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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왕기는 북쪽까지 쫓아가, 불내의 성에 공훈을 기록했고,

왕기는 북쪽까지 쫓아가, 불내의 성에 공훈을 기록했고,
『고려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불내성은 지금 이름은 국내성이다.주 001
각주 001)
여기서의 不耐는 곧 이어지는 주문에서 나오듯 『漢書』 지리지의 不而縣이 있던 곳으로 현재 안변에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수정판)』, 박영사, 1985, 202쪽). 주문에서 『高麗記』 인용 구절이 “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까지인지, 아니면 그 뒤 “奔漢不而縣也”까지 포함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처럼 不耐城을 國內城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오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國內城이 본래 不耐城이었다는 위의 서술도 『高麗記』 찬자의 견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것이 『翰苑』 주문의 찬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바로 뒤 慕容晃 관련 정문의 주문에서는 『十六國春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 『翰苑』의 찬자가 사견을 덧붙이는 형태로 丸都城을 不耐城이라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高麗記』와 『翰苑』의 찬자가 國內城과 不耐城을 동일시한 연유는 아마도 이어지는 주문에 인용된 『三國志』 卷28 毌丘儉의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라는 구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이들 찬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三國志』 관구검전의 해당 구절은 “돌을 새겨 공을 기록하였는데, 환도의 산과 불내의 성에 새겼다”는 의미로 풀이하여 환도산과 불내성 두 곳에 공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不耐는 『三國志』 卷30 濊에서 曹魏에 의해 不耐濊王으로 책봉받는 不耐濊侯가 활동한 지역과 일치하여 이를 國內城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245년 관구검이 주도한 曹魏의 고구려 1차 침공이 마무리된 이후 246년 재차 진행된 고구려 2차 침공에서 현도태수 왕기가 이끄는 魏軍은 국내성을 지나 북옥저 방면으로 진격한 반면,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지휘하는 부대는 영동지역의 동옥저 및 동예 지역을 공략하였다(이승호,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2015, 37~38쪽). 따라서 『魏書』 관구검전에서 “銘不耐之城”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강원도 안변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한 曹魏의 군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高麗記」에서 不耐城을 國內城으로 본 것은 찬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不而縣은 안변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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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동북쪽 670리에 있다.” 본래 한의 불이현이다. 『한서』 지리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불이현은 낙랑군에 속하며, 동부도위 치소가 있던 곳이다.” 후한이 [낙랑군 속현에서] 없앴다. 『위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시 연간,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하니, 마침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 구려의 도읍을 도륙하였다. 참하고 잡은 수급과 포로가 천을 헤아렸다. [정시] 6년(246),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고구려]왕 궁은 마침내 매구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어 이를 쫓게 하니 [왕기는] 옥저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돌을 새겨 공을 기록하였는데, 환도의 산과 불내의 성에 새겼다.”
 
• 참고
『漢書』 卷28下 地理志 遼東郡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 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有雲鄣 縣二十五 朝鮮 … 不而 東部都尉治
『三國志』 卷28 毌丘儉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 立見此地將生蓬蒿 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溉灌 民賴其利

  • 각주 001)
    여기서의 不耐는 곧 이어지는 주문에서 나오듯 『漢書』 지리지의 不而縣이 있던 곳으로 현재 안변에 비정되고 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수정판)』, 박영사, 1985, 202쪽). 주문에서 『高麗記』 인용 구절이 “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까지인지, 아니면 그 뒤 “奔漢不而縣也”까지 포함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처럼 不耐城을 國內城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오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國內城이 본래 不耐城이었다는 위의 서술도 『高麗記』 찬자의 견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것이 『翰苑』 주문의 찬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바로 뒤 慕容晃 관련 정문의 주문에서는 『十六國春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 『翰苑』의 찬자가 사견을 덧붙이는 형태로 丸都城을 不耐城이라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高麗記』와 『翰苑』의 찬자가 國內城과 不耐城을 동일시한 연유는 아마도 이어지는 주문에 인용된 『三國志』 卷28 毌丘儉의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라는 구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이들 찬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三國志』 관구검전의 해당 구절은 “돌을 새겨 공을 기록하였는데, 환도의 산과 불내의 성에 새겼다”는 의미로 풀이하여 환도산과 불내성 두 곳에 공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不耐는 『三國志』 卷30 濊에서 曹魏에 의해 不耐濊王으로 책봉받는 不耐濊侯가 활동한 지역과 일치하여 이를 國內城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245년 관구검이 주도한 曹魏의 고구려 1차 침공이 마무리된 이후 246년 재차 진행된 고구려 2차 침공에서 현도태수 왕기가 이끄는 魏軍은 국내성을 지나 북옥저 방면으로 진격한 반면,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지휘하는 부대는 영동지역의 동옥저 및 동예 지역을 공략하였다(이승호,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2015, 37~38쪽). 따라서 『魏書』 관구검전에서 “銘不耐之城”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강원도 안변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한 曹魏의 군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高麗記」에서 不耐城을 國內城으로 본 것은 찬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不而縣은 안변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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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는 북쪽까지 쫓아가, 불내의 성에 공훈을 기록했고, 자료번호 : hw.k_0002_006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