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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선비의 대인 가비능(軻比能)과 중원왕조와의 관계

  • 국가
    선비(鮮卑)
가비능은 본래 선비의 소종(小種)주 001
각주 001)
원문은 “小種鮮卑”인데, “小種인 鮮卑”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여 번역문에서는 두 단어를 도치하여 번역하였다. 馬長壽 역시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三國志補注』에서 『晉書』를 인용하여 軻比能의 후예가 契丹이라고 기록했음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인용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馬長壽, 1962: 189 주)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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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는데, 용감하고 건장하였으며 법(法)을 판결하는 데 공평하고 재물(財物)을 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들은 그를 대인으로 추대하였다. [가비능의] 부락은 변새(邊塞)와 가까웠는데, 원소가 하북을 점거했을 때부터 중국인들이 다수 도망쳐 와서 그에게 귀부하여 [선비 사람들에게] 병기(兵器)와 갑옷, 방패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선비 사람들은] 문자(文字)를 꽤 배우게 되었다. 따라서 [가비능이] 무리들을 조직하고 다스리는 방법은 중국의 것을 본받았는데, 사냥주 002
각주 002)
원문은 “弋獵”인데 ‘弋’은 날짐승을 활로 쏘아 잡는 것을, ‘獵’은 길짐승을 쫓아가 잡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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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가고 들어올 때 정휘(旌麾)주 003
각주 003)
旌麾:‘旌’은 천자가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사용하는 깃발을, ‘麾’는 대장기를 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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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세웠으며, 북소리의 장단으로 [군대가] 진격하거나 후퇴하는 [신호로] 삼았다.
건안년간(196~220) [가비능은] 염유를 통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태조가 서쪽으로 관중(關中)을 정벌할 때 전은(田銀)하간[군](河間郡) 주 004
각주 004)
河間郡:前漢 高帝 9년(전198)에 鉅鹿郡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후 文帝 2년(전178)에 河間國으로 바뀌었다가 文帝 15년(전165)에 國이 폐지되고 河間郡과 廣川郡, 渤海郡 3郡으로 나뉘었다. 景帝 2년(전155)에 다시 河間國이 되었으며, 治所는 樂成縣(현재의 河北省 獻縣 동남)이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靑縣과 南皮縣 서쪽, 河間市·深縣 以東, 任丘市 以南, 武康縣·阜城縣 以北 지역에 해당한다. 元朔 3년(전126) 이후 郡의 북부를 분할하여 涿郡에 속하게 하고 동부를 분할하여 渤海郡에 속하게 했으며, 서남부를 나누어 信都郡에 속하게 하여 甘露년간 말년에 관할구역은 현재의 獻縣, 泊頭, 東光, 阜城, 武强 등 市와 縣의 각각 일부 지역에 해당하였다. 建昭元年(전38)에 郡으로 바뀌었다. 建始元年(전32)에 다시 國이 되었다. 後漢 建武 13년(37)에 信都國으로 병합되었다가 永元 2년(90)에 다시 國이 설치되었다. 관할구역은 확대되어 현재 河北省 雄縣과 大淸河 이남, 南運河 以西, 高陽, 肅寧 등 縣 以東, 阜城縣 以北의 지역에 해당하였다. 三國 曹魏初 다시 郡으로 바뀌었다가 西晉時代에 다시 國이 되었고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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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비능은 3천여 기를 이끌고 염유를 따라 전은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그러나] 후에 대군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가비능은 다시 대군오환을 도와 함께 북변을 침입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태조 [조조]는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 주 005
각주 005)
曹彰(190?~223):三國時代 沛國 譙縣(현재의 안휘성 亳州) 사람이며, 字는 子文이다. 曹操의 아들이며 曹丕(文帝)의 아우이다.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힘이 셌다. 後漢 建安 21년(216)에 鄢陵侯에 봉해졌고, 建安 23년(219)에 北中郞將 行驍騎將軍이 되어 田䂊 등과 함께 代郡 오환을 정벌하여 대파하였다. 후에 行越騎將軍이 되어 長安에 주둔하였다. 조조가 죽자 낙양으로 달려가 조조가 지닌 옥새의 소재를 물었으나 賈逵가 이를 책망하였다. 위 문제 즉위 후에 任城王에 봉해졌다. 후에 수도 洛陽에서 갑자기 죽었다. 시호는 威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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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여 북쪽[의 가비능]을 정벌하게 하니 [조창가비능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가비능은 달아나 새외(塞外)로 나갔다가 후에 다시 [한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여] 공물을 바쳤다.
