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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거란족의 고려 정벌 계획

  • 날짜
    1010년 5월 (음)(大中祥符 3年(1010) 5월)
  • 출전
    卷73 大中祥符 3年(1010) 5월
이 달에 거란(요)의 소속부족인 남북대왕(南北大王),주 001
각주 001)
南北大王 : 거란(요)의 관직. 南院大王과 北院大王을 합쳐서 간략하게 줄인 말이다. 南院大王은 遼代北面官의 명칭이다. 南院은 六院部의 軍民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이었고, 南院大王은 이 관청의 長官이었다. 원래의 명칭은 南院夷離菫이었는데 會同 元年(938)에 南院大王으로 승격된 것이다. 그리고 北院大王 역시 遼代 北面官의 명칭이다. 北院은 五院部의 軍民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이었고, 北院大王은 이 관청의 長官이었다. 원래의 명칭은 北院夷離菫이었는데 會同 元年(938)에 北院大王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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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실(皮室),주 002
각주 002)
皮室 : 거란(요)의 군대 명칭으로 이에 대한 설명은 앞의 南北皮室 항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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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실(乙室),주 003
각주 003)
乙室 : 거란 遙輦氏 연맹 시기 8부족 가운데 한 부족의 명칭이다. 遼가 건국되면서 南府에 예속되었고, 乙室部의 軍民 사무를 관장하는 大王 등은 거란(요)의 서남쪽 지역에 주둔했다. 이후 거란(요)가 멸망할 때 金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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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필태사(頻畢太師),주 004
각주 004)
頻畢太師 :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遼史』의 「百官志」에서 北面軍官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頻必剋軍이라는 명칭이 한번 나온다. 이는 品部節度使의 侍衛軍인데, 品部는 부족의 명칭이다. 統和 연간에 品部를 이끄는 직함이 品部節度使로 바뀌었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頻畢太師가 品部節度使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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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奚),주 005
각주 005)
奚 : 민족의 명칭이다. 庫莫奚라고 칭하기도 한다. 北魏 시기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되고, 唐代와 五代에 걸쳐 활약했는데 거란과는 近族이다. 거란(요)이 흥기한 이후 奚를 정벌했는데, 奚王과 奚營 등의 이름과 조직을 그대로 남겨두고 여섯 절도사를 나누어 설치하여 奚의 여섯 부락을 통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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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위(室韋),주 006
각주 006)
室韋 : 민족의 명칭이다. 몽골계에 퉁구스계가 혼혈된 민족이다. 중국 南北朝시대인 6세기 중엽부터 唐代까지 중국 동북지방을 본거로 삼았다. 처음에는 興安嶺 산맥 동쪽에 있었으나 隋代에 점차 세력을 넓혀 唐代에는 그 영역이 黑龍江과 松花江의 합류점에서부터 몽골 고원의 突厥에 접하였다.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 돌궐이나 거란 등과 함께 중국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통일 국가를 건설하지 못했다. 唐代에 興安嶺 산맥 서쪽에 있던 蒙兀室韋의 후예가 칭기스칸이 나온 몽골 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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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여진(黑水女眞)주 007
각주 007)
黑水女眞 : 민족의 명칭이다. 黑水라고 부르기도 하고, 黑水靺鞨이라 칭하기도 한다. 北魏 시기에는 勿吉 7부족 중의 하나였다. 黑水(현재 흑룡강) 연안에 거주했기 때문에 黑水를 민족 명칭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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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전차 2천대를 동원하고, 유주에 병장기를 쌓아두어 장차 고려를 정벌하려 하여 그 신하 형포박(邢抱朴)주 008
각주 008)
邢抱朴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大臣으로 應州(현재 山西 應縣) 사람이다. 保寧 초기에 政事舍人 겸 知制誥가 되었고 이후 翰林學士로 승진했고 禮部侍郎이 더해졌다. 統和 4年(986)에는 戶部尙書가 더해지고 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統和 10年(992)에는 參知政事에 배수되었다. 밀린 獄事를 해결하고,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南院樞密使에까지 올랐다. 사망한 이후, 侍中을 추증받았다. 『遼史』 邢抱朴 열전 기록에는 그가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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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죽이고 유성(劉晟)주 009
각주 009)
劉晟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大臣으로 字는 愼行이며 河間 사람이다. 膳部員外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統和 연간에 三司使, 參知政事兼知南院樞密使事가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北府宰相, 監修國史에 이르렀다. 開泰 연간에는 都統이 되어 고려를 정벌하러 갔다가 실패하여 옥에 갇혔다. 이후에 사면되어 彰武軍節度使가 되었고, 太平 4年(1024)에는 順義軍節度使가 되었으며 이듬해(1025)에 遼興軍節度使가 되었다.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일찍 사망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출세했다. 『遼史』에는 劉晟과 형제인 劉景 열전에 劉晟의 아들이 모두 실려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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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러 정사를 맡겼으며 또 야율융경(耶律隆慶)주 010
각주 010)
隆慶 : 거란(요)의 황족. 야율융경으로, 거란(요) 聖宗의 동생이다. 자세한 설명은 앞의 贊 항목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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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렀다. 야율융경이 두 마음을 품어 피서를 이유로 사양하고 가지 않으면서 항상 병장기를 보수하고 심복을 보내 사적인 편지로 나라 안의 귀족들과 서로 사귀려 했다. 그 심복이 글을 써서 웅주(雄州)주 011
각주 011)
雄州 : 북송의 지명. 五代 後周 顯德 6年(959)에 설치했고, 위치는 현재 河北 雄縣이다. 북송 시기 관할 범위는 현재 河北 雄縣, 容城縣 지역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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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알리기를 그 군주(거란황제)가 친족들과 도탑게 화합하지 못하고 나라 사람들이 한을 생각한다고 보고했다. 황제께서 야율융경이 그러하려는 바를 알고 비밀리에 변방을 지키는 신하에게 그 의도를 저지하게 했다.

