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노 다다시의 1917년 조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1917년 여름에 압록강 유역을 다시 조사한다. 1913년도에 과제로 남겼던 환도성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집안의 고분에 대한 재조사를 포기하고 압록강을 따라 양쪽의 대안을 오가면서 위원군 밀산면, 위원군 위원하류역 고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고분, 집안 하류방면에 있는 유수림자 부근의 대고력자 고분, 이실총, 무개총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의 조사와 관련하여 1918년도에 간단한 행정보고가 이루어졌고주 0011920년에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大正6年度古蹟調査報告)』로 공간되었으나 그 내용은 1918년에 이루어진 행정보고를 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조사 기록은 1929년이 되어서야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유적(遺蹟)』으로 공간되었으나 아쉽게도 조사 내용에 대한 원고없이 도면과 도판만으로 이루어진 보고였다. 만년에 세키노는 이들 유구(遺構)의 원고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세키노는 1917년 6월 11일에 기차로 경성을 출발하여 12일에 평안북도 운산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야쓰이와 합류하여 동신면 용호동 고분군을 발굴조사하고 위원면 만호동 고분군 등을 조사한 다음 압록강을 건너 고력묘자, 고려묘자, 유수림자 고분군 등을 조사하였다. 그가 조사를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것은 7월 15일이다.
1920년의 보고에서는 동신면 용호동의 발굴내용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다. 조사 일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이와 관련된 정보는 ‘세키노 컬렉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키노 컬렉션에는 당시의 조사일지주 002가 남아있는데, 용호동 고분을 조사한 것은 정확히 1917년 6월 18일이다.
이때의 조사와 관련하여 1918년도에 간단한 행정보고가 이루어졌고주 0011920년에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大正6年度古蹟調査報告)』로 공간되었으나 그 내용은 1918년에 이루어진 행정보고를 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조사 기록은 1929년이 되어서야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유적(遺蹟)』으로 공간되었으나 아쉽게도 조사 내용에 대한 원고없이 도면과 도판만으로 이루어진 보고였다. 만년에 세키노는 이들 유구(遺構)의 원고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세키노는 1917년 6월 11일에 기차로 경성을 출발하여 12일에 평안북도 운산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야쓰이와 합류하여 동신면 용호동 고분군을 발굴조사하고 위원면 만호동 고분군 등을 조사한 다음 압록강을 건너 고력묘자, 고려묘자, 유수림자 고분군 등을 조사하였다. 그가 조사를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것은 7월 15일이다.
1920년의 보고에서는 동신면 용호동의 발굴내용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다. 조사 일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이와 관련된 정보는 ‘세키노 컬렉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키노 컬렉션에는 당시의 조사일지주 002가 남아있는데, 용호동 고분을 조사한 것은 정확히 1917년 6월 1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