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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전구조신(田口朝臣; 다구치노아소미)

전구조신(田口朝臣; 다구치노아소미)
 석천조신(石川朝臣; 이시카하노아소미)과 조상이 같다. 무내숙녜대신(武內宿禰大臣; 다케시우치노스쿠네노오미)의 후손이다. 편복신(蝙蝠臣; 가하호리노오미)은 풍어식취옥희천황(豐御食炊屋姬天皇; 도요미케카시키야히메)[시호는 추고(推古)이다.]의 시대에 대화국(大和國; 야마토노쿠니) 고시군(高市郡; 다케치노코호리) 전구촌(田口村; 다쿠치노무라)에 살았다. 그리하여 전구신이라고 하였다. 『일본기』에는 누락되었다.
 
【주석】
1. 전구조신(田口朝臣)
전구(田口)라는 씨명은 율령제하의 대화국(大和國) 고시군(高市郡) 전구촌(田口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강원시(橿原市) 화전정(和田町) 일대이다.
전구조신의 일족으로는 『속일본기』에 전구조신익인(田口朝臣益人, 658~723), 전구조신광마려(田口朝臣廣麻呂), 전구조신어부(田口朝臣御負), 전구조신가주(田口朝臣家主) 등다수가 보인다. 『동남원문서(東南院文書)』에도 검교주전장관(檢校鑄錢長官) 종5위하 전구조신식계(田口朝臣息繼)가 보인다.
2. 무내숙녜대신(武內宿禰大臣)
『일본서기』에는 무내숙녜(武內宿禰), 『고사기』에는 건내숙녜(建內宿禰), 다른 문헌에는 건내족니(建內足尼)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경행천황(景行天皇) 14년에 출생하여 성무천황(成武天皇) 대에 대신(大臣)의 지위에 올랐으며, 중애천황(仲哀天皇)을 거쳐 신공(神功), 응신(應神), 인덕(仁德) 대까지 3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활약한 인물로 전하고 있다. 『공경보임(公卿補任)』에서 나이 295세, 관직에 있었던 기간이 244년이라고 할 정도로 장수한 인물로 나타나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기씨(紀氏)·거세씨(巨勢氏)·평군씨(平群氏)·갈성씨(葛城氏)·소아씨(蘇我氏) 등 중앙 유력 호족의 공통의 조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혈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의제적인 관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경행천황기(景行天皇紀)에서는 옥주인남무웅심명(屋主忍男武雄心命)과기직(紀直)의 먼 조상인 토도언(菟道彦)의 딸인 영원(影媛)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한 효원천황기(孝元天皇紀)에서는 효원(孝元)의 아들인 언태인신명(彦太忍信命)을무내숙녜의 조부라고 하였으므로, 무내숙녜는 효원천황의 3세손에 해당한다.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에는 그의 아우로 감미내숙녜(甘美內宿禰)가 보인다. 『고사기』에서는 효원천황의 아들인 비고포도압지신명(比古布都押之信命, 彦太忍信命)과 목국조(木國造)인 우두비고(宇豆比古)의 누이인 산하영일매(山下影日賣) 사이에서 건내숙녜가 태어났으며, 효원천황의 손자라고 하였다. 또한 그와 이복형제인 미사내숙녜(味師內宿禰, 甘美內宿禰)의 이름이 보인다.
그의 자식으로는 『일본서기』에서는 평군목토숙녜(平群木菟宿禰)만 부자관계로 명시되어 있으나, 『고사기』에서는 7남 2녀와 27씨의 후예씨족을 기록하고 있다.
파다팔대숙녜(波多八代宿禰, 羽田矢代宿禰; 하타노야시로스쿠네)는 파다신(波多臣)·임신(林臣)·파미신(波美臣)·성천신(星川臣)·담해신(淡海臣)·장곡부군(長谷部君)의 조상이다.
허세소병숙녜(許勢小柄宿禰; 고세노오카라노스쿠네)는 허세신(許勢臣, 巨勢臣)·작부신(雀部臣)·경부신(輕部臣)의 조상이다.
소하석하숙녜(蘇賀石河宿禰, 石川宿禰; 소가노이시카와노스쿠네)는 소아신(蘇我臣)·천변신(川辺臣)·전중신(田中臣)·고향신(高向臣)·소치전신(小治田臣)·앵정신(櫻井臣)·안조신(岸田臣)의 조상이다.
평군도구숙녜(平群都久宿禰, 平群木菟宿禰; 헤구리노츠쿠노스쿠네)는 평군신(平群臣)·좌화량신(佐和良臣)·마어직련(馬御樴連)의 조상이다.
목각숙녜(木角宿禰, 紀角宿禰; 기노츠노노스쿠네)는 목신(木臣, 紀臣)·도노신(都奴臣)·판본신(坂本臣)의 조상이다.
갈성장강증도비고(葛城長江曾都毘古, 葛城襲津彦; 가즈라키노나가에노소츠비코)는 옥수신(玉手臣)·적신(的臣)·생강신(生江臣)·아예나신(阿藝那臣)의 조상이다.