  • 각주 001)
    南北大王 : 거란(요)의 관직. 南院大王과 北院大王을 합쳐서 간략하게 줄인 말이다. 南院大王은 遼代北面官의 명칭이다. 南院은 六院部의 軍民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이었고, 南院大王은 이 관청의 長官이었다. 원래의 명칭은 南院夷離菫이었는데 會同 元年(938)에 南院大王으로 승격된 것이다. 그리고 北院大王 역시 遼代 北面官의 명칭이다. 北院은 五院部의 軍民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이었고, 北院大王은 이 관청의 長官이었다. 원래의 명칭은 北院夷離菫이었는데 會同 元年(938)에 北院大王으로 승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皮室 : 거란(요)의 군대 명칭으로 이에 대한 설명은 앞의 南北皮室 항목을 참고. 바로가기
  • 각주 003)
    乙室 : 거란 遙輦氏 연맹 시기 8부족 가운데 한 부족의 명칭이다. 遼가 건국되면서 南府에 예속되었고, 乙室部의 軍民 사무를 관장하는 大王 등은 거란(요)의 서남쪽 지역에 주둔했다. 이후 거란(요)가 멸망할 때 金에 항복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頻畢太師 :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遼史』의 「百官志」에서 北面軍官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頻必剋軍이라는 명칭이 한번 나온다. 이는 品部節度使의 侍衛軍인데, 品部는 부족의 명칭이다. 統和 연간에 品部를 이끄는 직함이 品部節度使로 바뀌었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頻畢太師가 品部節度使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奚 : 민족의 명칭이다. 庫莫奚라고 칭하기도 한다. 北魏 시기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되고, 唐代와 五代에 걸쳐 활약했는데 거란과는 近族이다. 거란(요)이 흥기한 이후 奚를 정벌했는데, 奚王과 奚營 등의 이름과 조직을 그대로 남겨두고 여섯 절도사를 나누어 설치하여 奚의 여섯 부락을 통치하게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室韋 : 민족의 명칭이다. 몽골계에 퉁구스계가 혼혈된 민족이다. 중국 南北朝시대인 6세기 중엽부터 唐代까지 중국 동북지방을 본거로 삼았다. 처음에는 興安嶺 산맥 동쪽에 있었으나 隋代에 점차 세력을 넓혀 唐代에는 그 영역이 黑龍江과 松花江의 합류점에서부터 몽골 고원의 突厥에 접하였다.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 돌궐이나 거란 등과 함께 중국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통일 국가를 건설하지 못했다. 唐代에 興安嶺 산맥 서쪽에 있던 蒙兀室韋의 후예가 칭기스칸이 나온 몽골 부족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黑水女眞 : 민족의 명칭이다. 黑水라고 부르기도 하고, 黑水靺鞨이라 칭하기도 한다. 北魏 시기에는 勿吉 7부족 중의 하나였다. 黑水(현재 흑룡강) 연안에 거주했기 때문에 黑水를 민족 명칭에 사용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邢抱朴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大臣으로 應州(현재 山西 應縣) 사람이다. 保寧 초기에 政事舍人 겸 知制誥가 되었고 이후 翰林學士로 승진했고 禮部侍郎이 더해졌다. 統和 4年(986)에는 戶部尙書가 더해지고 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統和 10年(992)에는 參知政事에 배수되었다. 밀린 獄事를 해결하고,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南院樞密使에까지 올랐다. 사망한 이후, 侍中을 추증받았다. 『遼史』 邢抱朴 열전 기록에는 그가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劉晟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大臣으로 字는 愼行이며 河間 사람이다. 膳部員外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統和 연간에 三司使, 參知政事兼知南院樞密使事가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北府宰相, 監修國史에 이르렀다. 開泰 연간에는 都統이 되어 고려를 정벌하러 갔다가 실패하여 옥에 갇혔다. 이후에 사면되어 彰武軍節度使가 되었고, 太平 4年(1024)에는 順義軍節度使가 되었으며 이듬해(1025)에 遼興軍節度使가 되었다.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일찍 사망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출세했다. 『遼史』에는 劉晟과 형제인 劉景 열전에 劉晟의 아들이 모두 실려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隆慶 : 거란(요)의 황족. 야율융경으로, 거란(요) 聖宗의 동생이다. 자세한 설명은 앞의 贊 항목을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1)
    雄州 : 북송의 지명. 五代 後周 顯德 6年(959)에 설치했고, 위치는 현재 河北 雄縣이다. 북송 시기 관할 범위는 현재 河北 雄縣, 容城縣 지역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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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의 고려 정벌 계획 자료번호 : jt.k_0003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