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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東沃沮)의 문화와 역사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주 001
번역주 001)
原註 蓋馬는 縣의 명칭이며, 玄菟郡에 속하였다. 그 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는데, 平壤은 곧 王險城이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기를, “明志(明史 地理志)에서 ‘海州衛는 본래 沃沮國 땅이다. 지금의 奉天 海城縣이다. 또한 奉天 蓋平縣은 高麗國 蓋牟城이다. 역시 그 땅에 해당한다.’고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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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은 큰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 남쪽으로 예맥과 잇닿아 있다. 그 지형은 동서는 좁고, 남북으로 길다주 002
번역주 002)
그 지형은 ~ 길다: 『삼국지』에서는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東北夾西南長).”라고 기술하였다.
原註 夾의 음은 狹이다. 集解: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三國志 魏書)에서 지형은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 길다.’고 이르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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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 가히 1천 리쯤 된다.
토지는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고 농사를 잘 지으며, 읍락마다 장수가 있다. 사람들의 성격이 질박하고 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손에 쥐고 걷거나 뛰면서 싸우는 데에 능하다. 언어와 음식, 거처, 의복은 구려와 거의 비슷하였다. 장례를 치를 때에 큰 목곽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고 한쪽 끝을 열어 놓아 문을 만들었다. 새로 죽은 자가 있으면, 먼저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가죽과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이에 뼈를 취하여 목곽 안에 놓아두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하나의 목곽을 쓰며, 나무에 생전의 모습을 새겼는데, 죽은 사람의 수대로 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후에 이맥(夷貊: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주 003
번역주 003)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三國志 魏書)에서 ‘지금의 元莬 옛 府이다.’라고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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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옥저를 현(縣)으로 삼고 낙랑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주 004
번역주 004)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前志(漢書 地理志)에서 東部都尉의 치소는 不而縣이라고 하였고, 魏志(三國志 魏書)에 不耐城으로 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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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주 005
번역주 005)
原註 沈欽韓이 말하기를, “沃沮는 魏代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百濟가 나라를 그곳에 세우고 沃沮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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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라의 영토는 좁고 작았으며,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어 마침내 구려에 복속되었다. 구려는 다시 그 [지역 인물] 중에 대인을 뽑아 사자로 삼고 [토착 거수와] 서로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주 006
번역주 006)
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 以相監領: 『삼국지』에는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으로 되어 있다.
原註 何焯이 말하기를, “魏志(三國志 魏書)와 비교하면, ‘遂’자가 빠졌다.”고 하였다. 先謙이 말하기를, “官本은 더불어 ‘監’자를 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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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조세로서 담비가죽주 007
번역주 007)
담비가죽(貂布): 『삼국지』에는 「貊布」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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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선, 소금, 해초류를 부과하였고, 미녀를 징발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다주 008
번역주 008)
發美女爲婢妾焉: 『삼국지』에는 「送其美女, 以爲婢妾, 遇之如奴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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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고 부른다. 남옥저로부터 거리가 800여 리였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경계의 남쪽주 009
번역주 009)
남쪽: 원문에는 「南」으로 되어 있지만, 읍루는 두만강 이북의 동만주 일대 및 연해주 南端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때의 「南」은 「北」의 오식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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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읍루와 잇닿아 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였다. [북옥저는] 해마다 여름철이면 곧 바위굴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이르러 [얼음이 얼어] 뱃길이 막히면 이에 내려와 읍락에 거처하였다. 그 기로들이 말하기를, “일찍이 바다에서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신체에 마치 중국인과 같은 옷을 입었고, 그 양 소매의 길이가 3장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해안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배에 탄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목덜미에 다시 얼굴이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한 “바다 가운데 남자가 없고 여자만이 사는 나라가 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그 나라에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는데, 그것을 들여다보면, 곧 아들을 낳는다.’라고 일렀다.”고 말하였다주 010
번역주 010)
또한 “바다 가운데 ~ 일렀다.”고 말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지』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神井信仰과 관련이 깊다. 신령스런 우물을 들여다보면 아이를 밸 수 있었다는 것은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것에서 기인하였다고 보인다.
原註 魏志(『三國志』, 「魏書」)에서 이르기를, “毌丘儉이 王頎를 파견하여 句驪王 宮을 추격하게 하였는데, 옥저 동쪽 경계에 닿았을 때 그 노인에게 물어 전해들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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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原註 蓋馬는 縣의 명칭이며, 玄菟郡에 속하였다. 그 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는데, 平壤은 곧 王險城이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기를, “明志(明史 地理志)에서 ‘海州衛는 본래 沃沮國 땅이다. 지금의 奉天 海城縣이다. 또한 奉天 蓋平縣은 高麗國 蓋牟城이다. 역시 그 땅에 해당한다.’고 이르렀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그 지형은 ~ 길다: 『삼국지』에서는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東北夾西南長).”라고 기술하였다.
    原註 夾의 음은 狹이다. 集解: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三國志 魏書)에서 지형은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 길다.’고 이르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魏志(三國志 魏書)에서 ‘지금의 元莬 옛 府이다.’라고 이르렀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原註 惠棟이 말하기를, “前志(漢書 地理志)에서 東部都尉의 치소는 不而縣이라고 하였고, 魏志(三國志 魏書)에 不耐城으로 썼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原註 沈欽韓이 말하기를, “沃沮는 魏代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百濟가 나라를 그곳에 세우고 沃沮는 없어졌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 以相監領: 『삼국지』에는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으로 되어 있다.
    原註 何焯이 말하기를, “魏志(三國志 魏書)와 비교하면, ‘遂’자가 빠졌다.”고 하였다. 先謙이 말하기를, “官本은 더불어 ‘監’자를 썼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담비가죽(貂布): 『삼국지』에는 「貊布」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發美女爲婢妾焉: 『삼국지』에는 「送其美女, 以爲婢妾, 遇之如奴僕」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남쪽: 원문에는 「南」으로 되어 있지만, 읍루는 두만강 이북의 동만주 일대 및 연해주 南端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때의 「南」은 「北」의 오식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0)
    또한 “바다 가운데 ~ 일렀다.”고 말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지』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神井信仰과 관련이 깊다. 신령스런 우물을 들여다보면 아이를 밸 수 있었다는 것은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것에서 기인하였다고 보인다.
    原註 魏志(『三國志』, 「魏書」)에서 이르기를, “毌丘儉이 王頎를 파견하여 句驪王 宮을 추격하게 하였는데, 옥저 동쪽 경계에 닿았을 때 그 노인에게 물어 전해들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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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東沃沮)의 문화와 역사 자료번호 : jd.k_0003_0075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