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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夫餘國)

부여국은 현도군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와, 동쪽으로 읍루와, 서쪽으로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주 001
번역주 001)
약수: 嫩江으로 보는 설(白鳥庫吉, 1970)과 黑龍江으로 보는 설(井上秀雄, 1974; 張博泉, 1998)이 있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 營州 柳城縣 동쪽에 饒樂水가 있는데,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北史』에서 “登國 3년 道武가 친히 庫莫奚를 토벌하여 弱水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魏書』, 「太祖紀」에서 “弱落水를 건넜다.”고 하였고, 「蠕蠕傳」에서 “북쪽으로 弱洛水를 넘었다.”고 하였다. 즉 弱水는 省文(글자나 문구를 생략한 것)이다. 『唐書』, 「北狄傳」에서 “太宗이 奚의 족장 可度를 內附로 삼아 饒都督府를 두었고, 阿會部를 弱水州로 삼았으며, 奧失部를 洛瓖州로 삼았다.”고 하였다. 『通典』에서 말하길, 『庫典』에서 “庫莫奚를 5부로 나누고, 饒樂水의 북쪽을 다스리는데, 즉 鮮卑의 옛 땅으로 일명 洛瓖水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는] 饒樂의 잘못된 글자로서, 네 개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니, 그것들은 실은 하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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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주 002
번역주 002)
부여의 지리: 大黑山山脈을 경계로 동쪽은 낮은 구릉성 산악 지형이고, 서쪽은 넓은 평원이다. 수계를 살펴보면, 남쪽에는 남북으로 북류 松花江이 흐르고, 서쪽에는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嫩江이 흐른다. 두 강이 합류하여 동류 松花江을 이루는데, 동쪽으로 흐르다 三江平原 일대에서 黑龍江과 합류한다. 이들 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류와 호수가 형성되어 있고, 주변에 넓은 충적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농업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었다(이종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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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은 사방 2천 리로, 본래 예의 땅이었다
옛적에 북이 색리국주 003
번역주 003)
색리국: 『論衡』에는 橐離, 『魏略』에는 槀離(高離, 豪離), 『三國志』에는 高離, 『搜神記』에는 槀離, 『梁書』에는 橐離, 『法苑珠林』에는 寧禀離, 『翰苑』, 「부여전」에는 橐離로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嫩江 하류의 松嫩平原說(李建才, 1982; 張博泉, 1998), 동류 松花江 중류의 把彦說(王禹浪·李彦君, 200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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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왕이 출행하였는데주 004
번역주 004)
原註 ‘索’ 혹은 ‘橐’로 되어 있다. 음은 ‘度’과 ‘洛’의 반음이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論衡』, 「古驗」편에 ‘㯻離’로 되어 있다. 『晋書』에서는 禆離國이 있다. 肅愼에서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 200일이 걸린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곳을 말하는 것 같다. 『隋書』에서는 이를 高麗라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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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녀가 이후에 임신하자,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주 005
번역주 005)
이하의 東明神話: 『논형』(권2, 「吉驗」 篇)에 처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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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녀가 말하였다. “전에 하늘 위를 보니 기운이 있었는데, 큰 달걀 같았습니다. 저에게 내려와서 임신하였습니다.” 왕이 그녀를 가두었는데, 이후에 [시녀가]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두도록 명하였는데주 006
번역주 006)
原註 ‘牢’는 ‘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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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가 입으로 기운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겼는데주 007
번역주 007)
原註 ‘蘭’은 즉 ‘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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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은 신이(神異)하다고 여기고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동명이라고 이름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자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사수주 008
번역주 008)
『論衡』에는 掩㴲水, 『魏略』에는 施掩水, 『梁書』에는 淹滯水, 『隋書』에는 淹水, 「扶餘隆墓誌」에는 㴲水 등으로 나온다. 嫩江, 松花江 또는 그 지류로 추정된다(國史編纂委員會, 1987).