약자숙녜(若子宿禰; 와쿠고노스쿠네)는 강야재신(江野財臣)의 조상이다. 그에 관한 『일본서기』 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행천황이 기이(紀伊)에 행차하여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으나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서 대신 옥주인남무웅심명을 파견하고, 아비백원(阿備柏原; 아비노카시와바라)에서 9년간 머무르면서, 영원으로부터 무내숙녜를 낳았다고 하였다. 또한 무내숙녜는 성무천황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였다(경행천황 14년).
경행 25년 7월 3일조 및 27년 2월 12일조에서는 무내숙녜를 북륙(北陸) 및 동쪽 지방에 파견하여 지형과 백성의 상황을 시찰하게 하였고, 돌아와서는 하이(蝦夷)를 정벌할 것을 진언하였다고 한다. 경행 51년 1월 7일에 여러 날에 걸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치족언(稚足彦)과 무내숙녜는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니, 모두 연회를 즐기느라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있으므로 비상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치족언을 황태자로 삼고 무내숙녜를 동량지신(棟樑之臣)으로 삼았다고 한다(『일본서기』 경행 51년 8월 4일조).
성무천황 때는 무내숙녜를 대신(大臣)으로 삼았고, 생일이 같다는 이유로 성무가 무내숙녜를 특별히 총애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일본서기』 성무 3년 정월 7일조).
중애천황 때는 중애가 신탁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정벌하려던 계획을 중지하면서 신벌을 받아 죽었을 때, 신공황후(神功皇后)와 무내숙녜가 그 사실을 숨기고 중애의 유해를 해로로 몰래 혈문(穴門)로 옮겨 풍포궁(豐浦宮)에서 빈례를 행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 중애천황이 죽은 후 신공은 스스로 제주가 되어 중애를 저주한 신의 이름을 알고자 하였는데, 이때 무내숙녜가 금(琴)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공이 나하(儺河)의 물을 신전(神田)에 대려고 물길을 팠는데 도중에 큰 바위가 나타났다. 이때 무내숙녜를 불러 신에게 칼과 거울을 바쳐 기원하여 물길이 통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중애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미판황자(麛坂皇子)·인웅황자(忍熊皇子)가 반란을 일으키자, 무내숙녜는 기이수문(紀伊水門)에 이르러 화이신(和珥臣)의 조상인 무진웅(武振熊)과 함께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산배(山背), 토도(菟道, 宇治)를 지나 봉판(逢坂, 현재의 京都府과 滋賀縣의 경계에 있는 逢坂山)에서 인웅황자를 격파하였다고 한다.
신공(神功) 섭정 13년에는 태자와 함께 각록(角鹿)의 사반대신(笥飯大神, 현재의 福井縣 敦賀市 氣比神宮)에 참배하였고, 돌아온 후에 열린 연회에서는 태자를 대신하여 황후에 대한 답가를 지었다.
신공 섭정 47년에 신라와 백제 사이에 공물 문제가 발생하자, 신공이 신에게 누구를 보내면 좋을지를 물었는데 신이 무내숙녜에게 의논하도록 하여 결국 천웅장언(千熊長彦)을 파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응신(應神) 7년 9월에는 고구려인·백제인·임나인(任那人)·신라인 등을 이끌고 한인지(韓人池)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9년 4월에는 무내숙녜가 축자(筑紫)에 가 있는 사이에 동생인 감미내숙녜(甘美內宿禰)가 형을 무고하였고 신탁[探湯]을 행한 결과가 무내숙녜가 승리하였다고 한다.
인덕(仁德) 원년 1월에는 응신의 아들인 대초료존(大鷦鷯尊, 후의 仁德皇)과 무내숙녜의 아들인 평군목토숙녜(平群木菟宿禰)가 같은 날 태어났다. 이때 인덕의 산실에 부엉이[鷦鷯]가 날아들고, 목토의 산실에 굴뚝새[木菟]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새의 이름을 서로 교환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인덕 30년에 기러기가 차전제(茨田堤)에 알을 낳으므로, 인덕과 무내숙녜가 장생을 기리는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윤공(允恭) 5년조에는 무내숙녜의 무덤에 관한 전승이 남아 있다.
『고사기』에서는 허세신(許勢臣, 巨勢臣)·소아신(蘇我臣)·평군신(平群臣)·목신(木臣, 紀臣) 등 27씨족이 무내숙녜의 후예씨족이라고 하였다.
3. 편복신(蝙蝠臣)
소아전구신천굴(蘇我田口臣川堀)을 말한다.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에서는 편복(蝙蝠)의 일본어 훈이 ‘가하호리(加波保里)’라고 하였으므로, 천굴(川堀; 가하호리) 대신에 박쥐를 뜻하는 편복(가하호리)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대화(大化) 원년(645) 9월 무진조에 의하면, 고인황자(古人皇子)가 소아전구신천굴 등과 모반을 꾀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모반에 가담한 인물이므로 원래의 이름을 쓰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동음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4. 풍어식취옥희(豐御食炊屋姬)
『일본서기』추고천황(推古天皇) 즉위전기에 풍어식취옥희천황은 천국배개광정천황(天國排開廣庭天皇)의 딸이며 귤풍일천황(橘豐日天皇)의 동모매(同母妹)로 어릴 때는 액전부황녀(額田部皇女)로 불렸다고 하였다.
5. 일본기루(日本紀漏)
『일본서기』에 성을 내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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