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중만(澧中蠻)과 누중만(漊中蠻)이 조세와 부역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후 토벌함
순제(順帝)
주 001영화(永和;136~141) 원년(136) 무릉 태수가 상서를 올려, 만이가 모두 복속되어 한인(漢人)과 동일하니 조세와 부역을 증액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의정자주 002
각주 002)
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상서령(尙書令) 우후(虞詡)
주 003만이 홀로 상주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신하로 부리지 않았으니, 덕이 미치지 못하고 [무력에 의한] 위세를 가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짐승 같은 심성이 탐욕스러워 예(禮)로써 이끌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기미(羈靡)하여주 004어루만져서, 복속하면 받아들이지 이를 막지 않았고, 거역하더라도 포기하지 이를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제(先帝)의 옛법에서 공물과 세금에 많고 적음은 그 연유가 오래 된 것입니다. 지금 함부로 증액하면 반드시 원한을 품어 반역이 있을 것입니다. [세금의 증액으로] 얻어지는 것을 헤아려 보면 [군사토벌의] 비용을 당하지 못하여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해 겨울 과연 예중과 누중만이 공포(貢布)가 옛날의 약속과 다르다고 분란을 일으켜 마침내 향리(鄕吏)주 005를 죽이고, 종족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봄에는 만인(蠻人) 20,000인이 충성(充城)
주 006을 에워싸고 8,000인은 이도(夷道)주 007를 노략질하였다. 무릉 태수 이진(李進)을 보내 토벌하여 수백 명의 머리를 베자,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였다. 이진은 이에 양리(良吏)를 선발하여 마음으로의 화합을 얻어냈다. [이진이] [무릉]군에 재임한지 9년이 되었을 때 양태후(梁太后)
주 008가 조정을 장악하였는데, 질(秩)을 이천석(二千石)으로 올려 주고주 009전(錢) 20만 냥을 하사하였다. 환제(桓帝)
주 010원가(元嘉) 원년(151) 가을 무릉만의 첨산(詹山) 등 4,000여 인이 반역을 일으켜 현령을 붙잡고 깊은 산 속에서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영흥(永興) 원년(153)에 이르러 태수 응봉(應奉)
주 011議者: 漢代에 일정한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과 賞罰 그리고 전쟁과 人事를 논의하는 이른바 集議制度에 참여하는 사람들로서, 고전적인 의미에서 議政官은 “太師 太傅 太保 是爲三公, 蓋參天子, 坐而議政, 無不總統(『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이라고 하여 三公의 고유한 직임이었다. 그러나 漢代에는 황제의 취향과 집권자들의 의지에 따라 列侯 中二千石 二千石 博士 등이 포함되어(『漢書』 卷53, 「景十三王傳」) 鹽鐵會議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발전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宗室 近親에 한정되기도 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傳」). 여기서 그 참여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각주 011)
이 은혜와 신의로 회유하자, 모두 항복하고 해산하였다.應奉: 汝南 南頓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식이 뛰어나서 『漢書後序』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武陵蠻과 관련된 활동은 『後漢書』 卷48, 「應奉傳」에 좀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詹山 등의 반란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하던 중 四府에서 모두 應奉의 재주로 장수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하여 武陵太守로 배수되었는데, 부임하여 위무하여 받아들이자 詹山 등이 모두 항복하고 해산하였다. 이에 학교를 세우고 민간에 있는 인재를 등용하니, 그의 정치가 구태를 벗어났다고 칭찬받았다. 延熹연간에 무릉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車騎將軍 馮琨이 정벌을 떠날 때 應奉이 蠻人들에게 위엄과 은혜가 있다고 하여 다시 從事中郞으로 함께 떠났다. 또, 桓帝시 番禺의 郡人 尹珍이 許愼과 應奉으로부터 經書와 圖緯를 받아 돌아가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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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議者: 漢代에 일정한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과 賞罰 그리고 전쟁과 人事를 논의하는 이른바 集議制度에 참여하는 사람들로서, 고전적인 의미에서 議政官은 “太師 太傅 太保 是爲三公, 蓋參天子, 坐而議政, 無不總統(『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이라고 하여 三公의 고유한 직임이었다. 그러나 漢代에는 황제의 취향과 집권자들의 의지에 따라 列侯 中二千石 二千石 博士 등이 포함되어(『漢書』 卷53, 「景十三王傳」) 鹽鐵會議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발전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宗室 近親에 한정되기도 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傳」). 여기서 그 참여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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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奉: 汝南 南頓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식이 뛰어나서 『漢書後序』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武陵蠻과 관련된 활동은 『後漢書』 卷48, 「應奉傳」에 좀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詹山 등의 반란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하던 중 四府에서 모두 應奉의 재주로 장수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하여 武陵太守로 배수되었는데, 부임하여 위무하여 받아들이자 詹山 등이 모두 항복하고 해산하였다. 이에 학교를 세우고 민간에 있는 인재를 등용하니, 그의 정치가 구태를 벗어났다고 칭찬받았다. 延熹연간에 무릉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車騎將軍 馮琨이 정벌을 떠날 때 應奉이 蠻人들에게 위엄과 은혜가 있다고 하여 다시 從事中郞으로 함께 떠났다. 또, 桓帝시 番禺의 郡人 尹珍이 許愼과 應奉으로부터 經書와 圖緯를 받아 돌아가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색인어
- 이름
- 순제(順帝), 우후(虞詡), 이진(李進), 이진, 이진, 양태후(梁太后), 환제(桓帝), 응봉(應奉)
- 지명
- 한, 충성(充城), [무릉]군, 무릉, 첨산(詹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