原註 지금 高麗 땅에 蓋斯水가 있는데, 아마도 이 강을 말하는 것 같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라고 썼다.”고 하였다. 沈欽韓은 “『魏志』의 注에서 施掩水라고 썼고, 『隋書』, 「百濟傳」에서는 掩水라고 썼으며, 이에 대한 注에서는 蓋斯水로 썼는데, 이는 곧 『漢書』, 「地理志·玄菟郡」條의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써 지금의 鴨淥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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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 위에 떠올라 모였으므로, 동명이 그것을 타고 [엄사수를] 건널 수가 있었다주 009
번역주 009)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魏略』에 의하면, 물고기가 드러내고,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서 東明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는 이내 해산하여 추격병은 건널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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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부여는]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고, 토지는 오곡을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명마와 적옥, 담비와 놜(豽)주 010
번역주 010)
놜: 『三國志』 부여전에는 狖로 나온다.
原註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다. 음은 ‘奴’와 ‘八’의 반음이다. 集解: 洪頤煊이 말하길, “『爾雅』,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고 했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豽로 적었다고 한다.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다고 하였다. 여기서[후한서]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은 짐승이 아니다. 『說文』에서는 貁는 쥐에 속하는 부류인데, 도는 것을 잘 한다고 했다.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소리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어,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와전되어 注한 것이 잘못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東夷考略』에서 長白山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에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서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룬다. 호수 안에서 東珠가 나오니, 귀한 것은 천금이나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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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죽], 대추만한 큰 구슬이 생산된다. 둥근 책을 성으로 삼고주 011
번역주 011)
以員柵爲城: 『三國志』, 「부여전」에서는 “作城栅皆員.”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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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실·창고· 뇌옥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신체가 크고, 굳건하고 용감하며, 근엄하고 후덕해 노략질하지 않는다.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삼는다.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삼으니, 마가·우가· 구가가 있다. 읍락들은 제가(諸加)에 복속되어 있다. 먹고 마시는 데 조두주 012
번역주 012)
조두: 中國 吉林省 吉林을 중심으로 출토된 豆形土器 혹은 굽다리접시가 주목된다. 나팔형의 손잡이에 완이 올려진 형태로 초기 철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吉林市 일대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고, 주변으로 갈수록 수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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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하고, 회동하여 배작세작(拜爵洗爵)할 때는 예를 갖추어 오르내린다주 013
번역주 013)
拜爵洗爵: 『禮記』 鄉飲酒之義. “主人拜迎賓于庠門之外 入 三揖而後至階 三讓而後升 所以致尊讓也 盥洗揚觶 所以致潔也 拜至 拜洗 拜受 拜送 拜既 所以致敬也.”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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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월(臘月: 음력 12월)주 014
번역주 014)
납월: 『三國志』, 「부여전」에서는 ‘殷正月’로 나온다. 음력 12월의 祭天은 수렵사회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풀이된다(梁在淵,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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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늘에 제사하여 크게 모인다. [이날]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고라고 이름한다주 015
번역주 015)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天中記』와 謝承의 『後漢書』에 의하면, 東夷와 三韓의 풍속에서는 臘日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서 세간에서 臘鼓가 울면 봄풀이 자라난다고 하며, 『㓝楚歲時記』에 의하면, 12월 8일을 臘日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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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형옥을 시행하고, 죄수를 풀어준다. 전쟁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하는데, 소를 죽여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친다주 016
번역주 016)
原註 『三國志』, 「魏志」에서 “소의 발굽이 벌어진 것을 흉하다 여기고, 붙은 것을 길하다 여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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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인은 밤낮없이 노래 부르고 읊조리기를 좋아해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습속은 형벌의 운용에 매우 엄격하다. 사형 죄수는 모두 그 가족을 몰수해서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하나에 열두 배의 책임을 묻는다. 남녀가 음행(淫行)하면 모두 죽이지만, 특히 투기한 부인을 죄악으로 다스려 죽인 다음에 산 위에다가 시신을 둔다주 017
번역주 017)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北史』에 의하면, 豆莫婁國은 勿吉의 북쪽 천 리에 있는데, 옛 北夫餘이다. 습속이 투기하는 것을 더욱 싫어해서 죽인 시신을 나라의 남쪽 산속에 [내버려두어] 썩게 하고, 그 여자의 집에서 소와 말을 바치면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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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죽으면 곽을 사용하고, 관은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으면 백 명을 헤아린다주 018
번역주 018)
순장: 사후를 현세의 연장으로 보는 繼世思想에서 비롯되었다(邊太燮,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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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왕의 장사에는 옥갑(玉匣)주 019
번역주 019)
옥갑: 前漢 文·景帝代 처음 사용된 최고급의 장례복식이었다. 옥은 예로부터 시신을 썩지 않게 보존할 수 있는 효능이 있다고 여겨졌다. 옥으로 시신을 감싸도록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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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용하는데, 한나라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현도군주 020
번역주 020)
原註 集解: 王先謙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에 의하면, 公孫淵이 주살된 뒤에도 玄菟郡의 창고에는 玉匣 한 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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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맡겨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부여에서는 옥갑을] 가져다가 장사 지냈다.
