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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후응이 열 가지 책략을 세웠으니, 이익과 손해의 요지가 여기에 펼쳐졌고

후응이 열 가지 책략을 세웠으니, 이익과 손해의 요지가 여기에 펼쳐졌고
『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원제 연간(기원전 48~기원전 33)에, 감연수주 001
각주 001)
甘延壽은 북지군 사람이다. 騎射에 뛰어나 羽林에 선발되었으며, 요동태수를 역임하였으나 면관되었다. 그후 車騎將軍 許嘉의 추천으로 郎中 諫大夫에 임명되었으며, 西域都護 騎都尉가 되어 陳湯과 흉노를 공격하여 질지선우를 죽였으며, 그 공으로 義成侯에 봉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漢書』 甘延壽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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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질지선우주 002
각주 002)
郅支單于는 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고, 呼韓邪單于의 형이다. 본래는 좌현왕이었는데 허려권거선우 사후 일어난 흉노의 1차 분열 때 자립하여 郅支骨都侯單于가 되었다. 호한야선우와 계속 쟁투하였으며, 강거와 오손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建昭 3년(기원전 36) 감연수 등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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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주살했다. 호한야선우는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편지를 올려 알현을 청한다고 했다. 또한 상곡[군]부터 서쪽으로 돈황에 이르는 새를 지키고, [이 일이] 계속되어 대대로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변경에서 새를 지키는 이졸을 해산시켜 천자의 백성들을 쉬게 할 것을 청했다. [천자가] 유사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는데, 의논하던 자들은 모두 [그것이] 낫다고 여겼으나 낭중 후응만이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황제가 연유를 물으니, [후]응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변방의 장로들이 말하기를, 흉노가 음산을 잃은 후 지나갈 때마다 통곡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만약 새를 지키는 수졸들을 해산시킨다면 이적이 큰 이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 천자의 덕이 널리 퍼져 하늘에 미치고 흉노도 덮었습니다. 흉노는 온전히 살게 해주는 은혜를 입어 머리를 조아리고 와서 신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이적의 마음은 곤란하면 낮추고 순종하지만, 강해지면 교만해지고 거스르는 것이 천성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이전에 이미 외성을 파하였으며, 초소와 봉수대도 없애 지금은 간신히 정찰하고, 봉화만이 통할 뿐입니다. 옛 사람들은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았으니 거듭 파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중국에는 예의의 가르침과 형벌의 엄격함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여전히 금하는 것을 어깁니다. 또한 하물며 선우가 자신의 무리에게 [어찌] 끝까지 금약을 어기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애초에 중국이 관구와 교량주 003
각주 003)
關梁는 관구(관문)과 교량이다. 수륙교통로 상 반드시 지나는 곳을 광범위하게 칭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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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세워 제후를 제어함을 숭상하는 것은 신하들이 [분에 넘치게] 바라는 것을 끊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를 세워서 순찰하고, 주둔병을 두어 지키는 것은 흉노만을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여러 속국에서 항복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본래 흉노의 무리였던 자들이 옛일을 생각하여 도망칠까 염려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근래에 서쪽으로 강이 새를 지키면서 한인과 통교하였는데, [한의] 관리들이 이익을 탐하여 그들의 재산과 처자를 제멋대로 가져갔습니다.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무리를] 일으켜 배반하는 것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새를 다스리는 것을 파한다면 [한과 흉노 사이에도 한과 강처럼 서로를] 업신여기고 나뉘어 싸우는 흐름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옛날에 종군하였다가 [흉노에게] 사로잡혀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며 [그들의] 자손은 빈곤하니, 일단 도망하여 [새를]나가면 그들의 친척을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변인의 노비들은 근심하고 고생하여 도망치고자 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흉노 안에 즐거움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찰의 엄격함을 어찌 할 수가 없구나.’ 그럼에도 때때로 도망하여 새를 나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이유]입니다. 도적들은 사납고 교활하며 무리지어 법을 어깁니다. 만약 [그들이] 군색하거나 급박해져 도망하여 북쪽으로 나간다면 제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새를 일으킨 이래로 백여 년이 흘렀는데, [새는] 모두 흙담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더러는 산의 암석이나 말라서 쓰러진 나무주 004
각주 004)
僵落는 산 위에 꺾이거나 말라 죽은 나무를 가리킨다는 안사고의 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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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의 수문을 이용하여 점점 [새를] 고르게 하였습니다. 병졸들이 [새를] 수축[하는데 든 노력]과 [소모된] 비용이 무궁하여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은 의논한 자들이 처음과 끝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임시로 요역을 없애고자 한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 십년은 지났으나 백년 안에 갑자기 다른 변고가 생겨 장새가 파괴되고 초소와 봉수대가 멸절된다면 다시 둔병을 징발하여 손보아 고쳐야만 하는데, [이는] 누대의 일로 갑자기 복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홉 번째 [이유]입니다. 만약 수졸을 파하고 정찰을 줄인다면 선우는 자신이 새를 방비하고 [적의] 공격을 막았으니 반드시 우리에게 큰 덕을 [베풀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요구하는 것이 끊임이 없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거스른다면 [차후의 일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적에게 틈을 열어주면, 중국의 견고함이 무너집니다. [이것이] 열 번째 [이유]입니다. [선우의 청을 받아주는 것은] 오래도록 지극한 평안을 유지하고 여러 오랑캐를 위압하고 제어하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후응이] 아뢴 것에 대하여 천자가 조서를 내려서 변경의 새를 파하는 일을 논의하지 말라고 하고, 거기장군에게 선우를 말로써 타이르게 했다”라고 한다.
 
