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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대화숙녜(大和宿禰; 야마토노스쿠네)

대화숙녜(大和宿禰; 야마토노스쿠네)
 신지진언명(神知津彦命; 가무시리츠히코노미토토)에서 나왔다. 신일본반여언천황(神日本磐余彦天皇; 가무야마토이하레히코노스메라미코토)이 일향(日向; 히무카) 땅에서 대왜주(大倭洲; 야마토노쿠니)를 향해서 속흡문(速吸門; 하야스히노토)에 이르렀을 때, 어인(漁人) 있어 배에 타고 도달하였다. 천황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신은 “이 국의 신이고, 이름은 우두언(宇豆彦; 우즈히코)이라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신의 아들이 왔다고 들어서 마중하러 왔다. 바로 황선(皇船)을 끌어당겨 해로를 인도하였다. 그래서 신지진언(神知津彦; 가무시리츠히코)[다른 이름은 추근진언(椎根津彦; 시히네츠히코)라고 한다.]이라고 부른다. 군사 책략에 능하여 천황이 기뻐하며 대왜국조(大倭國造;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대왜직(大倭直; 야마토노아타히)의 시조이다.
 
【주석】
1. 대화숙녜(大和宿禰)
대화(大和; 야마토)라는 씨명은 대화국 성상군(城上郡) 대화(大和; 야마토)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왜(大倭), 대양덕(大養德)이라고도 쓴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10년(681) 4월 경술조에 왜직룡마려(倭直龍麻呂)가 연(連)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고, 천무천황 12년(683) 9월 정미조에는 왜직(倭直)이 연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또 천무천황 14년(685) 6월 갑오조에 대왜련(大倭連)이 기촌(忌寸)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天平) 9년(737) 11월 임진조에 정6위상 대왜기촌소동인(大倭忌寸小東人)과 종6위하 대왜기촌영수(大倭忌寸水守) 2명이 숙녜 성을 받았다. 또 천평 20년(748) 정월 갑술조의 대왜련심전(大倭連深田), 대왜련어명(大倭連魚名)에게 숙녜 성을 주었다고 하고, 천평승보 3년(751) 10월 정사조에 대왜국(大倭國) 성하군인(城下郡人) 대왜련전장(大倭連田長)과 대왜련고인(大倭連古人)등 8인이 숙녜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왜직을 칭한 씨족 중에는 ‘직(直)→연(連)→기촌(忌寸)→숙녜(宿禰)’로 개성되거나 직 성과 연 성에 머물다가 숙녜 성으로 개성된 존재도 확인된다.
왜직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수인천황 3년 3월조에 왜직(倭直)의 조상 장미(長尾), 인덕천황 즉위전기에 마려(麻呂), 오자룡(吾子龍) 등이 있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14년 4월 경술조의 왜직룡마려가 보인다.
대왜기촌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신귀(神龜) 4년(727) 11월 기해조 등의 종5위상(극위) 대왜기촌오백족(大倭忌寸五百足), 화동 7년(714) 11월 무자조의 대화국(大倭國) 첨하군인(添下郡人) 대왜기촌과안(大倭忌寸果安), 천평(天平) 9년(737) 11월 임진조 등의 산위(散位) 정6위상 대왜기촌소동인(大倭忌寸小東人)과 대외기(大外記) 종6위하 대왜기촌수수(大倭忌寸水守)가 숙녜 성을 받았다. 소동인은 『속일본기』 천평 10년(738) 윤7월 계묘조에 외종5위하(극위) 대양덕숙녜소동인(大養德宿禰小東人)이 형부소보(刑部少輔)에 보임된 기사가 보인다. 또 수수는 『속일본기』 천평 19년(747) 4월 정묘조에 대왜숙녜수수(大倭宿禰水守)가 종5위하(극위)로 승진하였다. 대양덕숙녜소동인은 천평 9년 11월임진에 숙녜 성을 받은 때에는 수수와 함께 대왜숙녜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속일본기』 천평 9년 12월 임술조에는 외종5위하 대왜숙녜청국(大倭宿禰淸國)을 현번두(玄蕃頭)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동년 12월 병인조에 대왜국을 고쳐 대양덕국(大養德國)으로 했듯이, 천평 9년(737) 12월 27일에 대왜국을 대양덕국으로 고침에 따라 성을 대양덕숙녜로 표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평 19년(747) 4월 정묘조에 대왜신주(大倭神主) 정6위상 대왜숙녜수수라고 적혀 있다. 또 대왜국이 대화국으로 국명이 통일되었다. 통일 시기는 천평보자 2년(758) 정월경부터로 보는데, 이는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758) 2월 24일자 「화공사이(畫工司移)」 와 『속일본기』 천평보자 2년 2월 기사조부터 그때까지 대왜국이라 표기하던 것이 대화국으로 바뀐 것에 의해 추정된다. 천평보자 2년(758) 5월 을미조의 정6위상의 대화숙녜제수(大和宿禰弟守)가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이들 중, 또 대화숙녜씨 일족 인명 중 위와 같이 대화숙녜제수에서 대화숙녜 표기가 나타난 점에서 방증된다.
