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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에 대한 기억과 상호인식

3. 전쟁에 대한 기억과 상호인식

7년간의 걸친 중세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쟁은 무엇을 남겼는가?
그에 앞서 전쟁의 승패부터 논의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전쟁의 승패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였는가 여부에 의해 평가된다. 이 점에서 보면 일본은 전쟁의 목적을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만큼 실패한 전쟁이었다. 명에 대한 침략은 물론 조선의 영토를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였고,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목적, 명과의 무역을 재개하려는 목표, 국내 영주들의 불만을 대외적으로 해소해 국내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려던 시도,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많은 조선의 문물을 약탈하였지만 이것이 침략의 주된 목표는 아니었다.
일본군은 전쟁 초기 육전에서 승승장구하였으나 해전에서는 참패하였다. 1차와 2차 모두 초기 2개월간의 승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패배와 교착상태로 보냈을 뿐이다. 전란 중 5만 내지 6만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고, 염전과 패전의식으로 조선에 투항한 군사의 숫자도 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주 409
각주 409)
예컨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1592년 조선 침공에 동원된 일본군은 약 15만 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인 1593년 3월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그 가운데 3분의 1인 5만 명이 전사,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1593년 3월 부산포로 퇴각한 일본군의 장수 前野長康의 기록에도 당초 2천명의 부하가 9백 명밖에 남지 않았고, “부하들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먹을 것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모습이 생지옥과 같았다.”라고 묘사하였다. (前野長康, 『武功夜話』 ; 최영의(1992),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 『한국사론』22, 국사편찬위원회, 11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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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전쟁을 주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완전히 멸문의 화[滅門之禍]를 당하였고, 그를 따라 출병하였던 다이묘들도 패배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결코 승리한 전쟁이 아니며, 무위(武威)를 해외에 과시하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참전한 다이묘들의 자기변명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은 침략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 사대교린질서를 복구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승리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물론 해방 이후인 1980년대까지도 패배한 전쟁이었다는 관념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잘못된 인식이다.
명 또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 일본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전쟁에 관한 명의 역사기록은 대부분 승리한 전투에 관한 것이었으며, 승전관을 반영하고 있다.
전쟁 자체의 결과만을 보면, 조선과 명은 승리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조선은 국토가 전장(戰場)으로 사용되면서 다방면에 걸쳐 심대한 타격을 받아 최대의 피해국이 되었다. 명 또한 참전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지출로 인해 재정의 압박을 불러왔고, 그것이 농민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이완되었다. 결국 이 기간 중에 여진족은 통일국가를 이루었고, 후금에 이어 청으로 성장하였다. 마침내는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조선과 명은 모두 ‘상처뿐인 영광’이었을 따름이다. 7년간에 걸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승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에 참여한 조선·명·일본은 모두 자랑할 만한 성과가 없고, 대신 전쟁의 처절한 상처만 남았다. 이것이 어쩌면 이 전재의 역사적 교훈이라고도 볼 수 있다.주 410
각주 410)
정두희(2007), 「16세기 최대전쟁, 임진왜란」 『임진왜란, 동아시아삼국전쟁』,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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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이 전쟁에 관한 조선의 기억과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주 411
각주 411)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후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 7년간 경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간행된 것은 1647년(인조 25)으로 손자 조수익에 의해서였다. ‘懲毖’란 『詩經』 小毖篇의 “내가 그것을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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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주 412
각주 412)
