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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덕풍골유적

  • 저필자
    황재훈(서울대학교)
  • 날짜
    2005
  • 시대
    청동기~통일신라
  • 위치
  • 원소장처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산64~72, 초일동 산8~10번지 등
  • 시대
    상고사
  • 유형
    기타
입지
2005년 3월부터 5월까지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시굴 조사되어 청동기시대 제의 유적과 집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대까지 조성된 고분 등이 찾아졌다.
유적개관
유적이 위치한 덕풍골은 원래 이성산과 한 줄기로 남-북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는 해발 200m 정도의 산이며, 남쪽으로는 금암산·청량산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도로가 건설되면서 현재와 같이 산줄기가 끊어져 있는 상태이다. 청동기시대 집터는 모두 4채가 찾아져 그 중에서 2채가 조사되었다. 고분은 지표 조사를 통해 50여 기가 확인되었고, 그 중에서 석실분 1기와 석곽묘 7기를 발굴하였다. 석실분은 평면 네모꼴이고, 긴 방향이 북동-남서쪽이다. 내부에는 북벽에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고, 남벽쪽에 입구가 있다.
출토유물
* 민무늬토기, 석기조각, 집터, 고분 등
참고문헌
「하남 덕풍골유적」, 세종대학교 박물관, 2005
해설
하남시의 동북쪽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이 위치한다. 북서쪽은 서울시, 남서쪽은 성남시와 연접해있으며 남동쪽은 광주군, 북쪽은 구리시,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남쪽에 위치한 청량산의 줄기가 V자형으로 감싸고 넓은 하곡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작은 하천이 한강 본류와 합류하는 주변에는 범람원 형태의 충적대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광주산맥의 영향권에 있는 검단산, 남한산, 금안산이 동남부를 에워싸고 북서쪽의 평야부를 이루고 있다.
덕풍동은 이성산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의 동편에 해당한다. 주변으로는 구릉지대와 경작지가 넓게 분포한다. 덕풍동의 북쪽에 위치한 한강 주변의 구릉지대와 충적대지에는 사적 269호인 미사리유적을 비롯하여 망월동유적, 덕풍동 수리골유적, 덕풍동 산 24-4번지 유적과 광암동 고인돌, 교산동 고인돌, 감이동 고인돌 등의 청동기시대 취락과 무덤이 다수 확인되었다. 또한 춘궁동유적, 교산동유적, 이성산성, 천왕사지, 금암산 고분군, 객산 고분군 등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많은 유적이 분포한다. 유적이 위치한 덕풍골 산능선은 원래 이성산의 한 줄기로 평면형태가 남동쪽이 트인 U자형인데, 남쪽 산자락에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산줄기가 단절된 상태이다.
공영사 입구-한솔 아파트 간 도시계획 도로개설공사 구간에 해당하여 2002년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에 2005년 동 기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제의 유적, 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 1기와 돌덧널무덤 7기가 확인되었다.
제의 유적은 산 정상부를 이루는 바위로 정상부에 솟은 암반과 커다란 바위 3개, 주변 작은 바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바위는 동서 16m, 남북 18m, 높이 6m 규모이다. 암반의 남쪽 면에 인공적으로 손질한 3단의 계단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파쇄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시대 석기와 토기류가 흩어져 있다.
정상부 바로 아래의 능선 상에는 집자리가 분포한다. 1호는 능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조성되었다. 풍화암반층을 굴착하여 만들었는데 바닥은 별다른 시설 없이 생토면을 그대로 생활면으로 이용하였다. 평면 장방형으로 크기는 650×250×80cm, 면적은 16.25㎡이다.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과 벽도랑이 확인되었다. 기둥구멍은 장벽을 따라 총 3열로 조성되었는데 크기는 직경 16~20cm 정도이다. 벽도랑은 단면 U자형으로 전체 길이 700㎝, 너비 10~20㎝, 깊이 10㎝ 정도이다. 벽도랑 내부에는 벽체를 세우기 위한 기둥구멍이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양 장벽 중앙에는 직경 35~45cm 크기의 저장공 4개가 설치되었다. 내부 바닥면에는 소토와 지붕의 서까래로 추정되는 탄화 목재가 다량 확인되어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는 사질의 진흙을 1~2㎝ 정도 얇게 깔아 생활면을 조성하였다. 2호는 평면 세장방형으로 크기는 1,020×300×60cm, 면적은 30.6㎡이다. 집터 안쪽에는 불탄 자리 2곳이 확인되는데 화덕자리로 추정된다. 기둥구멍은 장벽을 따라 2열로 조성되었는데 크기는 직경 20~26cm 정도이다. 바닥면은 고운 찰흙을 5㎝ 정도 깐 후 단단하게 다짐하여 생활면을 조성하였다. 마을의 조성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2550±50 BP~2870±50 BP와 집자리, 토기 양상으로 보아 기원전 10~6세기 무렵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의 토기류와 간돌검, 간돌화살촉, 숫돌, 그물추, 반달돌칼, 갈판, 가락바퀴 등의 석기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덕풍골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자연 바위를 이용한 제의 관련 유적이 발견된 매우 드문 사례로 이와 유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오산 가장동유적이 있다. 또한 부천 고강동유적과 안성 반제리유적, 구리 교문동유적에서 조사된 환호의 경우 제의와 관련된 시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제의 유적의 등장은 본격적인 농경의 확산으로 인해 계층화되고 복잡화되어 가는 청동기시대 사회의 변화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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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풍골유적 자료번호 : isea.d_0001_0030_0020_00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