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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지추밀원(知樞密院) 안도(安燾)의 파면 등을 주장하는 손각(孫覺)의 상언

  • 날짜
    1086년 2월 (윤)(元祐 元年(1086) 閏2月 乙卯)
  • 출전
    卷370 元祐 元年(1086) 閏2月 乙卯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주 001
각주 001)
右諫議大夫 : 북송의 관직. 諫議大夫는 後漢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당 德宗 貞元 4年(787)에 비로소 좌, 우로 분리되었다. 右諫議大夫는 중서성에 소속되었다. 북송 초기에는 職事官으로서의 임무를 가진 것이 없었다가 元豐 연간의 관제 개혁으로 言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북송 초기에는 正4品下의 품계를 지녔고, 元豐 연간의 개혁 이후 從4品의 관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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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각(孫覺)주 002
각주 002)
孫覺 : 1028~1090. 북송의 관인. 북송 高郵(현재 江蘇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莘老이다. 皇祐元年(1049)에 진사가 되었다. 熙寧 2年(1069)에 知諫院, 同修起居注 등의 직임을 맡았다. 靑苗法의 시행을 반대하다가 폄출되어 湖州, 福州, 揚州 등의 知州를 역임했다. 元豐 6年(1083)에 소환되어 太常少卿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자 右諫議大夫로 승진하고 이후 吏部侍郎, 御史中丞까지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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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황제께서) 명을 내려 안도(安燾)를 지추밀원(知樞密院)에 임명했는데, 권급사중(權給事中) 왕암수(王巖叟)주 003
각주 003)
王巖叟 : 1043~1093. 북송의 관인. 북송 大名府 淸平(현재 山東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彦霖이다. 嘉祐 6年(1061)에 明經科에 급제하여 경력을 시작했고, 철종 초가 되면 監察御史에까지 올랐다. 李定, 蔡確, 章惇 등을 탄핵하는 등 강경한 언관으로서 잘 알려졌다. 元祐 6年(1091)에 樞密直學士가 되었지만 이듬해에 탄핵을 당해 知鄭州로 폄출되었다. 元祐 8年(1093) 3월에 知河陽府가 되었다가 몇 개월 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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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봉환하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은 안도의 재주와 지식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일찍이 집정 몇 명과 논의하여 모두 마땅히 파면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안도가 그 중 하나입니다. 신이 한진(韓縝)에게 말했는데 효과가 없어 감히 논변하지 못했는데, 지금 폐하께서 이내 안도를 지추밀원으로 임명하시고 그 즉시 안도가 이미 자리를 옮겼으니 신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안도의 재능이 사대부라 칭할 만하지 않는데도 진사에 3등급으로 이름을 올리고 그 인연으로 관직에 이르렀습니다. 선조대에 (신료들을) 쫓아내면서 신료가 지나치게 많아도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었는데, 때문에 안도가 조정에서 벼슬할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고려에 사신 보낼 때 안도를 사신으로 삼았는데 바닷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지 않은 것 또한 신하의 당연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마침내 갑자기 발탁되어 호부상서(戶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으나 안도의 재주와 품격은 중인 이하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황제폐하, 태황태후폐하께서 대신들을 나아가거나 물러나게 함으로써 정치를 새롭게 하시는데, 안도야말로 먼저 파면해야 할 자입니다. 폐하께서 장돈(章惇)주 004
각주 004)
章惇 : 1035~1105. 북송의 관인. 북송 建州 浦城(현재 福建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子厚이다. 왕안석이 집권하자 장돈의 재능을 중요시하여 編修三司條例官으로 발탁하였다. 元豐 3年(1080)에는 參知政事의 직까지 올랐다. 이듬해에 知蔡州로 폄출되었다가 元豐 5年(1082)에 소환되어 門下侍郞이 되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 사마광이 免役法을 폐지하는 것에 극력 반대하다가 知汝州로 폄출되었다.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尙書左僕射 겸 門下侍郞이 되었다. 熙寧, 元豐 연간의 신법을 회복시키고자 元祐 연간에 활동했던 구법당 인사들을 공격했다. 서하에 대한 전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휘종이 즉위하면서 쫓겨나게 되었고 湖州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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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파면하신 것 때문에 범순인(范純仁)주 005
각주 005)