또 천평보자 원년(757) 12월 임자조 등의 정5위상 대화숙녜장강(大和宿禰長岡)이 천평보자 3년(759) 5월 임자에는 좌경대부에 보임되고, 신호경운(神護景雲) 2년(768) 정월 병오삭조에는 종4위하로 승진하였고, 연력(延曆) 10년(791) 3월 병인조에는 대화국조 정4위하(극위) 대화숙녜장강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신호경운 3년 10월 계해조의 대화숙녜장강의 졸전에서는 성을 대화숙녜, 명을 장강이라 칭하고 있다. 천평보자 2년(758)8월 경자삭조에는 대화숙녜비대마려(大和宿禰斐大麻呂)가 외종5위하(극위)에 서위되었고, 신호경운 3년(769) 11월 신사조에는 정6위상 대화숙녜서마려(大和宿禰西麻呂)가 외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천평 20년(748) 정월 갑술조의 대왜련심전(大倭連深田)과 어명(魚名)이 숙녜 성을 받았고, 천평승보(天平勝寶) 3년(751) 10월 정사조의 대왜국(大倭國) 성하군인(城下郡人) 대왜련전장(大倭連田長)과 고인(古人) 등 8인에게 숙녜 성을 주었다. 그 일족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천평 14년 11월 17일자 「지식우바새등공진해(智識優婆塞等貢進解)」(『대일본고문서』 2-318)에 기재된 대양덕련우족(大養德連友足)이 있다. 그는 대화국 성하군(城下郡)의 대령이었다. 또 대화국 성하군 사람으로는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정관(貞觀) 5년(863) 8월 17일 정축조에 “대화국 성하군인 정6위상 대화숙녜영윤(大和宿禰永胤), 외종5위하 대화숙녜계자(大和宿禰繼子) 등이 본거를 옮겨 모두 우경에 부관하였다”라고 적혀 있으므로 영윤과 계자가 원래 대화국 성하군 출신임을 알 수 있다.
2. 신지진언명(神知津彦命)
신지진언명은 『고사기』 에는 추근진일자(椎根津日子; 시히네츠히코), 『일본서기』 에는 추근진언(椎根津彦; 시히네츠히코)이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 신무천황단(神武天皇段)에는 “신왜이파례비고명(神倭伊波礼毘古命; 가무야마토이하레비코노미코토)이 ‘너는 누구인가? 또 너는 해로를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저는 국신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나를 따라 모시겠는가?’라고 물었더니 ‘모시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삿대를 건네주어 그 배를 끌어당겨 바로 추근진일자(椎根津日子; 시히네츠히코)라고 이름 지었다. 이는 왜국조(倭國造; 야마토노쿠니노이먀츠코)의 조상이다”라고 주가 달려 있다.
또 『일본서기』 신무천황 즉위전기 갑인년 10월 신유조에서는 “천황이 친히 여러 황자와 수군을 거느리고 동쪽을 정벌하러 나섰다. 속흡지문(速吸之門)에 이르렀을 때 한 어부가 작은 배를 타고 다가왔다. 천황이 불러서 ‘너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신은 ‘국신으로 이름을 진언(珍彦; 우즈히코)이라고 합니다. 곡포에서 낚시할 때 천신의 아드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마중하러 나와 기다렸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바로 어부에게 장대를 내밀어 끝을 잡도록 하여 천황의 배에 끌어올려서 물길 안내인으로 삼았다. 그에게 특별히 추근진언(椎根津彦; 시히네츠히코)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가 곧 왜직부(倭直部; 야마토노아타히라)의 시조이다”라고 적혀 있다.