신경(1613~1653)은 서인계로서 임진전쟁 시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낸 申欽의 손자이고, 병자호란 때 斥和五臣의 한 사람인 申翊聖의 아들이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조정이 청에 굴복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처사로 지낸 재야지식인이었다. 『재조번방지』는 1649년 저술하였는데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진전쟁을 중심으로 하되 1577년부터 1607년까지 40년간의 대외관계를 정리하였다. 질적으로나 양적인 면에서 임진전쟁 연구의 제1급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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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할 수 있다. 『징비록』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전쟁을 이끌어나간 유성룡이 전란이 끝난 후 반성을 통해 후일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따라서 전란에서 주로 실패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전쟁 초기 조선의 대응양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상세히 기술하였다. 이 책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이후 이 전쟁에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패전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이른바 ‘패전사관’이 후대에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징비록』은 1695년에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이후로도 몇 차례에 걸쳐 중간되었다.주 413
각주 413)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행원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1712(숙종 38)년에는 『징비록』을 비롯한 조선서적의 일본 유출을 엄금하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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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이 책은 조선이 초기 패전과 일본의 승리라는 인식을 일본에 퍼지는데 기여하였다. 또 막부말기 해방론자(海防論者)나, 조선침략론자들은 이 책을 일본승전관의 주요논거로 이용하였다.주 414
각주 414)
노영구는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인식의 재검토」 『한국문화』 31, 2003, 195쪽에서 “자기반성적인 성격의 『징비록』에서 주로 체계화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임진왜란 인식은 이후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근대학문 체계에 의해 정교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의 무기력한 초기 대응과 의병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조선의 본래 의도인 자기반성과 정치 사회적인 정당성 확보와는 달리 일제에 의해 조선망국론의 주요한 증거로 새로이 왜곡 해석되기도 하였다.”라고 하면서 징비록적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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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은 『재조번방지』에서 철저한 화이론적 입장에서 일본은 이적시하였고 강한 적개심을 표시하였다. 이에 비해 원병을 파견해준 명에 대한 고마움이 강조되었다.명의 원군 파병을 ‘재조번방지’이라고 인식한 그의 숭명반청적 세계관은 이후 조선의 지성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주 415
각주 415)
하우봉(1989),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3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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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전쟁 이후 조선의 명과 일본에 대한 인식에 관해 살펴보자. 조선은 전쟁 중의 명으로부터 원군을 지원받은 일로 인해 명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관념이 등장하였다. 이것이 인조반정 후에는 존명배금(尊明排金)의 논리적 근거로 작용하였고, 두 차례의 호란을 치르고 난 후에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반청북벌론(反淸北伐論)으로 발전하였다. 이 관념은 조선 내부의 정권교체의 명분으로까지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 작용하였다. 재조지은 관념과 부채의식에 근거한 대명의리론은 명·청 교체기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대외관계를 제약하는 굴레로 작용하였다.
한편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보며, 7년간에 걸친 전국민의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 대일적개심이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만세원(萬歲怨)’ ‘구세복수설(九世復讐說)’이 공론화 하였고, 민중들의 그것은 더욱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다.주 416
각주 416)
하우봉(1989), 「17세기 지식인의 일본관」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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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례로 『임진록(壬辰錄)』을 들 수 있다.주 417
각주 417)
특히 「四溟說話」에는 復讐와 雪憤의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김장동(1983), 「壬辰錄의 說話攷」 『한국학논집』4,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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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일본의 재침가능성을 우려하며 강한 경계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인식을 청산하고 일본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재인식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된 것은 전쟁이 끝난 지 150여 년이 지난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실학자 이익(李瀷)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이 전쟁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으로 일본관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이 전쟁은 항일운동의 역사적 뿌리로 인식되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은 임진전쟁과 동일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한국인이 민족주의적 각성을 촉구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그 바탕에는 임진전쟁이 있었다.주 418
각주 418)
정두희(2007), 「이순신에 대한 역사와 역사화」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재』,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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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임진전쟁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살펴보면 예상외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우선 제대로 된 정사(正史)의 기록이 없다.주 419
각주 419)
