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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태왕릉

好太王陵/JYM0541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날짜
    1990·2003
  • 시대
    고구려
  • 위치
  • 관련자료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太王鎭)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우산남쪽 기슭의 언덕에 위치해 있다.
유적개관
1990년 고분 위의 도굴갱과 묘실을 정리하고, 묘실과 석곽의 복원 작업을 실시하였다. 2003년 태왕릉에 대한 재조사 당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태왕릉은 대형의 계단식적석총으로, 고분의 잔고는 14m이다. 태왕릉은 황토층 위에 축조되어 있는데, 토층에 한겹으로 돌을 깔아 기초로 삼았다. 태왕릉 주위를 감싸는 호석은 대부분 무너져 고분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었다. 동변의 길이는 62.5m, 북변은 68m, 서변은 66m, 남변은 68m이다. 첫째 단의 경우 대형 석재를 가공하여, 윗부분에는 요(凹)홈이 파여져 있다. 호석은 현재 15개가 남아있으며, 기초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산수(散水), 배수관 등이 있으며, 그 밖으로는 능원과 능장유적, 제대, 건축유적 등이 존재한다. 묘실은 집모양 구조의 석곽으로 추정된다. 광개토왕릉비는 능원 밖 고분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365m 지점에 위치한다.
유물개관
* 동기(신묘년호태왕 명문 동령 등), 철기(갑옷편, 무기류, 공구류), 구슬 장식, 금기(보요 등), 도금기(보요, 관식 등), 토기, 와당(연화문), 명문전(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암키와, 문자부호와, 수키와 등
참고문헌
「集安高句麗王陵」, 2004
해설
우산하고분군의 동남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초대형 계단적석총이다. 일찍이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銘文)이 찍힌 벽돌이 출토되어 ‘태왕릉’이라 불렸는데, 1966년 JYM05415호로 편호되었다. 고분은 집안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우산 남록의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남쪽 100m 거리에 집안과 북한의 만포를 잇는 철로가 지나가며, 동측과 서측은 약간 들어간 골짜기이고 북쪽으로 우산의 산록이 이어진다. 동북쪽 360m 거리에 광개토왕비가 있으며, 고분 500m 범위 내에는 우산하 540호분과 더불어 후대의 소형 봉토분이 몇 기 있다. 대형 적석총으로는 동쪽 700m 거리에 임강총, 북쪽 900m 거리에 우산하 992호분, 동북쪽 2km 이상 떨어진 거리에 장군총이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바라보인다. 고분은 경사가 완만한 언덕 정상의 평탄면에 계단상으로 조성했다. 현재 각 변의 길이는 동면 62.5m, 북변 68m, 서변 66m, 남변 63m 등인데 본래 한 변 62m의 정방형이었다. 각 모서리의 방향은 4방의 방위각과 거의 일치하며, 정상부에 위치한 현실은 서남향이다. 동·북·서변은 원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붕괴되어 바깥쪽으로 많이 밀려나 있는데, 남변은 서남모서리가 조금 밀려난 것을 제외하면 원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고분은 지면을 파서 대석괴를 1단 놓아 기초부를 조성한 다음, 외곽에 잘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계단을 쌓고 그 내부를 강돌과 산돌로 채우는 방식으로 층층이 축조했다. 제1층 계단은 높이 4m 전후로 총 8단으로 쌓았는데, 가장 하단의 높이는 1m이고 위로 올라 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으며 높이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1층 계단석은 아주 정밀하게 가공했는데, 윗면은 조금 좁고 아랫면은 넓어 사다리꼴을 이룬다. 계단석 윗면에는 대형 홈을 파서 가장자리에 턱이 형성되었는데, 위쪽 계단석이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계단석의 길이는 1.4~3.2m로 일정치 않은데, 서남모서리 돌은 길이 2.9m, 너비 1.4m, 두께 1.7m, 동남모서리 돌은 길이 2.8m, 너비 2.6m, 두께 1.8m에 이른다. 동남모서리 제1층 2단의 모서리 돌 정면에는 지름 7cm, 깊이 5cm의 원형 구멍이 있는데,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남변 제1층 제3~4호 호석 사이의 계단석에는 ‘工’자가 새겨져 있는데, 실측 결과 남변의 중앙으로 고분 조영의 기준점과 연관된 것으로 파악된다. 제2층 계단은 제1층 계단 내부를 강돌과 산돌로 채운 다음 안으로 1.8m 들여서 쌓았는데, 남변에서 높이 1.5m, 6단으로 축조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안으로 1.5~1.8m씩 들이면서 층층이 계단상으로 고분을 축조했는데, 현재 8층까지 확인되지만 총 11층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 계단 윗부분은 작은 강돌이나 산돌로 덮었는데, 다만 제1층 계단 위에는 봉석을 하지 않고 제2층 계단에 기대어 청록색의 응회암 판석을 여러 층 세웠다. 