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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사회에서 초기국가로 이행

1. 군장사회에서 초기국가로 이행

우선 군장사회 직전단계의 사례를 보면 중원지역의 경우 기원전 4천5백년경의 앙소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단계의 강채위치의 환호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취락유적이 있다. 이단계의 환호시설은 맹수의 위협을 방어하고, 가축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무덤의 부장품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으로 보아 구성원간의 계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차이가 확실하지 않은 혈연집단의 사회단계로 이해된다.
군장사회의 등장을 입증하는 취락유적의 사례로 중원지역에서는 기원전 4천년의 산서성 도사유적이 있다. 성곽이 길이가 1.5~1.8㎞의 대형이고, 성곽 내에 궁전이나 제단과 유사한 시설이 확인되었다. 대문구 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의 후기에 중심석성마을, 위성석성마을, 석성없는 마을의 3단계로 위계화된 취락네트워크가 조성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된다. 무덤규모와 부장품을 볼 때 등급화되어 있고, 옥기를 포함한 200여점의 유물이 부장된 수장급 무덤이 도사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북방지역에서는 중원지역보다 늦어 기원전 3천년경의 노호산위치문화단계에 계층화된 사회의 모습을 살필 수 있으나, 산 구릉에 위치하고, 석성의 길이가 400m를 넘지 않는 소규모이어서 중원의 도사 석성마을과는 차이가 난다. 기원전 2천년기로 내려와서도 여전히 초기군장사회 혹은 족장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음이 주개구내몽골뉴스구글북스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무덤유적을 통해서 확인된다. 남성중심의 합장사례가 있고, 순생동물과 부장유물을 통해 계층차이가 확인되지만, 군장에 해당하는 무덤의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동방지역의 경우 기원전 3천년경의 신석기시대 후기의 홍산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단계에서 초기군장사회의 모습이 확인된다.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우하량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유적에서는 여러 지점에서 다량의 옥기를 부장한 무덤이 조사된 바 있다. 부장유물의 차이로 등급화된 사회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중심대묘라 할지라도 다른 무덤과 분명하게 차별화된 양상을 보이지 않아 발전된 군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석성마을을 통해서 본 군장사회의 모습은 기원전 2천년기의 청동기시대의 하가점하층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단계에 확인된다. 요하 상류의 영금하 일대에 구릉상에 수백여 곳의 석성마을이 조성되어있는데, 대형, 중형, 소형의 석성마을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하가점하층문화의 사회집단에 대해서 중국연구자들은 고국(古國)-방국(邦國)-제국(帝國) 중 국가에 대응되는 방국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800여기의 무덤이 발견된 대전자 유적의 사례를 보면, 중원계 고급도기와 채색토기가 주로 부장되며, 빈부와 신분의 차이를 인정할만 등급화현상이 확인된다. 그러나 최상급이라 하더라도 다른 구성원과 큰 차이가 없어 군장 이상의 탁월한 신분의 소유자라 보기 어려운 것이다.
같은 동방문화권의 요동과 한반도 지역의 경우, 그 초기군장사회의 모습은 기원전 1천년기에 8m의 상석을 갖추거나 수십미터의 적석묘역, 혹은 7~8 중의 개석시설을 갖춘 대형 지석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석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를 축조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리더쉽이 갖추어져야 된다. 그러한 리더쉽은 대외적 교역이나 대내적 기술체계를 운용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크게 관련이 없다. 따라서 동 지석묘 축조집단은 공동체 지향의 군장사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혹은 족장사회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동반도 남단의 적석총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의 경우 한 무덤에 다수의 인골이 화장되어 묻힌 것으로 북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노예소유자와 순장노예의 공동무덤이라고 볼만한 증거는 없다. 부장되는 청동기 또한 비파형동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키백과비파형동검비파형동검과 공구와 소형 장식품 위주로서, 노예소유자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초기군장사회 수준인 것으로 이해된다.
북방문화권에서 기원전 2천년기 말 군장사회 수준에서 더욱 발전한 사례는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내몽고 중남부 주개구내몽골뉴스구글북스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와 연산 남부의 리가애위치 무덤유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상위신분의 무덤에서 중원계 청동예기와 북방계 청동무기가 부장되어 있는 바, 이를 통해서 남부 시베리아 초원지역과 중원지역 양 지역과 다양한 방식의 교류를 통해서 이 지역의 군장들이 그들의 권력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된다.
기원전 1천년기에 이르면 내몽고 중남부 지역의 모경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무덤, 연산 남록의 옥황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무덤의 사례에서 보듯이 목축의 대상인 말, 소, 양, 개의 순생과 중원계 청동예기와 북방계 청동무기를 부장한 상위신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서 북방초원의 목축경제가 발전하면서 중원지역과의 교류가 더욱 공고해지고, 이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한 전사적 군장이 등장하는 사실이 확인된다.
