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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송(宋) 태종(太宗) 때의 사신과 조공

  • 국가
    삼불제(三佛齊)
[태종] 태평흥국 5년(980), 그 왕인 하지(夏池, Haji)가 사신 차룡미(茶龍眉)를 파견해왔다. 그해 조주(潮州)에서 상언하기를, 삼불제 국의 번상(蕃商)인 이보회(李甫誨)가 선박에 향약·서각(犀角)주 001
각주 001)
犀角: 무소의 뿔로 『漢書』 「南粵王 趙佗傳」에서 언급될 정도로 일찍부터 중요한 조공품목으로서 주로 약재나 고급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諸蕃志』 卷下 「志物」에 의하면, 사냥꾼이 원거리에서 활로 사냥하여 채취한 뿔은 ‘生角’, 스스로 죽은 무소의 뿔은 ‘倒山角’이라고 부르며, 포말과 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흰색이 많고 흑색이 적은 뿔을 上級으로 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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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 등을 싣고 해구(海口)까지 왔는데, 불리한 풍세(風勢)를 만나 60일을 표류하다가 배가 조주에 도착하여, 향약 전부를 광주(廣州)로 보냈다고 하였다. [태평흥국] 8년(983)에는 그 왕인 하지(遐至, Haji)가 사신으로 포압타라(蒲押陀羅)를 파견하여 수정불(水晶佛)·금포(錦布)·서각·향약 등을 내공했다. [태종] 옹희 2년(985)에는 박주(舶主)인 김화차(金花茶)가 방물을 가져와 헌상했다. [태종] 단공 원년(988) 사신으로 포압타려(蒲押陀黎) 주 002
각주 002)
蒲押陀黎: 陳學軍은 포압타려(蒲押陀黎)를 스리비자야에 僑居하던 아라비아인 Abu-Abdullah라고 주장한다. 스리비자야가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광주에 기거하면서 참파를 오가며 무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陳學軍, 1997: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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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파견하여 방물을 조공했다. [태종] 순화 3년(992) 겨울, 광주에서 상언하기를 “포압타려는 지난해에 경사로부터 귀국하다가, 본국이 사파(闍婆)에게 침략 당했다는 말을 듣고주 003
각주 003)
闍婆: 당시 자바 동부로 천도한 마타람왕국을 가리킨다. 마타람왕국은 안정된 발전을 이룩하며 향료제도와 말레이반도, 수마트라를 연결하는 동서교역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992년에는 무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스리비자야를 공격했는데, 1016년 스리비자야의 역공으로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최병욱, 2006: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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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南海)주 004
각주 004)
南海: 여기서 지칭하는 남해는 廣州 南海縣으로 추정된다. 秦始皇 33년(전214)에 처음으로 南海郡을 설치하고 番禺縣을 治所로 삼았다. 隋 開皇 9년(589)에는 郡을 폐지하고 番州를 설치했는데, 大業 3년(607)에 다시 군을 설치하고 치소를 南海縣에 두었다. 唐 武德 4년(621)에는 郡을 폐지하고 廣州로 이름을 바꿨다가, 天寶 원년(742)에 다시 南海郡으로 바꾸고 南海·番禺 二縣을 두었다. 乾元 원년(758)에는 다시 郡을 廣州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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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년을 지냈는데, 금년 봄에 배를 타고 점성으로 가던 중, 다시 불리한 바람을 만나 돌아왔습니다. 본국에 조서를 내려 통보해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여 이에 따랐다.

  • 각주 001)
    犀角: 무소의 뿔로 『漢書』 「南粵王 趙佗傳」에서 언급될 정도로 일찍부터 중요한 조공품목으로서 주로 약재나 고급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諸蕃志』 卷下 「志物」에 의하면, 사냥꾼이 원거리에서 활로 사냥하여 채취한 뿔은 ‘生角’, 스스로 죽은 무소의 뿔은 ‘倒山角’이라고 부르며, 포말과 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흰색이 많고 흑색이 적은 뿔을 上級으로 친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蒲押陀黎: 陳學軍은 포압타려(蒲押陀黎)를 스리비자야에 僑居하던 아라비아인 Abu-Abdullah라고 주장한다. 스리비자야가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광주에 기거하면서 참파를 오가며 무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陳學軍, 1997: 68). 바로가기
  • 각주 003)
    闍婆: 당시 자바 동부로 천도한 마타람왕국을 가리킨다. 마타람왕국은 안정된 발전을 이룩하며 향료제도와 말레이반도, 수마트라를 연결하는 동서교역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992년에는 무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스리비자야를 공격했는데, 1016년 스리비자야의 역공으로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최병욱, 2006: 153). 바로가기
  • 각주 004)
    南海: 여기서 지칭하는 남해는 廣州 南海縣으로 추정된다. 秦始皇 33년(전214)에 처음으로 南海郡을 설치하고 番禺縣을 治所로 삼았다. 隋 開皇 9년(589)에는 郡을 폐지하고 番州를 설치했는데, 大業 3년(607)에 다시 군을 설치하고 치소를 南海縣에 두었다. 唐 武德 4년(621)에는 郡을 폐지하고 廣州로 이름을 바꿨다가, 天寶 원년(742)에 다시 南海郡으로 바꾸고 南海·番禺 二縣을 두었다. 乾元 원년(758)에는 다시 郡을 廣州로 개명하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하지(夏池, Haji), 차룡미(茶龍眉), 이보회(李甫誨), 하지(遐至, Haji), 포압타라(蒲押陀羅), [태종], [태종], 포압타려(蒲押陀黎), [태종], 포압타려
지명
조주(潮州), 삼불제 국, 조주, 광주(廣州), 광주, 사파(闍婆), 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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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태종(太宗) 때의 사신과 조공 자료번호 : jo.k_0020_0489_005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