건무 연간(25~56)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공헌하고 알현하였다. 건무 25년(49)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주 021
번역주 021)
『後漢書』 권1 下, 「光武帝紀」 1 下 〈建武 25年〉(49)조 冬10月. “夫餘王遣使奉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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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제(재위: 25~57)가 후히 보답하였다. 이때부터 사신이 해마다 통하였다. 안제 영초 5년(109)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주 022
번역주 022)
원문의 始: 부여의 왕명으로 보기도 한다(千寬宇,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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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과 기병 7천~ 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군을 노략질해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다주 023
번역주 023)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5年〉(111) 3月. “夫餘夷犯塞 殺傷吏人.” 참조. 이때의 樂浪을 玄菟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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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에 다시 귀부하였다. 영령 원년(120)에 부여왕이 사자(嗣子) 위구태를 보내 궁궐에 와서 공헌하였다주 024
번역주 024)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延光 元年〉(122) 春2月.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驪·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3, 〈태조왕 69년〉(121) 12월.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3, 〈태조왕 70년〉(122).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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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순제 영화 원년(136)에 그 왕이 경사(京師)에 와서 입조하였다주 025
번역주 025)
『後漢書』 권6, 「孝順孝沖孝質帝紀」 6, 〈永和 元年〉(136) 春正月. “夫餘王來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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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戲)를 열어주고 보냈다. 환제 연희 4년(161)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조하하고, 공헌하였다주 026
번역주 026)
『後漢書』 권7, 「孝桓帝紀」 7, 〈延熙 4年〉(161) 12月. “夫餘王遣使來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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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강 원년(167)에 부여왕 부태가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노략질하였다. 현도태수 공손역이 그를 격파하여 천여 급을 참수했다주 027
번역주 027)
『後漢書』 권7, 「孝桓帝紀」 7, 〈永康 元年〉(167) 春正月. “夫餘王寇玄菟 太守公孫域與戰 破之.”; 『三國志』 권8, 「魏書」8 二公孫陶四張傳. “公孫度字升濟 本遼東襄平人也 度父延 避吏居玄菟 任度爲郡吏 時玄菟太守公孫琙.” 참조.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東觀記』와 『三國志』, 「魏志」 〈公孫度傳〉은 모두 ‘琙’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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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제 희평 3년(174)에 이르러 부여왕이 다시 장(章)을 올리고 공헌하였다주 028
번역주 028)
『後漢書』 권8, 「孝靈帝紀」 8, 〈熹平 3年〉(174) 春正月. “夫餘國遣使貢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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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으나, 헌제(재위: 189~220) 때에 그 왕이 요동군에 속하기를 구하였다고 한다.