이에 관해서는 최관·김시덕(2010),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 도서출판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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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막부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 공식적인 역사를 편찬하지 않았다. 현재에도 임진전쟁에 관한 일본의 사료에는 연대기적 자료가 없으며 고문서자료 등을 연대기로 편찬하는 『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에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자료는 참전한 다이묘들의 번(藩)에 의해 후대에 만들어진 기록들이다. 이들 기록물들은 거의 모두 선조들의 무훈담이나 공적을 찬양하는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이 전쟁의 의미나 히데요시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주 420
각주 420)
宮嶋博史(2009), 「근세 일본의 조선인식-임진왜란의 기억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지식교류와 역사기억』, 동북아역사재단,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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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대다수의 일본인은 이 전쟁에 대해 일본의 ‘무위’를 해외에 떨친 쾌거라고만 막연하게 인식하였다. 그것이 서민들에게 영합하여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에도시대 일본의 자타인식(自他認識)으로 형성되는 ‘일본형 화이관’의 중요한 근거로서 ‘무위’를 내세우는데, 그것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서 확립된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살펴보면, 에도시대 전기 일부 유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이 있었다. 예컨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하야시 라잔[林羅山], 키노시타 쥰앙[木下順庵] 등의 주자학자들은 히데요시의 해외정복의 무모함을 비판하였다.주 421
각주 421)
上坦外憲一(1992), 「日本にとっての文祿·慶長の役」 『季刊 靑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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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은 1695년 일본에서 간행된 『징비록』의 서문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친 것은 5가지의 용병(義兵, 應兵, 貪兵, 驕兵, 忿兵) 가운데 탐병이며, 교병과 분병을 겸한 것으로서 군자가 이용하는 의병이나 응병은 아니다. 이는 하늘의 법도[天道]가 싫어하는 일이며 패배할 수밖에 없다.”라고 비판하였다. 상당히 객관적이며 일본의 패배를 냉정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대마도에서 조선외교를 담당하면서 성신외교론(誠信外交論)을 주창하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인호시말물어(隣好始末物語)』에서 히데요시[秀吉]의 행위는 명분없는 무모한 전쟁[無名의 師]이라고 비판하면서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막부의 공식적인 견해도 아니었다. 도쿠가와막부에서 간행한 것으로 임진전쟁에 연관된 자료로는 막부의 명을 받아 1812년 홋타 마사아쓰[堀田正敦]·하야시 줏사이[林述齋]가 편찬한 『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530권에 달하는 방대한 다이묘들의 계보기록인데, 임진전쟁 시 그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주 422
각주 422)
이에 앞선 자료로는 1643년 林羅山·林鵝峯 父子가 편찬한 186권의 『寬永諸家系圓伝』, 1702년 新井白石이 편찬한 13권의 『藩翰譜』가 있다. 모두 막부의 명을 받아 大名 및 幕臣들의 가문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완성도와 분량면에서 『寬政重修諸家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들 자료에 관해서는 최관·김시덕(2010), 위의 책, 357~3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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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수록된 임진전쟁에 관한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다이묘들의 승리와 공적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주 423
각주 423)
宮嶋博史, 위의 논문, 238~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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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임진전쟁에 관한 막부의 공식정인 입장은 ‘노코멘트’라고 볼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이 이 전쟁에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판을 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초반 막부의 관리이자 대표적인 지식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경우에도 『독사여론(讀史餘論)』에서 히데요시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하였지만, 그것은 국내정치에 관해서일 뿐 임진전쟁에 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임진전쟁의 교훈을 얻기 위해 조선군의 패배와 내부의 혼란상 등에 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대부분 승리한 사실만이 무훈담처럼 기록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전쟁이 어떤 목적으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일부 지식인들의 비판도 에도시대 후기에 이르면 크게 바뀐다. 18세기 후반 국학자(國學者)와 해방론자(海防論者)들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위업(偉業)’으로 칭송하였다.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히데요시는 황국일본의 광명을 조선과 중국에까지 빛내었다”고 평가하였다. 해방론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은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이래의 무덕(武德)”이라고 평가하였다. 대체로 막부말기에는 해외에 무위를 떨친 쾌거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수였다. 임지전쟁에 참전한 죠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의 세력들이 주도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전쟁에 대한 평가는 더욱 고양되었다. 이 시기 조선침략론[征韓論]의 전개와 함께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중국적 세계질서의 일본판’을 지향한 대륙웅비의 선구적 업적으로 칭송되었다.