范純仁 : 1027~1101. 북송의 관인. 북송 蘇州 吳縣(현재 江蘇省 蘇州) 사람으로 字는 堯夫이다. 范仲淹의 둘째 아들이다. 皇祐 元年(1049)에 진사가 되었고, 범중엄이 사망한 이후에 비로소 관직에 진출했다. 신종이 즉위하면서 관직이 知諫院까지 이르렀는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知河中府로 폄출되었다. 철종이 즉위하자 소환되어 天章閣待制侍講이 되었고 給事中에 임명되었다. 사마광이 신법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에는 반대했고, 同知樞密院事가 되면서는 서하와의 전쟁을 중지하라는 건의를 올렸다. 元祐 3年(1088)에는 尙書右僕射 겸 中書侍郎이 되었다. 紹聖 元年(1094)에 章惇이 재상이 되자 결국 파면되어 知潁昌府로 폄출되었다. 元祐 연간의 大臣들을 박해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장돈의 미움을 샀다. 휘종이 즉위하자 右正義大夫가 되었다. 시호는 忠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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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발탁하여 추밀원에 두는 것을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범순인은 조정의 본말을 세우고 변방의 사무를 익혀 알고 있으니 안도와 비할 자가 아닙니다. 조정의 논의로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안도를 차마 그만두게 하지 못한다면, 또한 동지원사로 삼아 범순인과 동렬에 두고 그 위에 있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갑자기 그를 옮기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왕암수가 봉환했어도 즉시 기용해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성념(聖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 각주 001)
    右諫議大夫 : 북송의 관직. 諫議大夫는 後漢 시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당 德宗 貞元 4年(787)에 비로소 좌, 우로 분리되었다. 右諫議大夫는 중서성에 소속되었다. 북송 초기에는 職事官으로서의 임무를 가진 것이 없었다가 元豐 연간의 관제 개혁으로 言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북송 초기에는 正4品下의 품계를 지녔고, 元豐 연간의 개혁 이후 從4品의 관직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孫覺 : 1028~1090. 북송의 관인. 북송 高郵(현재 江蘇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莘老이다. 皇祐元年(1049)에 진사가 되었다. 熙寧 2年(1069)에 知諫院, 同修起居注 등의 직임을 맡았다. 靑苗法의 시행을 반대하다가 폄출되어 湖州, 福州, 揚州 등의 知州를 역임했다. 元豐 6年(1083)에 소환되어 太常少卿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자 右諫議大夫로 승진하고 이후 吏部侍郎, 御史中丞까지 역임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王巖叟 : 1043~1093. 북송의 관인. 북송 大名府 淸平(현재 山東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彦霖이다. 嘉祐 6年(1061)에 明經科에 급제하여 경력을 시작했고, 철종 초가 되면 監察御史에까지 올랐다. 李定, 蔡確, 章惇 등을 탄핵하는 등 강경한 언관으로서 잘 알려졌다. 元祐 6年(1091)에 樞密直學士가 되었지만 이듬해에 탄핵을 당해 知鄭州로 폄출되었다. 元祐 8年(1093) 3월에 知河陽府가 되었다가 몇 개월 후에 사망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章惇 : 1035~1105. 북송의 관인. 북송 建州 浦城(현재 福建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子厚이다. 왕안석이 집권하자 장돈의 재능을 중요시하여 編修三司條例官으로 발탁하였다. 元豐 3年(1080)에는 參知政事의 직까지 올랐다. 이듬해에 知蔡州로 폄출되었다가 元豐 5年(1082)에 소환되어 門下侍郞이 되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 사마광이 免役法을 폐지하는 것에 극력 반대하다가 知汝州로 폄출되었다.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尙書左僕射 겸 門下侍郞이 되었다. 熙寧, 元豐 연간의 신법을 회복시키고자 元祐 연간에 활동했던 구법당 인사들을 공격했다. 서하에 대한 전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휘종이 즉위하면서 쫓겨나게 되었고 湖州에서 사망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范純仁 : 1027~1101. 북송의 관인. 북송 蘇州 吳縣(현재 江蘇省 蘇州) 사람으로 字는 堯夫이다. 范仲淹의 둘째 아들이다. 皇祐 元年(1049)에 진사가 되었고, 범중엄이 사망한 이후에 비로소 관직에 진출했다. 신종이 즉위하면서 관직이 知諫院까지 이르렀는데,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知河中府로 폄출되었다. 철종이 즉위하자 소환되어 天章閣待制侍講이 되었고 給事中에 임명되었다. 사마광이 신법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에는 반대했고, 同知樞密院事가 되면서는 서하와의 전쟁을 중지하라는 건의를 올렸다. 元祐 3年(1088)에는 尙書右僕射 겸 中書侍郎이 되었다. 紹聖 元年(1094)에 章惇이 재상이 되자 결국 파면되어 知潁昌府로 폄출되었다. 元祐 연간의 大臣들을 박해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장돈의 미움을 샀다. 휘종이 즉위하자 右正義大夫가 되었다. 시호는 忠宣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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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추밀원(知樞密院) 안도(安燾)의 파면 등을 주장하는 손각(孫覺)의 상언 자료번호 : jt.k_0006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