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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용수산성

龍首山城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요금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요원시 동구 동부(吉林省 遼源市 東歐 東部)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1,100m
입지
동요하에 인접한 용수산에 위치
유적개관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우며, 토축으로 성의 기저부는 폭 7m, 높이는 2m 내외이다. 북쪽과 서쪽에 문지가 있으며, 성 네 모서리에 각루의 흔적이 확인된다. 서벽 근처에 저수시설 2개소가 있다. 현재 대부분 파괴되었다.
유물개관
토기, 철기, 문자부호가 새겨진 기와, 연화문와당, 문확 등
참고문헌
「考古」1994-3
해설
요원지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휘발하 일대를 거쳐 요하 상류방면으로 나아갈 때 거쳐야 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이다.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과 대흑산맥(大黑山脈) 사이에 위치한 분지로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서북방면으로는 동요하(東遼河)가 흐르고, 동북방면은 이통하(伊通河), 동남방면은 휘발하(輝發河), 서남방면은 구하(寇河)와 각각 분수령을 이루면서 여러 지류가 발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각 수계를 이어주는 교통로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용수산성은 요원시 동쪽 용수산 위에 있는데, 산성의 동·남·서 3면은 지세가 광활하고 북쪽면은 기복이 심한 산간지대와 연결된다. 산성 남쪽으로는 동요하가 동서 방향으로 흐르며 동쪽에는 동요하의 지류인 위진하(渭津河)가 흐른다. 산성의 동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곳에는 성자산산성이, 2km 가량 떨어진 곳에는 공농산성이 각각 강을 사이에 두고 용수산성과 마주보고 있어 상호 대응하는 방어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산성 내부는 요원시박물관과 공원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성벽 일부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산성은 1950년대 발견되었고, 1983년에 서남모서리에서 연화문와당이 발견된 후, 간헐적으로 유물이 수습되었다. 1990년부터 요원시문물관리소가 문지를 포함한 성 내부를 여러 차례 시굴, 조사하였다.
성벽은 산세의 지형을 따라 흙을 다져 쌓았다. 평면형태는 거의 타원형에 가깝고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006m이며, 동벽 300m, 서벽 290m, 남벽 286m, 북벽 130m이다. 총 서벽 정상부의 폭은 1.5m, 성벽 기저부의 폭은 7m, 높이는 2m 정도이다. 성의 네 모서리에서 각루(角樓)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반원형의 동북 모서리 각루는 그 크기가 직경 8m, 잔고 6m이다.
성 안쪽은 동북, 서북, 동남의 세 모서리 지역의 지형이 비교적 높고, 서쪽 중부와 서남쪽 모서리 지역이 비교적 완만한데 이곳에 서문이 설치되어 있다. 북벽에도 문이 하나 있다. 북문은 서북쪽 성루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폭은 7m이고, 높이는 4.5m이다. 서문은 서벽 중부에 위치하며, 문의 폭은 6m, 높이는 4m이다.
동벽과 북벽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서문 안쪽으로는 연못과 저수시설이 있다. 북쪽의 저수시설은 평면형태 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18m이며, 남쪽 저수시설은 장방형으로 길이 15m, 폭 10m이다. 두 저수시설에 저장된 물은 서벽을 통해 직접 바깥쪽으로 배출된다. 이 밖에도 성 내에서 6기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연화문와당을 비롯하여 다량의 고구려 기와가 있다. 토기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고구려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로는 심발, 옹, 부형 토기, 시루, 반, 동이 및 호자, 양이부호 등의 기종이 확인되었다. 토기의 소성 온도가 높아, 경도가 높다. 이 밖에도 산성의 서남부 산기슭에서 철제 슬래그가 다량으로 수습되었다고 한다.
출토 유물과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면, 용수산성은 고구려가 길림 지역의 부여를 병합한 이후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근의 다른 고구려 산성, 성자산산성과 공농산성과 달리 다량의 기와가 수습되어, 용수산성이 요원 일대를 관할하던 치소성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보고자는 산성에서 출토된 말갈계통의 이중구연 심발이나 연화문와당의 형태적 특성 등을 발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용수산성은 고구려 후기에 축조되어 발해 초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성 내부에서 요금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뒷 시기에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명말에는 여진 엽혁부(葉赫部)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웅거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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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수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4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