이처럼 판석을 세운 양상은 서변의 경우 제1층 뿐 아니라 제2~4층 계단 위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는 서변의 정상부에 현실 입구가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남북 2변에는 6개, 동서 2변에는 5개의 보호석을 계단석에 기대어 세워 고분의 붕괴를 방지했는데, 현재 남측 5개, 동측 4개, 북측 2개, 서측 4개 등 총 15개만 남아 있다. 보호석의 크기는 대체로 높이 5m, 너비 3m, 두께 1.5m 전후로 가장 큰 것은 높이 6m, 너비 5m, 두께 2m, 무게 60톤 이상인 경우도 있다. 고분의 현재 높이는 14m이고, 정상부는 한 변 24m인 평평한 면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에 매장주체부인 횡혈식석실이 있다. 현실은 윗 너비 12m, 아래너비 15m, 높이 4m이다. 현실의 벽체는 안팎 두 겹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 벽체는 두께 0.1~0.25m의 납작한 석회암으로 축조했으며, 안쪽 벽체와의 사이에는 강자갈을 채워 넣었다. 안쪽 벽체는 매끈하게 간 대석재로 축조했는데,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석재끼리 정교하게 맞물리도록 했다. 남측의 바깥 벽체는 도굴로 파괴되었는데, 도굴부의 양상으로 보아 현실에 별도의 기초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 평면은 장방형으로 길이 324cm, 너비 296cm, 높이 300cm이다. 현실 천장은 거대한 화강암 판석으로 덮었는데, 남북 길이 600cm, 동서 너비 470cm, 두께 60~90cm에 달하며, 그 위쪽은 황토층이다. 현실 안에는 매끈하고 동글동글한 강자갈을 채웠다. 현실 서벽 중앙에 서남향의 연도가 있는데, 길이 540cm, 너비 184cm로서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잘 다듬은 석회암 장대석으로 벽면을 쌓았으며 4매의 대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현실 내부에 안치한 석곽은 맞배지붕가옥 모양으로 용마루, 지붕면, 네 벽, 문, 바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곽은 현실에 꽉 차게 안치했다. 석곽 바닥에는 남북으로 나란히 2개의 관대를 놓았는데, 북쪽 관대는 크고 남쪽 관대는 작아서 남녀 묘주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분 주변의 바닥에는 길이 50~60cm, 너비 25~30cm, 두께 10~20cm인 판석을 깔았는데, 남변은 고분에서 18m, 서남 모서리는 28m 떨어진 곳까지 확인되었다. 빗물에 의한 바닥면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한 배수시설로, 물받이 석판의 종점으로 보이는 남측 22m 거리에서 남변과 평행한 배수구를 발견했다. 1989~1990년 고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북모서리에서 담장 밖으로 향하는 배수관을 발견했는데, 당시의 잔존 길이 6m로서 수키와를 결합하여 관을 만들었고 그 위에 물받이 석판을 덮었다. 2000년대에도 여러 곳에서 배수관 시설을 확인하였으며, 특히 동북모서리에 발견된 배수관의 길이는 20m에 이르렀다. 고분 네 변의 바닥 위쪽에는 강돌 포장층이 확인되었다. 남변은 남쪽 담장에 이르는 전역에 강돌을 깔았고, 남문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연장되어 있다. 서측의 강돌 포장층은 남북 길이 120m, 동서 너비 30~35m에 이르는데, 서북모서리의 가장 먼 곳은 고분에서 50m에 이른다. 동측에서는 고분과 제대라 불리는 석대 사이의 동서너비 50m, 남북 길이 90m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강자갈 포장층은 능원의 범위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능원의 범위와 관련하여 남측과 동측에서 담장도 확인되었다. 남측 담장은 남쪽으로 100m거리에서 확인되었는데, 산돌과 황토로 축조했으며 중앙 축선에는 기와로 지은 남문터가 있다. 1940년대만 하더라도 북측과 서측의 담장까지 남아 있었고 전체 평면은 사다리꼴이었다고 한다. 능원은 담장시설로 미루어 한 변의 길이가 260m를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조사과정에서 고분 남측 3m 거리에서 청회색 응회암제 판석으로 조영한 석관묘(石棺墓) 형태의 배장묘를 발굴했다고 하는데, 정문 방향인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배장묘와는 성격이 다른 무덤시설로 추정된다. 정확한 양상을 알기는 힘들지만, 태왕릉 현실과 동일한 석재로 조성했고 내부에서 백회, 기와편, 벽돌편, 금제 장식 등과 더불어 여러 종류의 짐승뼈와 인골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순장시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40년대 조사에 따르면 고분북측에 동서 길이 98m, 남북 너비 15~18m인 돌무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고분 동측 50~68m 거리에는 1.5m간격으로 석대 2개를 나란히 배치했는데, 대석괴로 둘레를 쌓고 내부를 강돌이나 산돌로 채웠다. 동측 석대는 남북 길이 72~74m, 동서 너비 7.5~8.8m, 서측 석대는 남북 길이 약 70m, 동서너비 7.6~8.5m이다. 