3. 신일본반여언천황(神日本磐余彦天皇)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신일본반여언천황(神日本磐余彦天皇)’ 다음에 ‘시신무(諡神武)’라는 3글자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이하에 기술된 내용은 『일본서기』 와 『고사기』 등에 유사한 전승이 보인다. 특히 『일본서기』 에 적힌 전승과 줄거리와 용어 면에서도 유사하다.
4. 종일향지향대왜주도속흡문시(從日向地向大倭洲到速吸門時)
일향(日向)은 율령제 일향국(日向國; 휴가노구니, 히무카노구니)으로 지금의 궁기현(宮崎縣; 미야자키현)에 해당된다. 『고사기』 신무천황단에는 “신왜이파례비고명(神倭伊波禮毘古命; 가무야마토이하레비코노미코토)이 일향(日向)에서 출발하여 축자(筑紫)로 가셨다. 그리고 풍국(豐國; 도요쿠니)의 우사(宇沙; 우사)에 도착하여, …축자의 강전궁(岡田宮)에서 1년을 지냈다. 또 상행하여 아기국(阿岐國; 아키노쿠니)의 다기리궁(多祁理宮)에서 7년을 지냈다. …또 상행하여 길비(吉備; 기비)의 고도궁(高島宮)에서 8년간 계셨다. 그리고 그 나라에 올라가셨을 때 거북의 등을 타고 낚시를 하면서 소매를 흔들며 오는 사람을 조류가 빠른 해협(速吸門)에서 만났다”라고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일향에서 속흡문까지 축자의 풍국 우사, 축자의 강전궁, 아파국의 다기리궁, 길비의 고도궁을 거쳐온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무천황 즉위전기 갑인년 10월 신유조에서는 속흡문(速吸之門; 하야스히나토)에서 축자국 토협(菟狹; 우사)으로 간 것으로 나오고, 같은 해 11월 갑오조 이후 기사에는 축자국의 강수문(崗水門; 오카노미나토), 안예국(安藝國; 아키노구니)의 애궁(埃宮; 에노미야), 길비국의 고도궁(高島宮; 다카시마노미야)의 순서를 거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본조에 기술된 일향에서 출발하여 속흡문에 이르는 경로는 『고사기』 의 일향에서부터 출발하여 속흡문에 이르는 경로에 의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5. 대왜국조(大倭國造)
대왜국조는 대왜(大倭; 야마토, 大和로도 표기)국 중앙부에 해당되는 영역을 지배한 국조(國造; 구니노미야츠코)를 가리킨다. 진언(珍彦; 우즈히코)은 『고사기』 에는 왜직부(倭直部; 야마토노아타히라)의 시조 고근진언(槁根津彦)으로 나오고, 『일본서기』 에는 왜국조 추근진언(椎根津彦)으로 나온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국조본기에서는 대왜국조 추근진언명(椎根津彦命; 시히네츠히코노미코토)은 대화직(大和直; 야먀토노아타이)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율령 시대에 대왜(大倭, 大和)국조에 임명된 인물로는 ‘대화숙녜’ 항목에서 든 대왜기촌오백족(大倭忌寸五百足), 대화숙녜장강(大和宿禰長岡) 부자가 보인다. 장강은 『속일본기』 신호경운 3년(769) 10월 계해조에 “대화국조 정4위하 대화숙녜장강이 죽었다(卒). 형보소보 종5위상 오백족의 아들이다.”라고 적혀 있고, 연력 10년(791) 3월 병인조에는 “고인이 된 대신 종2위 길비조신진비(吉備朝臣眞備)와 대화국조 정4위하 대화숙녜장강 등이 율령 24조를 찬정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왜국조로 봉사하게 된 것은 기기에는 신무천황의 동정에 협조한 공로에 의거한 것이라 기재되어 있다. 왜씨는 국명의 변천과 함께 씨족명도 대왜(大倭), 대양덕(大養德), 대화(大和) 등으로 변화하였다. 성은 직(直)에서 천무천황 10년(681) 왜직룡마려(倭直龍麻呂)가 연 성을 받고, 천무천황 12년에 일족에게 연 성이 주어졌다. 또 천무천황 14년에는 기촌 성이 주어졌다. 나량 시대에는 대화장강(大和長岡)과 수수(水守)가 숙녜 성을 받았다. 화씨(和氏)는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므로 다른 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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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숙녜(大和宿禰; 야마토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10_0050_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