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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4-2-4 미쓰이 미이케탄광

중국인 진계명(陳桂明) | 1944년 포로가 되어 미이케탄광에 연행
 
1944년 봄 허베이성 슈스이현(徐水縣) 자택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톈진(天津)의 탕구소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 후 화물선에 태워져 미쓰이 미이케탄광에 연행되었습니다. 탄광에서는 갱내의 갱도에 돌을 쌓아올려 천장을 지탱하는 일을 했습니다. 1945년 3월 경 천장 판 등이 떨어져 오른 손 검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쉬는 날도 없었고 배가 고팠습니다. 절망감에 전기코드로 자살하려고 했지만 동료가 막았습니다. 귀향 후에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고생을 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하여 함께 가는 아시아의 역사를-중국인강제노동사건의 진실(過ちを認め、償い、共に歩むアジアの歴史を-中国人強制労働事件の真実)』, 中国人強制労働事件福岡訴訟原告弁護団, 2001
 
중국인 류천(劉千) | 1944년 포로가 되어 미이케탄광에 연행
 
1944년 봄 허베이성 라이슈이현(淶水縣)에서 강제노동을 명령받고 화물 열차로 톈진의 탕구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2개월 후 화물선에 실려 미이케탄광 미야우라갱으로 연행되었습니다. 수용소는 널빤지로 둘러싸였으며 보초를 세워 감시했습니다. 속옷(훈도시)만 입고 채탄을 해야 했습니다. 노무 감독은 중국인을 멸시하는 호칭으로 부르고, ‘바보(バカヤロ)’ ‘죽어죽어(スラ、スラ)’라고 위협하며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감독이 오른 쪽 다리를 도끼로 때려서 오른쪽 대퇴골이 골절되었습니다. 마취도 없이 수술을 받았습니다. 뼈는 변형된 채 붙었고, 귀국 후에도 일을 할 수 없어 괴로웠습니다.
 
2001년 9월 류천 씨는 중국인 강제노동 사건 후쿠오카 소송의 원고로 참여해 일본을 방문하여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였습니다. 재판에서 보여준 변형된 채 굳어버린 뼈 엑스선 사진은 미이케탄광의 폭력에 의한 강제노동의 가혹한 실태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하여 함께 가는 아시아의 역사를-중국인강제노동사건의 진실(過ちを認め、償い、共に歩むアジアの歴史を-中国人強制労働事件の真実)』, 中国人強制労働事件福岡訴訟原告弁護団, 2001
 
중국인 류준서(劉俊書) | 1944년 포로가 되어 미이케탄광에 연행
 
류준서 씨는 허베이성 지쩌현(雞澤) 출신으로 17세 중국 팔로군에 참가했습니다. 1944년 11월 일본군의 소탕작전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한단(邯鄲)을 거쳐 탕구에 보내졌습니다. 탕구수용소에서 배에 태워졌는데 매일같이 죽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일본인들은 사망자를 바다에 버렸습니다. 모지항에 내려 미이케의 만다(万田)갱으로 연행되었고, 대대, 중대, 소대로 편성되어 번호로 불렸습니다. 그 후 요츠야마(四山)갱으로 보내졌습니다. 사고가 일어나 사망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패전한 사실은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10월에 미군의 배로 귀국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일본 강제연행 중국노동자 구술사2(二戦擄日中国労工口述史2)』, 斎魯書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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