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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고담화회 제6회례회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좌담회」의 해제

다음으로 경성고고담화회 좌담회의 기록(圖 12)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것은 필자 등이 이미 재조판해 소개한 적이 있다(有光敎一·藤井和夫·朱洪奎 編, 2008).
이 좌담회의 기록은 표지를 포함해 총 63장으로 되어 있는데 반 이상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으나 뒷부분의 1/3 정도는 그렇지 않다. 기록자에 대해서는 아리미쓰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으나 당시 조선총독부 재무국 주계과에 재직하고 있던 마쓰오 고헤이[松尾孝平](부산고고회 회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기록의 윗부분 여기저기에는 나중에 아리미쓰가 적어 넣은 메모가 보인다.
이 기록으로 인해 상세한 활동이 알려지지 않았던 경성고고담화회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그 활동 내용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성고고담화회에 관한 희소한 기록으로도 귀중하다.
아리미쓰에게는 이 기록 이외 동(同) 담화회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榧本龜生, 1942, 11·12쪽)에 의하면 당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 고적계나 총독부박물관의 직원들이 매일같이 ‘산에 가자’라고 하면, 퇴근 후 당시 경성부 본정(本町)에 있던 찻집 ‘금강산(金剛山)’주 001
각주 001)
‘金剛山’은 당시 京城府 本町 二丁目 충무로의 북쪽에 있었는데 프랑스 천주교회(현 명동성당)의 뒤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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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커피를 마시며 조사 결과나 연구 경과 등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산행’을 좀 더 넓혀 보면 어떨까라는 취지에서 ‘경성고고(京城考古)담화회’가 생겼다고 한다. 참가자는 고적계(古蹟係)나 총독부박물관의 직원, 이왕가(李王家)미술관 직원 등이었다.
아리미쓰는 이 책에 게재한 제6회례회 담화회에 참가해 사회를 맡았으나 ‘담화회 그룹’의 맴버들과 연구 활동에 있어서는 소원했고 또한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아 경성고고담화회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圖 12_경성고고담화회 제6회례회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에 관한 좌담회 원고
또한 담화회에서는 『경성고고담화회통신(京城考古談話會通信)』을 발행하고 있다.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의 「유적 구조물에 나타난 조선 상대의 방위에 관해서」가 1942년 4월 발행의 제13신(信)에 게재되어 있으므로(米田美代治, 1944), 예회(例會)와 함께 『경성고고담화회통신』도 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이 제6회 담화회의 기록도 거기에 게재하기 위해 작성된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경성고고담화회통신』은 간이 등사판의 인쇄 팸플릿 정도의 것이지 않았을까 추측되므로 이 기록물의 게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아리미쓰 교이치의 수중에 관련 자료가 없고 또한 그 소장기관 등도 확인되지 않으므로 게재되었는지 게재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부록에서는 이 기록을 소개하면서 삽도, 주, 참고문헌을 부가했다. 담화회 개최 당시에 사용된 도면, 사진을 그때와 똑같이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록에서 삽입된 사진, 도면은 아리미쓰 교이치가 남긴 자료와 도면을 필두로 북한과 일본에서 소개되고 있는 각종 사진과 도면들을 필자가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 각주 001)
    ‘金剛山’은 당시 京城府 本町 二丁目 충무로의 북쪽에 있었는데 프랑스 천주교회(현 명동성당)의 뒤쪽에 있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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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고담화회 제6회례회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좌담회」의 해제 자료번호 : ku.d_0003_007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