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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기문씨(己汶氏, 고몽시)

기문씨(己汶氏, 고몽시)
 춘야련(春野連; 하루노무라지)과 조상이 같으며 속고왕(速古王)의 후손인 문휴해(汶休奚)의 후손이다.
 
【주석】
1. 기문씨(己汶氏)
기문씨는 전라북도 남원의 옛 지명인 고룡(古龍)에서 유래한다. 『일본서기』 계체기 7년(513) 6월조, 동 11월조, 동 10년 5월조, 동 9월조 등에 일본이 백제에 이 지역을 하사했다는 설화가 나온다. 좌경 황별(하) 「길전련(吉田連)」 조(94)에 “임나국이 말하기를, 신국(臣國)의 동북에 3기문(상기문, 중기문, 하기문)이 있고, 지방 3백 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문 지역은 적어도 6세기 전반에는 백제에 복속된다. 백제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 기문의 땅은 백제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이 되면 신라의 영역으로 변화된다. 신라는 통일 직후인 신문왕 5년(685)에 정치·군사상의 요충지에 5소경을 두었는데, 백제의 영역이었던 고룡(古龍, 己汶)에는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 『신찬성씨록』 에 보이는 “삼기문(三己汶)의 땅은 넓이는 3백 리이고 토지와 인민은 풍요로우나, 신라국과 상쟁하여 전쟁이 그치질 않아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졌다”라는 내용은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옛 땅에 대한 군정을 실시하자 당군을 몰아내고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할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생각된다. 삼기문의 역사에서 볼 때 이 지역은 6세기 이후 백제의 남하 과정에서 복속되었고, 7세기 후반 신라의 영역으로 된 이후에는 남원소경으로 편입되었다. 기문씨의 시조 전승은 백제에 복속된 이후이고, 아마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이주하여 거주지명을 씨명으로 한 씨족일 것으로 보인다.
2. 문휴해(汶休奚)
『일본서기』 흠명기 8년(537) 4월조에 백제가 상부(上部) 나솔 문휴마나(汶休麻那), 하부(下部) 고덕(固德) 문휴대산(汶休帶山)을 왜국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문휴는 백제의 씨명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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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씨(己汶氏, 고몽시)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40_0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