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朱夢)의 탄생과 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주 001
번역주 001)
는 부여에서 나왔는데,주 002 高句麗 : 『魏書』에서는 ‘高句麗’와 ‘高麗’라는 두 가지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高麗’는 2회 확인된다. 즉 『魏書』 帝紀 太祖 天興 元年(398) 正月조에 “辛酉 車駕發自中山 至于望都堯山 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 以充京師”라는 기사에서 처음 ‘고려’가 보이고 있으며, 같은 책 帝紀 世祖 太延 元年(435) 6월조에도 “丙午 高麗鄯善國並遣使朝獻”이라 하여 역시 고려 국호가 보이고 있다. 다만 『魏書』 列傳에서는 ‘高句麗’로 표기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사서의 성서 연대로 따졌을 때, 高麗란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중국 사서는 『宋書』이다. 『송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같은 책 本紀 少帝 景平 元年(423) 3월조에 “三月壬寅 孝懿皇后祔葬于興寧陵 是月 高麗國遣使朝貢”이라는 기사에서 ‘高麗’ 국호가 처음 확인된다. 이후 『남제서』 등 여러 사서에서 고구려는 ‘句麗’, ‘句驪’, ‘高句麗’, ‘高句驪’, ‘高驪’ 등으로 표기되었다.
번역주 002)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가 주몽이라고 한다.주 003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주 004 〈廣開土王碑〉에서는 ‘出自北夫餘’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 所引 『구삼국사』 逸文에서는 주몽이 ‘東扶餘’로부터 출자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는 夫餘와 北夫餘, 東夫餘(東扶餘) 각각의 실체와 상호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지속해 왔다. 대체로 夫餘와 北夫餘 양자에 대해서는 동일시하는 가운데 특히 ‘동부여’에 대해서만큼은 ① 285년 모용 선비의 공격을 받고 沃沮로 피신해갔던 부여인의 잔여세력이 오늘날 연변 지역에 세운 나라로 파악하는 견해(池內宏, 1951), ② 오늘날 지린시 일대의 부여와 동부여를 동일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李健才, 1982), ③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 보이는 설화 속 동부여의 연장선상에서 동부여를 파악하는 견해(이도학, 2005) 등이 거론되어 왔다. 대체로 ① 번 견해가 한·일 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 가운데, 부여의 잔여세력이 피신한 지역을 오늘날 蛟河市 일대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고(이성제, 2008), 최근에는 부여의 四出道 중 東方道에 포진한 부여의 지방세력을 동부여로 보아 이들이 고구려 국가형성기부터 관계를 맺어왔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이승호, 2018).
번역주 004)
의 딸로 부여왕주 005이 방 안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다가] 해가 비추기에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이윽고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니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니 돼지 또한 먹지 않았으며,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그것을 피하였다. 다시 [그 알을] 들에 버리니 새들이 깃털로 감쌌다.주 006 부여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었고,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장성하자 자를 주몽주 007이라 하였다. 그 속언에주 008 ‘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河伯 : ‘河伯’은 중국 신화 속 黃河의 水神으로, 전통시대 ‘河’는 일반 강이 아니라 단지 黃河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임을 감안하면, 엄밀히 말해 黃河의 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先秦 문헌에 이미 등장한다. 예를 들어, 『韓非子』 內儲說上에는 “齊人有謂齊王曰 河伯大神也 王何不試與之遇乎 臣請使王遇之 乃爲壇場大水之上 而與王立之焉 有閒 大魚動 因曰 此河伯”라는 내용이 있다. 『後漢書』 左周黃列傳에서는 구체적으로 “夫河伯以水爲城國 魚鱉爲民庶”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 『說苑』 辨物篇에서 “夫河伯以水爲國 以魚鱉爲民”이라고 하였다. 後漢 시기의 南陽畵像石(中國 河南省)에 ‘河伯出行圖’라고 하여 하백에 관한 도상이 확인된다. 다만 고구려 시조신화에 등장하는 ‘하백’은 강의 신으로서의 속성만을 차용한 고구려 고유의 신격으로 짐작된다. 또 〈廣開土王碑〉, 〈牟頭婁墓誌〉, 〈集安高句麗碑〉와 같은 5세기 초 금석문들에서 시조의 혈통과 관련해 모두 하백을 언급하고 있어, 이 신격이 당시 고구려 신앙체계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牟頭婁墓誌〉에서는 ‘河泊’ 으로 썼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장차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으리라 여겨 그를 없애라고 청하였는데, 왕은 들어주지 않고 그에게 명하여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매일 남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가려내고, 준마는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일 들에 나가 사냥하는데,주 009 주몽이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 하나로 제한하였다. 주몽은 비록 화살이 적었으나 잡은 짐승이 아주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다시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리에 알고 주몽에게 일러주며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너를 해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멀리 외국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곧 오인·오위 등 두 사람과 함께주 010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 큰 강주 011 하나와 맞닥뜨려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아주 급박하게 추격해오니 주몽이 강물에 일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주 012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주하는데 추격하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니 추격하던 기병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드디어 보술수주 013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납의주 014를 입었으며,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고 있었다.주 015 [그들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주 016에 이르러 마침내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로] 인하여 씨로 삼았다.주 017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아내주 018가 임신하였는데, 주몽이 도망한 후에 아들 하나를 낳으니, 자를 처음에는 여해라 하였다.주 019 장성하자 주몽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귀의하니, 이름 짓기를 여달주 020이라 하고 나라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다.주 021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계승하여 임금이 되어 곧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크게 패해, 드디어 [고구려에] 예속되었다.주 022