요컨대 일본에서는 이 전쟁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승리한 무훈담만 역사기록으로 축적되면서 마치 승리한 전쟁처럼 인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해외에 일본의 무위를 떨친 위업으로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에도시대에 이 전쟁에 관한 철저한 비판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이다. 가해자의 기억상실 내지 무관심과 피해자의 절실한 기억 간의 격차는 크다는 일반론적인 현상이 여기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전쟁에 관한 역사기록의 결여와 비판의식의 결핍은 300년 후 같은 세력에 의해 또다시 침략전쟁으로 되풀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전쟁에 관해 비교적 다양한 연구와 시각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 속에서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히데요시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후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까지 정복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조선이 외국이라는 의식이 없었으므로 패전해서 철수한 후에도 패배했다는 의식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무위를 과시했다는 의식만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아직도 남아서 후세인들에게 우월감의 근거로 삼고, 침략이 국익에 도움을 주었다는 논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근거로 삼았다. 영웅사관과 일본팽창주의를 옹호하는 이러한 임진전쟁관은 1945년까지 통설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3) 명
임진전쟁에 관한 중국인의 인식을 나타내는 사료상의 용어를 보면, ‘정동(征東)’ ‘정왜(征倭)’ ‘재조번방(再造藩邦)’ 등이 많다.주 424
각주 424)
최소자(1997), 위의 논문,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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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서는 전통적 화이관에 입각한 이적관과 함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나아가 명까지 침공하려고 한 임진전쟁을 ‘왜구’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에 대해서는 원군을 파견함으로써 번국인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시혜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군파견의 논의과정을 보면, 실은 중국의 보호를 위한 조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의 원군 파병의 동기에 관해서는 조공국보호론,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 등이 있지만, 전자가 명분임에 비해 후자가 실질적인 이유라는 것이 정설이다.주 425
각주 425)
한명기는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역사비평사)에서 파병동기가 외형적으로는 조선을 구원하는 것으로 포장되어있지만 실은 중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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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의 군사활동에 대해서는, 1593년 1월의 평양성전투, 1597년 9월의 직산전투, 1598년 11월의 노량해전을 3대 승첩으로 꼽고 있다. 대신 1593년 1월의 벽제관전투, 1597년 8월의 남원성전투, 1597년 12월의 울산전투 등을 패전으로 인정하였다.주 426
각주 426)
李光濤(1972), 『朝鮮壬辰倭禍硏究』, 臺灣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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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에서의 사료와 연구를 보면 대부분 승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여송(李如松)·유정(劉綎)·양호(楊鎬)·석성(石星)·송응창(宋應昌)·만세덕(萬世德)·형개(刑玠)·진린(陳璘) 등 참전한 장군과 제독의 활동을 중심으로 자료와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주 427
각주 427)
최소자(1997), 위의 논문,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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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2차 평양성전투를 제외하면 명군의 독자적인 승리는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전후 명은 조선에 대해 ‘재조동번(再造東藩)’을 내세우며 강한 시혜의식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 내부에서의 ‘재조지은’ 의식과 함께 강화되었고, 후금과 전쟁을 할 때 원군 파견을 요구하는 근거로 삼았다.
한편 전후 일본에 관한 명의 인식은 어떠했을까?
명은 임진전쟁에서의 불완전한 승리로 인해 일본의 군사적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불쾌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전란 후 일본에 대한 무시정책으로 표현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재개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전후 명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조공 체제에서 이탈하였다. 중원에서 명과 청이 교체된 이후에도 일본은 청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체제를 구축하였다.

