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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대강기촌(大崗忌寸; 오오카노이미키)은...]

대강기촌(大崗忌寸; 오오카노이미키)은 위(魏) 문제(文帝)의 후손인 안귀공(安貴公)으로부터 나왔다. 대박뢰유무천황(大泊瀨幼武天皇; 오하츠세노와카다케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웅략(雄略)이다.]의 치세에 4부(部)의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다. 아들 용(龍)[일명 진귀(辰貴)이다.]은 그림을 잘 그렸다. 소박뢰치초료천황(小泊瀨稚鷦鷯天皇)[시호는 무열(武烈)이다.]은 그 재능을 칭찬하여 오비토(首) 성을 하사하였다. 5세손인 근대일혜존(勤大壹惠尊; 곤다이이치에손)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천명개별천황(天命開別天皇; 아메미코토하루키와케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천지(天智)이다.] 치세 때 왜화사(倭畫師; 야마토노에시)의 성을 받았다. 또 고야천황(高野天皇; 다카노스메라미코토)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96)에 거주지에 따라 다시 대강기촌(大崗忌寸; 오오카노이미키) 성을 하사하였다.
 
【주석】
1. 대강기촌(大崗忌寸)
대강(大崗, 大岡)은 대화국(大和國) 첨상군(添上郡) 대강향(大岡鄕)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속일본기』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5월조에 “우경인 정6위하 왜화사종마려(倭畫師種麻呂) 등 18인에게 대강기촌(大岡忌寸)의 씨성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강기촌의 옛 성은 왜화사(倭畫師)였음을 알 수 있다.
대강기촌씨 일족인 왜화사(倭畫師)씨의 인명을 보면, 왜화사음주(倭畫師音檮, 『일본서기』 天武 6년 5월조), 양덕화사순호(養德畫師楯戶, 『속일본기』 천평 17년 4월조), 왜화사종마려(倭畫師種麻呂, 『속일본기』 神護景雲 3년 5월조), 왜화사대충(倭畫師大虫, 『平城宮跡出土木簡』 2) 등이 보인다.
대강기촌(大崗忌寸)으로 개성된 이후의 인명으로는 대강기촌풍계(大崗忌寸豐繼, 『類聚國史』 99, 敍位, 天長 3년 정월 갑술조)가 있다. 그는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6년(839)2월조에 외종5위하의 관위를 갖고 목공조(木工助)에 임명되었고, 동 8년 5월조에는 주세두(主稅頭)가 적혀 있다. 이때 그의 성은 대강기촌(大崗忌寸)에서 대강숙녜(大崗宿禰)로 개성되었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왜화사의 도래 전승이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7년(463) 시세조에 백제로부터 다양한 기술자들이 일본에 왔다는 기록에 해당한다고 추정한다. 또 화부(畫部) 인사라아(因斯羅我)는 대강기촌씨의 선조이고, 완본에는 인사라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 기록은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화공 집단의 이주 전승이며, 한반도계로서 최초의 화공 인명이 등장한다. 『일본서기』 숭준기(崇峻紀) 원년(588) 시세조에는 백제에서 화공 백가(白加)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원흥사가람연기병류기자재장(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에 수록된 탑의 노반명에도 명문을 쓴 인물로 백가박사(百加博士)라는 동일 인명이 나온다. 당시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 사원 건축과 관련해서 파견된 공인이다. 한편 대판시(大阪市) 동주길구(東住吉區) 상진(桑津)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募之乎/文田里○道意白加之·各家客等之”)에도백가(白加)라는 문자가 명기되어 있다. 이때의 백가를 백제 화공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화공으로 추정할 경우에 직무와 관련된 명칭이 나오지 않고 문맥상으로도 인명으로 읽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2. 위문제(魏文帝)
중국 삼국 시대 위(魏)의 초대 황제이다. 아버지 조조(曹操)의 세력을 계승하여 후한의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왕조를 개창하였다. 재위 기간은 220~226년까지이다.
3. 안귀공(安貴公)
『신찬성씨록』 우경 제번(하) 백제 「강련(岡連)」 조(868)에 “강련은 시주공(市往公)과 같은 조상이다. 목도왕(目圖王)의 아들인 안귀(安貴)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백제를 출자로 하는 안귀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중국 출자의 안귀공과 백제국 목도왕의 아들 안귀는 동일 인물로 보인다. 이 경우는 원래 백제계 씨족인데 후에 중국계로 출자를 개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도래계 씨족들에게 빈번하게 나타난다.
4. 사부(四部)
4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 31년 정월조에 “국내의 민호를 나누어 남부와 북부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동 33년 8월조에는 “동서의 2부를 추가로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동서남북의 4부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 다루왕 11년 10월조에는 백제 왕이 동서의 양부를 순행하여 빈곤자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위무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비유왕 2년(305)조에도 왕이 4부를 순행하여 빈곤자에 대해 위무하고 곡물을 분배한 기사가 보인다. 동 전지왕 13년(417)조에는 동북의 2부로부터 15세 이상의 사람을 징발하여 축성하였고, 동성왕 12년(490)조에도 북부인을 징발하여 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4부의 명칭으로부터 대강기촌(大崗忌寸)의 출자가 직접적으로는 백제일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5. 용(龍)[일명진귀【一名辰貴)】
이 인명은 기타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명 진귀(辰貴)라는 이름은 진사왕(辰斯王), 왕진이(王辰爾), 귀수왕(貴須王) 등 백제의 인명에 자주 보이는 글자로 백제 출자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6. 근대일혜존(勤大壹惠尊)
근대일(勤大壹)은 천무(天武) 14년(685) 정월에 제정된 48계의 위계 중 17위이다. 율령국가 위계의 정6위상에 해당한다. 혜존(惠尊)은 천지천황 시대에 그림에 재능이 있어 왜화사(倭畫師)의 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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