번역주 022)
막래의 자손이 [왕위를] 서로 전하여 먼 후손 궁(태조왕, 재위: 53~146)주 023에 이르렀다. [궁은]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꺼렸다.주 024 장성하자 흉학하니, 나라가 손상되고 무너졌다.주 025 궁의 증손 위궁(동천왕, 재위: 227~248) 역시 태어나면서 볼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증조 궁을 닮았다하여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주 026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일컬어 ‘위’라고 한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었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 如栗이 부여를 탈출한 閭達의 子라고 했으므로 여율은 마땅히 주몽의 손자이고, 그 아들인 莫來는 증손자이다. 하지만 『三國史記』에서 부여를 정벌한 왕은 주몽의 증손자가 아닌 손자 大武神王이다. 또 『周書』에서도 “其孫莫來漸盛 擊夫餘而臣之”이라고 전한다. 혹자는 ‘莫來’와 ‘慕本’의 字形이 유사하여 傳寫 과정에서 오기했을 수도 있는 만큼, 莫來가 곧 慕本王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본왕 시기 부여를 정복한 사건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전의 ‘여율’과 ‘막래’를 『삼국사기』의 특정 고구려왕에 비정하기가 혼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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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高句麗 : 『魏書』에서는 ‘高句麗’와 ‘高麗’라는 두 가지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高麗’는 2회 확인된다. 즉 『魏書』 帝紀 太祖 天興 元年(398) 正月조에 “辛酉 車駕發自中山 至于望都堯山 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 以充京師”라는 기사에서 처음 ‘고려’가 보이고 있으며, 같은 책 帝紀 世祖 太延 元年(435) 6월조에도 “丙午 高麗鄯善國並遣使朝獻”이라 하여 역시 고려 국호가 보이고 있다. 다만 『魏書』 列傳에서는 ‘高句麗’로 표기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사서의 성서 연대로 따졌을 때, 高麗란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중국 사서는 『宋書』이다. 『송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같은 책 本紀 少帝 景平 元年(423) 3월조에 “三月壬寅 孝懿皇后祔葬于興寧陵 是月 高麗國遣使朝貢”이라는 기사에서 ‘高麗’ 국호가 처음 확인된다. 이후 『남제서』 등 여러 사서에서 고구려는 ‘句麗’, ‘句驪’, ‘高句麗’, ‘高句驪’, ‘高驪’ 등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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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2)
〈廣開土王碑〉에서는 ‘出自北夫餘’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 所引 『구삼국사』 逸文에서는 주몽이 ‘東扶餘’로부터 출자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는 夫餘와 北夫餘, 東夫餘(東扶餘) 각각의 실체와 상호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지속해 왔다. 대체로 夫餘와 北夫餘 양자에 대해서는 동일시하는 가운데 특히 ‘동부여’에 대해서만큼은 ① 285년 모용 선비의 공격을 받고 沃沮로 피신해갔던 부여인의 잔여세력이 오늘날 연변 지역에 세운 나라로 파악하는 견해(池內宏, 1951), ② 오늘날 지린시 일대의 부여와 동부여를 동일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李健才, 1982), ③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 보이는 설화 속 동부여의 연장선상에서 동부여를 파악하는 견해(이도학, 2005) 등이 거론되어 왔다. 대체로 ① 번 견해가 한·일 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 가운데, 부여의 잔여세력이 피신한 지역을 오늘날 蛟河市 일대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고(이성제, 2008), 최근에는 부여의 四出道 중 東方道에 포진한 부여의 지방세력을 동부여로 보아 이들이 고구려 국가형성기부터 관계를 맺어왔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이승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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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伯 : ‘河伯’은 중국 신화 속 黃河의 水神으로, 전통시대 ‘河’는 일반 강이 아니라 단지 黃河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임을 감안하면, 엄밀히 말해 黃河의 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先秦 문헌에 이미 등장한다. 예를 들어, 『韓非子』 內儲說上에는 “齊人有謂齊王曰 河伯大神也 王何不試與之遇乎 臣請使王遇之 乃爲壇場大水之上 而與王立之焉 有閒 大魚動 因曰 此河伯”라는 내용이 있다. 『後漢書』 左周黃列傳에서는 구체적으로 “夫河伯以水爲城國 魚鱉爲民庶”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 『說苑』 辨物篇에서 “夫河伯以水爲國 以魚鱉爲民”이라고 하였다. 後漢 시기의 南陽畵像石(中國 河南省)에 ‘河伯出行圖’라고 하여 하백에 관한 도상이 확인된다. 다만 고구려 시조신화에 등장하는 ‘하백’은 강의 신으로서의 속성만을 차용한 고구려 고유의 신격으로 짐작된다. 또 〈廣開土王碑〉, 〈牟頭婁墓誌〉, 〈集安高句麗碑〉와 같은 5세기 초 금석문들에서 시조의 혈통과 관련해 모두 하백을 언급하고 있어, 이 신격이 당시 고구려 신앙체계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牟頭婁墓誌〉에서는 ‘河泊’ 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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