이 석대를 주로 제대로 본다. 고분의 동북편 120m 지점에서 한 변 9m인 방형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기단부만 남아 있고 초석은 없다. 동쪽 담장과 불과 9m 떨어져 있어 능역을 보호하기 위한 초소 시설로 추정된다. 또한 1940년대에 남쪽 180m거리에서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제사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한편, 광개토왕비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동쪽 담장 일대를 시굴했지만 비에서 고분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일찍이 명문 벽돌과 더불어 연화문와당, 기와편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화판을 ‘Y’자형으로 부조한 연화문와당은 가장 이른 시기의 연화문와당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1990년대 이후 순금과 금동기, 청동기, 철기, 벽돌, 기와 등 1,000여점의 유물을 수집했다. 말편자 3점, 말띠구미개 3점, 행엽 1점, 등자 1점 등의 금동마구도 출토되었는데 특히 등자는 자루가 긴 양식으로 고분의 연대와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청동기로는 부뚜막 1점, 사다리꼴 방울 3점, 금(金)의 동전 2점 등이 출토되었는데, 청동방울에 ‘신묘년(辛卯年)/호태왕(好大王)/△조령(△造鈴)/구십육(九十六)’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명문 벽돌 및 각종 문양 벽돌, 6등분 또는 8등분 연화문와당 80여점, 다양한 문양의 암키와와 수키와편 등의 건축자재가 출토되었는데, 암키와에는 ‘五’, ‘四’, ‘三’, ‘十’, ‘卅’, ‘西人’, ‘田’ 등의 문자나 부호가 새겨진 것도 있었다. 회색 항아리편 2점, 귀잔 1점, 유약 바른 토기 2점, 완 1점, 도자기 완 1점, 어망추 1점 등의 토기와 자기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부장품은 태왕릉의 조영연대나 피장자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태왕릉은 규모가 거대할 뿐 아니라 ‘태왕릉’이라는 명문 벽돌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고구려 왕릉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광개토왕비와의 거리를 중시한 학자들은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한 반면, 비와 태왕릉, 장군총의 방향을 중시한 학자들은 광개토왕비를 장군총과 관련지으며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설정했다. 또한 적석총의 축조기술 상으로는 천추총→태왕릉→장군총의 순서로 조영되었음이 거의 명확하지만, 연화문와당의 출토양상을 근거로 태왕릉→천추총→장군총이라는 순서를 상정하고 태왕릉을 4세기 중반이나 소수림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고구려에서 수릉제가 시행되었다는 전제하에 장군총을 국내성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인 장수왕릉으로 설정하고 광개토왕비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였다. 수릉이란 무덤을 대규모로 조영하고 많은 부장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에 따라 권력자가 생전에 스스로 만든 무덤을 가리키는데, 더욱이 최근 출토된 ‘호태왕(好太王)’명 청동방울의 호태왕을 광개토왕으로 단정한 다음 광개토왕이 즉위하던 391년에 자신의 왕릉에 부장하기 위해 제작한 비기(秘器)로 파악하기도 한다. 태왕릉은 수릉제에 입각하여 광개토왕 재위시에 조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에서 수릉제가 시행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또한 태왕릉과 광개토왕비 사이에는 동측 담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출입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 조사에서 남측 담장에서 정문으로 추정되는 문지가 확인되었고, 그 남쪽에서 일찍이 제사와 관련된 건물터가 확인된 바 있다. 태왕릉의 입구는 비가 위치한 동쪽이 아니라 남쪽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최근 발견된 청동방울은 광개토왕 즉위하던 391년 신묘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해는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동시에 고국양왕의 몰년이기도 하다. 이 청동방울은 고분 부장품이라는 점에서 광개토왕의 즉위보다 고국양왕의 사망과 관련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고, 태왕릉을 391년에 사망한 고국양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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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왕릉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