  • 번역주 001)
    약수: 嫩江으로 보는 설(白鳥庫吉, 1970)과 黑龍江으로 보는 설(井上秀雄, 1974; 張博泉, 1998)이 있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 營州 柳城縣 동쪽에 饒樂水가 있는데,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北史』에서 “登國 3년 道武가 친히 庫莫奚를 토벌하여 弱水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魏書』, 「太祖紀」에서 “弱落水를 건넜다.”고 하였고, 「蠕蠕傳」에서 “북쪽으로 弱洛水를 넘었다.”고 하였다. 즉 弱水는 省文(글자나 문구를 생략한 것)이다. 『唐書』, 「北狄傳」에서 “太宗이 奚의 족장 可度를 內附로 삼아 饒都督府를 두었고, 阿會部를 弱水州로 삼았으며, 奧失部를 洛瓖州로 삼았다.”고 하였다. 『通典』에서 말하길, 『庫典』에서 “庫莫奚를 5부로 나누고, 饒樂水의 북쪽을 다스리는데, 즉 鮮卑의 옛 땅으로 일명 洛瓖水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는] 饒樂의 잘못된 글자로서, 네 개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니, 그것들은 실은 하나를 말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부여의 지리: 大黑山山脈을 경계로 동쪽은 낮은 구릉성 산악 지형이고, 서쪽은 넓은 평원이다. 수계를 살펴보면, 남쪽에는 남북으로 북류 松花江이 흐르고, 서쪽에는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嫩江이 흐른다. 두 강이 합류하여 동류 松花江을 이루는데, 동쪽으로 흐르다 三江平原 일대에서 黑龍江과 합류한다. 이들 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류와 호수가 형성되어 있고, 주변에 넓은 충적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농업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었다(이종수, 2004).바로가기
  • 번역주 003)
    색리국: 『論衡』에는 橐離, 『魏略』에는 槀離(高離, 豪離), 『三國志』에는 高離, 『搜神記』에는 槀離, 『梁書』에는 橐離, 『法苑珠林』에는 寧禀離, 『翰苑』, 「부여전」에는 橐離로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嫩江 하류의 松嫩平原說(李建才, 1982; 張博泉, 1998), 동류 松花江 중류의 把彦說(王禹浪·李彦君, 2003)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原註 ‘索’ 혹은 ‘橐’로 되어 있다. 음은 ‘度’과 ‘洛’의 반음이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論衡』, 「古驗」편에 ‘㯻離’로 되어 있다. 『晋書』에서는 禆離國이 있다. 肅愼에서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 200일이 걸린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곳을 말하는 것 같다. 『隋書』에서는 이를 高麗라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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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의 東明神話: 『논형』(권2, 「吉驗」 篇)에 처음 보인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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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牢’는 ‘圈’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原註 ‘蘭’은 즉 ‘欄’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論衡』에는 掩㴲水, 『魏略』에는 施掩水, 『梁書』에는 淹滯水, 『隋書』에는 淹水, 「扶餘隆墓誌」에는 㴲水 등으로 나온다. 嫩江, 松花江 또는 그 지류로 추정된다(國史編纂委員會, 1987).
    原註 지금 高麗 땅에 蓋斯水가 있는데, 아마도 이 강을 말하는 것 같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라고 썼다.”고 하였다. 沈欽韓은 “『魏志』의 注에서 施掩水라고 썼고, 『隋書』, 「百濟傳」에서는 掩水라고 썼으며, 이에 대한 注에서는 蓋斯水로 썼는데, 이는 곧 『漢書』, 「地理志·玄菟郡」條의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써 지금의 鴨淥江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魏略』에 의하면, 물고기가 드러내고,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서 東明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는 이내 해산하여 추격병은 건널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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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놜: 『三國志』 부여전에는 狖로 나온다.
