노중국, 2006 ; 노중국, 2012b), 고흥 길두리 금동관과 왕후제를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보는 견해(문안식, 2007)도 나오고 있으나, 그동안 지방 통치와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어왔던 금동관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
번역주 014)
牟大 : 백제 24대 동성왕으로, 479~501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牟大’ 또는 ‘摩牟’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牟大’·‘麻帝’·‘餘大’로, 『일본서기』 雄略紀와 武烈紀에는 ‘末多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출자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문주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삼근왕의 堂弟로, 『일본서기』 웅략기에는 곤지의 아들로 나오고 있어 서로 일치한다. 本書에는 牟都의 孫으로, 『양서』에는 牟都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모도가 문주왕이라면(李基東, 1974) 국내의 사서와 혈연상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중국 측의 기록이 대체로 실제 혈연에 근거하여 기술되었다기보다는 관념상 왕위 계승을 부자 승계로 기록한 사례가 많음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곤지의 아들로 보는 설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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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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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0)
牟都 : 백제 22대 文周王으로, 475년에서 477년까지 재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文周’, 같은 책 細註와 『일본서기』 웅략기 21년조에는 ‘汶洲’로,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文明’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 사서 중 『송서』에는 ‘餘都’, 本書에는 ‘牟都’로 표기되었다. 『남제서』의 모도는 문주왕으로 보는 견해(李基東, 1974)가 일반적이다. 모도의 출자에 대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국내 기록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전하고 있으나, 『일본서기』 웅략기 21년조의 細注에는 “汶洲王蓋鹵王母弟也”라고 하여 개로왕의 아우로 기술하였다. 문주가 통상 王弟가 임명되는 상좌평에 임명된 것을 고려하면 개로왕의 동생이며, 461년 무렵 왜에 파견된 곤지의 형으로 보는 주장(李基白, 1959 ; 千寬宇, 1976b ; 李道學, 1984)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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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1)
銅虎竹符 : 銅虎符와 竹使符를 가리킨다. 동호부는 범의 형상으로 만든 구리 兵符로서 郡國의 守相들이 지녔다. 대나무로 만든 竹使符는 한나라 때 태수를 임명할 때에 주었던 부절로 군사를 징발할 때에만 사용되었다. 두 가지 부절은 모두 사신들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범의 형상을 가진 割符인 ‘虎符’는 오른쪽 신체와 왼쪽 신체로 반으로 분리되며, 잔등 위 평면에 篆書로 虎符를 준다는 글을 좌우 절반으로 나누어 기록하는데, 맞추면 전체 문장이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구리로 만든 동호부가 사용되지만,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호부도 있었고, 호형 할부만이 아니라 魚符·馬符·竹符도 있었다고 한다(방선주,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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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 … :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10년(488)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자치통감』 卷136 世祖武皇帝 永明 6년(488)조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남제서』의 기록과는 2년의 차이가 있다. 당의 許嵩이 756년 무렵 완성했다고 하는 『건강실록(建康實錄)』에도 “魏虜征之 大破百濟王弁都”라는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나라 때 이 사건이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육로상으로 고구려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백제와 北魏 사이에 ‘기병 수십만’에 의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기사를 둘러싼 해석은 논란이 되고 있다. 먼저 이 기록을 신뢰하여 북위가 海路로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1977). 이와는 달리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관련시켜 북위 군대가 고구려의 영역을 통과하거나 혹은 ‘수십만 기병’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백제 영토에 침입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므로 백제가 영유한 요서 지방의 영토에 침입한 것이라는 견해(金庠基, 1967)와 백제가 중국 대륙 동해안에 일정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백제와 북위 양국의 전쟁은 발해만 주변이나 산동반도 남부의 어느 곳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方善柱, 1971)도 있다. 한편 魏虜를 백제의 실제 전쟁 상대로 기록된 ‘匈梨’, ‘匈驪’와 연결시켜 고구려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견해(兪元載, 1992), 북위와 고구려의 연합군으로 보는 견해(朴眞淑, 2000) 등도 있다. 따라서 본 기사에 대해서는 전쟁의 주체 및 시기, 장소는 물론 전쟁의 성격 등의 측면에서 총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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