• 참고
『漢書』 卷94下 匈奴 郅支旣誅 呼韓邪單于且喜且懼 上書言曰 常願謁見天子 誠以郅支在西方 恐其與烏孫俱來擊臣 以故未得至漢 今郅支已伏誅 願入朝見 竟寧元年 單于復入朝 禮賜如初 加衣服錦帛絮 皆倍於黃龍時 單于自言願婿漢氏以自親 元帝以後宮良家子王牆字昭君賜單于 單于驩喜 上書願保塞上谷以西至敦煌 傳之無窮 請罷邊備塞吏卒 以休天子人民 天子令下有司議 議者皆以爲便 郞中侯應習邊事 以爲不可許 上問狀應曰 周秦以來 匈奴暴桀 寇侵邊境 漢興 尤被其害 臣聞北邊塞至遼東 外有陰山 東西千餘里 草木茂盛 多禽獸 本冒頓單于依阻其中 治作弓矢 來出爲寇 是其苑囿也 至孝武世 出師征伐 斥奪此地 攘之於幕北 建塞徼起亭隧 築外城 設屯戍 以守之 然後邊境得用少安 幕北地平 少草木 多大沙 匈奴來寇 少所蔽隱 從塞以南 徑深山谷 往來差難 邊長老言匈奴失陰山之後 過之未嘗不哭也 如罷備塞戍卒 示夷狄之大利 不可一也 今聖德廣被 天覆匈奴 匈奴得蒙全活之恩 稽首來臣 夫夷狄之情 困則卑順 彊則驕逆 天性然也 前以罷外城 省亭隧今裁足以候望通烽火而已 古者安不忘危 不可復罷 二也 中國有禮義之敎 刑罰之誅 愚民猶尙犯禁 又况單于能必其衆不犯約哉 三也 自中國尙建關梁以制諸侯 所以絶臣下之覬欲也 設塞徼 置屯戍 非獨爲匈奴而已 亦爲諸屬國降民 本故匈奴之人 恐其思舊逃亡 四也 近西羌保塞 與漢人交通 吏民貪利 侵盜其畜産妻子 以此怨恨 起而背畔 世世不絶 今罷乘塞 則生嫚易分爭之漸 五也 往者從軍多沒不還者 子孫貧困 一旦亡出 從其親戚六也 又邊人奴婢愁苦 欲亡者多 曰 聞匈奴中樂 無奈候望急何 然時有七出塞者 七也 盜賊桀黠 群輩犯法 如其窘急 亡走北出 則不可制 八也 起塞以來百有餘年 非皆以土垣也 或因山巖石 木柴僵落 谿谷水門 稍稍平之卒徒築治 功費久遠 不可勝計 臣恐議者不深慮其終始 欲以壹切省繇戍 十年之外 百歲之內 卒有它變 障塞破壞 亭隧滅絶 當更發屯繕治 累世之功不可卒復 九也 如罷戍卒 省候望 單于自以保塞守御 必深德漢 請求無已小失其意 則不可測 開夷狄之隙 虧中國之固 十也 非所以永持至安 威制百蠻之長策也 對奏 天子有詔 勿議罷邊塞事 使車騎將軍口諭單于 曰 單于上書願罷北邊吏士屯戍 子孫世世保塞 單于鄕慕禮義 所以爲民計者甚厚此長久之策也 朕甚嘉之 中國四方皆有關梁障塞 非獨以備塞外也 亦以防中國姦邪放縱 出爲寇害 故明法度以專衆心也 敬諭單于之意 朕無疑焉 爲單于怪其不罷 故使大司馬車騎將軍嘉曉單于 單于謝曰 愚不知大計 天子幸使大臣告語 甚厚

  • 각주 001)
    甘延壽은 북지군 사람이다. 騎射에 뛰어나 羽林에 선발되었으며, 요동태수를 역임하였으나 면관되었다. 그후 車騎將軍 許嘉의 추천으로 郎中 諫大夫에 임명되었으며, 西域都護 騎都尉가 되어 陳湯과 흉노를 공격하여 질지선우를 죽였으며, 그 공으로 義成侯에 봉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漢書』 甘延壽傳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郅支單于는 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고, 呼韓邪單于의 형이다. 본래는 좌현왕이었는데 허려권거선우 사후 일어난 흉노의 1차 분열 때 자립하여 郅支骨都侯單于가 되었다. 호한야선우와 계속 쟁투하였으며, 강거와 오손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建昭 3년(기원전 36) 감연수 등에게 피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關梁는 관구(관문)과 교량이다. 수륙교통로 상 반드시 지나는 곳을 광범위하게 칭하는 표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僵落는 산 위에 꺾이거나 말라 죽은 나무를 가리킨다는 안사고의 주가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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