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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김인우를 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파견하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416년 9월 2일(음)
  • 출전
사료해설
호조판서 박습(朴習)이 강원도 관찰사 재직 당시 들었던 무릉도(武陵島, 울릉도)에 대한 정보에 기초하여 태종에게 삼척 사람 전 만호(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불러 울릉도에 관해서 조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김인우는 울릉도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가게 되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왜구의 침탈이 있을 것이고 마침내 강원도까지 그 피해가 미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종은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安撫使)로 삼아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의 쇄환을 명하였다.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에 삼았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이미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庚寅/以金麟雨爲武陵等處安撫使。 戶曹參判朴習啓: “臣嘗爲江原道都觀察使, 聞武陵島周回七息, 傍有小島, 其田可五十餘結。 所入之路, 纔通一人, 不可竝行。 昔有方之用者率十五家入居, 時或假倭爲寇。 知其島者, 在三陟, 請使之往見。” 上可之, 乃召三陟人前萬戶金麟雨, 問武陵島事, 麟雨言: “三陟人李萬嘗往武陵而還, 詳知其島之事。” 卽召李萬。 麟雨又啓: “武陵島遙在海中, 人不相通, 故避軍役者, 或逃入焉。 若此島多接人, 則倭終必入寇, 因此而侵於江原道矣。” 上然之, 以麟雨爲武陵等處安撫使, 以萬爲伴人, 給兵船二隻、抄工二名、引海二名、火㷁火藥及糧, 往其島, 諭其頭目人以來。 賜麟雨及萬衣笠靴。
번역문
김인우(金麟雨)를 무릉(武陵) 등지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습(朴習)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울릉도(鬱陵島)를 말하는데, 그 옆의 소도(小島)는 분명히 독도(獨島)를 가리키는 사료(史料)임.}의 주회(周回)가 7식(息)이고, 곁에 소도(小島)가 있고, 전지가 50여 결(結)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가(家)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혹은 때로는 가왜(假倭){가왜(假倭) : 왜구(倭寇)를 가장하여 중국이나 조선 해변을 약탈하던 가짜 왜구(倭寇). 당시 해변에 살던 불한당이 간혹 무리를 지어 가왜구(假倭寇) 행세를 하였음.} 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三陟)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여기어 삼척 사람 전 만호(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물었다. 김인우가 말하기를,
“삼척 사람 이만(李萬)이 일찍이 무릉(武陵)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섬의 일을 자세히 압니다.”
하니, 곧 이만을 불렀다. 김인우가 또 아뢰기를,
“무릉도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주접(住接)하는 사람이 많으면 왜적이 끝내는 반드시 들어와 도둑질하여, 이로 인하여 강원도를 침노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어 김인우를 무릉 등지 안무사로 삼고 이만(李萬)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병선(兵船) 2척, 초공(抄工) 2명, 인해(引海) 2명, 화통(火通)·화약(火藥)과 양식을 주어 그 섬에 가서 그 두목(頭目)에게 일러서 오게 하고, 김인우와 이만에게 옷[衣]·입(笠)·화(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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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우를 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파견하다 자료번호 : sd.d_0149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