  • 각주 409)
    예컨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1592년 조선 침공에 동원된 일본군은 약 15만 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인 1593년 3월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그 가운데 3분의 1인 5만 명이 전사,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1593년 3월 부산포로 퇴각한 일본군의 장수 前野長康의 기록에도 당초 2천명의 부하가 9백 명밖에 남지 않았고, “부하들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먹을 것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모습이 생지옥과 같았다.”라고 묘사하였다. (前野長康, 『武功夜話』 ; 최영의(1992),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 『한국사론』22, 국사편찬위원회, 11쪽에서 재인용). 바로가기
  • 각주 410)
    정두희(2007), 「16세기 최대전쟁, 임진왜란」 『임진왜란, 동아시아삼국전쟁』, 휴머니스트. 바로가기
  • 각주 411)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후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 7년간 경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간행된 것은 1647년(인조 25)으로 손자 조수익에 의해서였다. ‘懲毖’란 『詩經』 小毖篇의 “내가 그것을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412)
    신경(1613~1653)은 서인계로서 임진전쟁 시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낸 申欽의 손자이고, 병자호란 때 斥和五臣의 한 사람인 申翊聖의 아들이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조정이 청에 굴복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처사로 지낸 재야지식인이었다. 『재조번방지』는 1649년 저술하였는데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진전쟁을 중심으로 하되 1577년부터 1607년까지 40년간의 대외관계를 정리하였다. 질적으로나 양적인 면에서 임진전쟁 연구의 제1급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413)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행원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1712(숙종 38)년에는 『징비록』을 비롯한 조선서적의 일본 유출을 엄금하도록 명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414)
    노영구는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인식의 재검토」 『한국문화』 31, 2003, 195쪽에서 “자기반성적인 성격의 『징비록』에서 주로 체계화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임진왜란 인식은 이후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근대학문 체계에 의해 정교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의 무기력한 초기 대응과 의병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조선의 본래 의도인 자기반성과 정치 사회적인 정당성 확보와는 달리 일제에 의해 조선망국론의 주요한 증거로 새로이 왜곡 해석되기도 하였다.”라고 하면서 징비록적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415)
    하우봉(1989),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32~36쪽. 바로가기
  • 각주 416)
    하우봉(1989), 「17세기 지식인의 일본관」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바로가기
  • 각주 417)
    특히 「四溟說話」에는 復讐와 雪憤의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김장동(1983), 「壬辰錄의 說話攷」 『한국학논집』4,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바로가기
  • 각주 418)
    정두희(2007), 「이순신에 대한 역사와 역사화」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재』, 휴머니스트. 바로가기
  • 각주 419)
    이에 관해서는 최관·김시덕(2010),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 도서출판문 참조. 바로가기
  • 각주 420)
    宮嶋博史(2009), 「근세 일본의 조선인식-임진왜란의 기억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지식교류와 역사기억』, 동북아역사재단, 236쪽. 바로가기
  • 각주 421)
    上坦外憲一(1992), 「日本にとっての文祿·慶長の役」 『季刊 靑丘』 11. 바로가기
  • 각주 422)
    이에 앞선 자료로는 1643년 林羅山·林鵝峯 父子가 편찬한 186권의 『寬永諸家系圓伝』, 1702년 新井白石이 편찬한 13권의 『藩翰譜』가 있다. 모두 막부의 명을 받아 大名 및 幕臣들의 가문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완성도와 분량면에서 『寬政重修諸家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들 자료에 관해서는 최관·김시덕(2010), 위의 책, 357~358 참조. 바로가기
  • 각주 423)
    宮嶋博史, 위의 논문, 238~244쪽. 바로가기
  • 각주 424)
    최소자(1997), 위의 논문, 219쪽. 바로가기
  • 각주 425)
    한명기는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역사비평사)에서 파병동기가 외형적으로는 조선을 구원하는 것으로 포장되어있지만 실은 중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426)
    李光濤(1972), 『朝鮮壬辰倭禍硏究』, 臺灣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바로가기
  • 각주 427)
    최소자(1997), 위의 논문, 259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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