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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난파조정에서 하이와 백제의 사신에게 향응을 베풂

가을 7월 기사삭 기묘(11일)에 난파 조정에서 북(北)[北은 월(越;코시)이다주 001
번역주 001)
‘越’은 北陸 방면을 가리킨다. 天武朝 이후에는 越前, 越中, 越後로 나뉜다. 養老 2년(718)에 越前國에서 能登國이 분리되었고, 弘仁 4년(813)에는 越前國에서 江沼郡과 加賀鮶이 분리되어 加賀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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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蝦夷)주 002
번역주 002)
원래 東國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日本書紀』 景行天皇 27년 2월조 蝦夷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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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명, 동(東)[東은 육오(陸奧;미치노쿠)이다주 003
번역주 003)
율령제의 陸奥國이다. 『古事記』에서는 道奥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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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95명에게 향응을 베풀었다. 아울러 백제의 조사(調使) 150명에게 향응을 베풀었다주 004
번역주 004)
뒤의 제명천황 원년 시세조의 분주에서는 ‘백제에서 대사 등 1백여 명이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라와 대립하고 있던 백제가 대규모 사절단을 연달아 파견한 것은 왜국과의 관계를 중시한 데 그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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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책양(柵養;키카후)주 005
번역주 005)
책양하이는 柵造의 지휘를 받는 하이를 의미한다. 柵은 ‘키’로 훈독되는데, 키는 城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키는 일반적으로 시설의 바깥을 둘러싼 방어시설을 가리키므로 防壘, 木柵, 濠 등 방어적인 기능을 보유한 것을 의미한다. 주위에 목책을 두른 시설인 정족책과 반주책에는 책을 지키는 병사인 柵戶와 재지의 주민인 柵養의 하이 그리고 그들을 통할하는 柵造가 있었다. 근래 발굴을 통해 책의 구조가 밝혀졌다. 1980년대부터 계속 발굴된 仙臺 郡山유적은 仙臺평야 중앙의 宮城縣 仙臺市에 있는데, 7세기 중엽에서 8세기 초까지 사용된 지방관아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1기와 2기로 구분되는데, 7세기 중엽의 1기 관아유적은 동서 약 300m이고 남북 600m 정도이다. 면적은 0.18km2에 달한다. 1기 관아유적에는 掘立柱 건물지, 목재로 두른 작은 담인 材木列塀과 목판을 두른 담인 板塀으로 구획되어 있어 책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이 사용된 시기가 월 지역의 정족책, 반주책 설치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유적은 정족책, 반주책에 대응하여 陸奧 지역에 설치되었던 책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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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9명, 진예(津刈;츠가루)주 006
번역주 006)
津刈는 奧羽의 동해쪽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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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6명에게 관위 각각 2계를 주었다주 007
번역주 007)
齊明紀에는 하이 관계 기사가 많이 보인다. 특히 제명천황 4년(658) 4월부터 제명천황 6년(660) 3월까지 阿倍臣이 하이와 숙신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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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越’은 北陸 방면을 가리킨다. 天武朝 이후에는 越前, 越中, 越後로 나뉜다. 養老 2년(718)에 越前國에서 能登國이 분리되었고, 弘仁 4년(813)에는 越前國에서 江沼郡과 加賀鮶이 분리되어 加賀國이 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원래 東國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日本書紀』 景行天皇 27년 2월조 蝦夷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3)
    율령제의 陸奥國이다. 『古事記』에서는 道奥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뒤의 제명천황 원년 시세조의 분주에서는 ‘백제에서 대사 등 1백여 명이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라와 대립하고 있던 백제가 대규모 사절단을 연달아 파견한 것은 왜국과의 관계를 중시한 데 그 원인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책양하이는 柵造의 지휘를 받는 하이를 의미한다. 柵은 ‘키’로 훈독되는데, 키는 城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키는 일반적으로 시설의 바깥을 둘러싼 방어시설을 가리키므로 防壘, 木柵, 濠 등 방어적인 기능을 보유한 것을 의미한다. 주위에 목책을 두른 시설인 정족책과 반주책에는 책을 지키는 병사인 柵戶와 재지의 주민인 柵養의 하이 그리고 그들을 통할하는 柵造가 있었다. 근래 발굴을 통해 책의 구조가 밝혀졌다. 1980년대부터 계속 발굴된 仙臺 郡山유적은 仙臺평야 중앙의 宮城縣 仙臺市에 있는데, 7세기 중엽에서 8세기 초까지 사용된 지방관아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1기와 2기로 구분되는데, 7세기 중엽의 1기 관아유적은 동서 약 300m이고 남북 600m 정도이다. 면적은 0.18km2에 달한다. 1기 관아유적에는 掘立柱 건물지, 목재로 두른 작은 담인 材木列塀과 목판을 두른 담인 板塀으로 구획되어 있어 책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이 사용된 시기가 월 지역의 정족책, 반주책 설치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유적은 정족책, 반주책에 대응하여 陸奧 지역에 설치되었던 책으로 추정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津刈는 奧羽의 동해쪽 지역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齊明紀에는 하이 관계 기사가 많이 보인다. 특히 제명천황 4년(658) 4월부터 제명천황 6년(660) 3월까지 阿倍臣이 하이와 숙신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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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조정에서 하이와 백제의 사신에게 향응을 베풂 자료번호 : ns.k_0040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