동방문화권에서도 기원전 2천년기말 1천년기초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군장사회가 등장한다. 요하상류를 중심으로 한 하가점상층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와 대릉하위치 중상류를 중심으로 한 십이대영자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북한문화재자료관위치문화에 속하는 여러 무덤유적을 통해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전자에 속하는 소흑석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와 남산근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무덤의 사례를 보면 각종 중원계 청동예기, 북방계 청동 용기와 무기와 장신구, 동방계의 무기와 동경 등이 다량 부장된 사실이 확인된다. 최상급의 무덤인 소흑석구 8501호 무덤의 예를 보면 각종 중원계 용기가 15점, 재지계 용기 21점, 북방과 동방계 무기 23점, 차마구 27점, 생활공구 57점, 소형장식품이 130여점 등의 엄청난 양의 청동기가 부장되어 있는 것이다. 남산근 10호 무덤의 경우 청동용기 10점, 무기 65점, 공구 22점, 차마구 6점, 동포 284점 등으로 부장된 청동기의 기종과 숫자는 비슷한 시기에 인근 북방지역을 포함하여 최상급의 수준이다. 다만 북방지역과 다른 것은 동물 순생의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계통과 기종의 청동기가 영성현 소흑석구 8501호, 남산근 3호 무덤의 예에서 보듯이 특정의 무덤에 다량 부장되는 사실을 통하여 현지 청동기의 제작을 후원하고 외래 청동기의 수입과 유통을 관장하는 권력을 소유한 군장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군장은 조직 구성원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실력 그 이상의 정치적 권력을 갖추었으며, 그가 이끄는 지역집단은 공동체지향의 군장사회가 아니라 개인지향의 보다 계층화가 진전된 군장사회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십이대영자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와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위치을 경계로 하여 동쪽으로 인접한 대릉하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이 문화 또한 대부분 수혈 무덤과 그 부장유물을 통해서 확인된다. 하가점상층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와 달리 북방계와 중원계의 청동기가 거의 공반되지 않는다. 수장급무덤으로 십이대영자의 예가 있는데, 소흑석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무덤에 비해 기종과 수량이 월등히 적은 편이다. 용기는 전혀 전하지 않고, 공구나 장식품 또한 최소한 부장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무기를 표지로 한 전사적 엘리트가 주도하는 개인 중심의 군장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요동지역에서는 다소 늦어 기원전 1천년기 중반에 다량의 청동무기와 마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와 장식품과 각종의기를 부장한 심양 정가와자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6512호 무덤의 피장자가 군장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앞서 보듯이 북방과 동방 문화권에서는 군장사회에 머무르고 있는 기원전 2천년기 초반에 중원지역에서는 다음 초기국가 단계에 진입한다. 기원전 1900~1500년경 이리두위키백과위치 유적에 동서 2,400m, 남북 1,900m 의 토성으로 둘러 싸인 성곽내에 궁전지와 종교제단, 그리고 공방지가 확인된 바 있다. 기원전 1600~1400년경에는 더욱 규모가 커진 성곽궁전도시가 발굴되었는데, 언사상성RISS위키백과위치, 정주상성RISS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에서 정주상성은 남북 1,870m, 동서 1,700m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왕권이 확립된 궁정도시의 모습이 확인된다.
기원전 1400년~1100년경이면 왕의 존재가 갑골문자위키백과위키백과의 기록으로 확인되며, 안양시 원하 북쪽에 원북상성은허세계유산과 남쪽의 은허 소둔에서 대규모 궁전과 종묘, 그리고 왕릉구 유적이 확인된다. 무정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1001호 대묘는 묘광이 남북 19m, 동서 21m, 깊이 10m로서 사방에 묘도가 있는 대규모 무덤시설이다. 무덤 주위 묘도에 70여명의 순장 인골이 확인되고, 왕묘 주위에 수백여기의 인간희생갱이 동물희생갱과 함께 발견되었다. 부장유물은 도굴되어 확인되지 않는데, 도굴되지 않은 무정의 왕비 부호위키백과위키백과위치무덤에서 청동기 460여점, 옥기 755점의 부장품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북방과 동방지역에서 국가를 지배하는 왕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궁정지와 무덤의 사례는 기원전 1천년기 전반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방지역의 경우 기원전 3세기를 전후로 하는 오르도스지구의 아로시등위치 무덤 등의 사례가 그 부장유물로 보아 초기국가의 권력자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동 무덤에서는 정교한 동물장식의 순금제 금관과 패식이 출토되었다. 오르도스 지구 내에 비슷한 수준의 수장급 무덤이 확인되는 바, 아직 완전한 왕위세습체계를 갖춘 성숙한 국가체제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방문화권 중 요서지구의 경우 또한 기원전 1천년기 중반에 국가수준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궁정지는 물론 무덤의 사례가 확인되지 않았다. 건창 동대장자위치에 순금제 검파두식의 동검신화통신을 비롯하여 다량의 중원계 청동예기를 부장한 사례가 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이해되나 확실하지 않다. 요동과 한반도에서도 기원전 1천년기 중후반에는 문헌기록에 연과 경쟁하는 고조선의 왕으로 보아 국가수준의 정치체가 등장한 것으로 이해되나 이를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 구주지역의 경우 국가나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왕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무덤유적으로 기원 1세기경의 경주 사라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치 130호와 구주지역의 히라바루문화유산DB(일본)위치 유적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사라리 130호에서는 70여매의 판상철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를 부장하였으며, 후자의 경우 40여매의 동경을 부장하여 각각 다른 생산과 경제기반을 토대로 그들의 권력을 향상시킨 것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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