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 왕순(王詢)이 방물을 보냄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왕순(王詢)[현종(顯宗)]이 어사민관시랑(御事民官侍郎) 원영(元潁)주 001
각주 001)
등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元潁 :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고려 현종 1年(1010)에 거란(요) 聖宗이 康兆가 穆宗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고 하여 쳐들어오려 하자, 兵部員外郎으로서 중군병마사 朴忠淑 아래 判官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通州에 가서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거란(요)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자 行營都統使 강조를 비롯한 고려 군사는 적과 싸워 기세를 떨쳤으나, 적을 업신여기다가 패배를 당하고 적은 계속 남하하여 개성을 함락시켰다. 1030년에는 御史民官侍郎으로서 사신이 되어 일행 293명과 함께 송나라에 다녀왔다. 덕종 2年(1033)에 西京副留守知分司戶部事가 되었고, 정종 5年(1039)에 공부상서로서 春夏番西北路兵馬使가 되었으며, 1040년에 다시 공부상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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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元潁 :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고려 현종 1年(1010)에 거란(요) 聖宗이 康兆가 穆宗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고 하여 쳐들어오려 하자, 兵部員外郎으로서 중군병마사 朴忠淑 아래 判官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通州에 가서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거란(요)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자 行營都統使 강조를 비롯한 고려 군사는 적과 싸워 기세를 떨쳤으나, 적을 업신여기다가 패배를 당하고 적은 계속 남하하여 개성을 함락시켰다. 1030년에는 御史民官侍郎으로서 사신이 되어 일행 293명과 함께 송나라에 다녀왔다. 덕종 2年(1033)에 西京副留守知分司戶部事가 되었고, 정종 5年(1039)에 공부상서로서 春夏番西北路兵馬使가 되었으며, 1040년에 다시 공부상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