    原註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다. 음은 ‘奴’와 ‘八’의 반음이다. 集解: 洪頤煊이 말하길, “『爾雅』,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고 했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豽로 적었다고 한다.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다고 하였다. 여기서[후한서]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은 짐승이 아니다. 『說文』에서는 貁는 쥐에 속하는 부류인데, 도는 것을 잘 한다고 했다.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소리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어,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와전되어 注한 것이 잘못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東夷考略』에서 長白山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에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서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룬다. 호수 안에서 東珠가 나오니, 귀한 것은 천금이나 한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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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員柵爲城: 『三國志』, 「부여전」에서는 “作城栅皆員.”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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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두: 中國 吉林省 吉林을 중심으로 출토된 豆形土器 혹은 굽다리접시가 주목된다. 나팔형의 손잡이에 완이 올려진 형태로 초기 철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吉林市 일대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고, 주변으로 갈수록 수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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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拜爵洗爵: 『禮記』 鄉飲酒之義. “主人拜迎賓于庠門之外 入 三揖而後至階 三讓而後升 所以致尊讓也 盥洗揚觶 所以致潔也 拜至 拜洗 拜受 拜送 拜既 所以致敬也.” 참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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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월: 『三國志』, 「부여전」에서는 ‘殷正月’로 나온다. 음력 12월의 祭天은 수렵사회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풀이된다(梁在淵, 1979).바로가기
  • 번역주 015)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天中記』와 謝承의 『後漢書』에 의하면, 東夷와 三韓의 풍속에서는 臘日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서 세간에서 臘鼓가 울면 봄풀이 자라난다고 하며, 『㓝楚歲時記』에 의하면, 12월 8일을 臘日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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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三國志』, 「魏志」에서 “소의 발굽이 벌어진 것을 흉하다 여기고, 붙은 것을 길하다 여긴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北史』에 의하면, 豆莫婁國은 勿吉의 북쪽 천 리에 있는데, 옛 北夫餘이다. 습속이 투기하는 것을 더욱 싫어해서 죽인 시신을 나라의 남쪽 산속에 [내버려두어] 썩게 하고, 그 여자의 집에서 소와 말을 바치면 내어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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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장: 사후를 현세의 연장으로 보는 繼世思想에서 비롯되었다(邊太燮, 1958).바로가기
  • 번역주 019)
    옥갑: 前漢 文·景帝代 처음 사용된 최고급의 장례복식이었다. 옥은 예로부터 시신을 썩지 않게 보존할 수 있는 효능이 있다고 여겨졌다. 옥으로 시신을 감싸도록 제작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原註 集解: 王先謙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에 의하면, 公孫淵이 주살된 뒤에도 玄菟郡의 창고에는 玉匣 한 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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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書』 권1 下, 「光武帝紀」 1 下 〈建武 25年〉(49)조 冬10月. “夫餘王遣使奉獻.”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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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始: 부여의 왕명으로 보기도 한다(千寬宇, 1982).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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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5年〉(111) 3月. “夫餘夷犯塞 殺傷吏人.” 참조. 이때의 樂浪을 玄菟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李丙燾, 1976).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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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延光 元年〉(122) 春2月.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驪·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3, 〈태조왕 69년〉(121) 12월.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3, 〈태조왕 70년〉(122).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25)
    『後漢書』 권6, 「孝順孝沖孝質帝紀」 6, 〈永和 元年〉(136) 春正月. “夫餘王來朝.”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26)
    『後漢書』 권7, 「孝桓帝紀」 7, 〈延熙 4年〉(161) 12月. “夫餘王遣使來獻.”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27)
    『後漢書』 권7, 「孝桓帝紀」 7, 〈永康 元年〉(167) 春正月. “夫餘王寇玄菟 太守公孫域與戰 破之.”; 『三國志』 권8, 「魏書」8 二公孫陶四張傳. “公孫度字升濟 本遼東襄平人也 度父延 避吏居玄菟 任度爲郡吏 時玄菟太守公孫琙.” 참조.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東觀記』와 『三國志』, 「魏志」 〈公孫度傳〉은 모두 ‘琙’으로 쓰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後漢書』 권8, 「孝靈帝紀」 8, 〈熹平 3年〉(174) 春正月. “夫餘國遣使貢獻.”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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