연강(延康)(220년) 초기에 가비능은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으며, [조위] 문제는 또한 가비능을 부의왕(附義王)으로 삼았다. 황초(黃初) 2년(221)에 가비능은 선비 속에 있었던 위(魏)나라 사람주 006
각주 006)
원문은 “魏人”인데, 역대 史書에서는 해당 왕조의 編民 혹은 백성들을 王朝名에 ‘人’字를 붙여 지칭하였다. “魏人”이라 불린 사람들은 後漢 말기에 軻比能에게 망명간 중국인들인데, 後漢이 멸망하고 魏(曹魏 혹은 三國 魏라고도 함)가 건국한 후이므로 “魏人”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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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여 가를 내보내어 대군(代郡)으로 돌아가 살게 하였다. 이듬해(황초 3년;222년)에 가비능은 부락 대인과 작은 아들, 대군오환 수무로(修武盧) 주 007
각주 007)
원문 “比能帥部落大人小子代郡烏丸修武盧等三千餘騎”에서 ‘部落大人’·‘少子’·‘代郡烏丸’·‘修武盧’는 모두 동일인처럼 읽힌다. 그런데, 軻比能이 代郡烏丸과 연합하여 後漢의 북쪽 변방을 침공했다는 이 기록을 볼 때, 軻比能의 아들이 代郡烏丸이었는지 의심스럽다. 번역문에서는 中華書局標點校勘本의 標點과 달리 ‘部落大人’, ‘少子’, ‘代郡烏丸 修武盧’를 끊어서 세 부류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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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3천여 기를 이끌고 소와 말 7만여 두를 몰고 와서 교역하였으며, 위나라 사람 천여 가를 보내 상곡군(上谷郡)에 [되돌아가서] 살게 하였다. 후에 [가비능은] 동부선비(東部鮮卑) 대인이었던 소리보도근과 함께 세 집단이 싸우며 다투어 서로 번갈아 공격하였다. 전예는 이를 화합하게 하여 다시 서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초] 5년(224)에 가비능이 다시 소리를 공격하자 전예는 경기(輕騎)를 이끌고 재빨리 나아가 가비능 군대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가비능은 따로 소수(小帥) 쇄노(瑣奴)를 보내 전예의 군대와 맞서게 하였으나, 전예가 나아가 이들을 토벌하고 격파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가비능은] 이반(離叛)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가비능은 보국장군(輔國將軍) 선우보(鮮于輔)에게 편지를 보내 “이적(夷狄)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데, 전직 오환교위였던 염유는 저를 천자에게 잘 말해주었습니다. 저와 소리는 본래 원수였기 때문에 예전에 소리를 공격하였는데, 전교위(田校尉)는 [오히려] 소리를 도왔습니다. 저는 진영에 임하여 쇄노를 보내 사군(使君)주 008
각주 008)
使君:본래 刺史를 지칭하는 말이다. 田豫의 직함인 烏丸校尉도 刺史에 준하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使君’이라고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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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왔음을 듣고 곧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보도근은 자주 공격하여 약탈하였고, 또 제 아우를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가 노략질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저희 이적은 비록 예의(禮義)를 알지 못하지만 형제와 자손은 천자의 인수(印綬)를 받아 [위나라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소와 말조차 물과 풀이 좋은 곳을 알거늘 하물며 저에게 어찌 사람의 마음(人心)이 없겠습니까? 장군(將軍)은 장차 천자께 저를 잘 변호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선우보는 편지를 얻어 이를 조정에 알리니 문제는 다시 전예에게 가비능을 초납(招納)하여 위무(慰撫)하도록 하였다.
가비능의 무리는 마침내 강성해져서 [활을 잘 쏘는] 군사가 10여만 기(騎)나 되었다.주 009
각주 009)
『三國志·尉遲』 「牽招傳」에 따르면 軻比能은 黃初 3년(222)과 太和 2년(228) 사이에 步度根이 지배했던 雲中故郡 지역을 점령하였다(馬長壽, 1962: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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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하여 재물을 얻을 때마다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고, 한번 눈앞에서 결정하면 끝까지 사심이 없었으므로 무리들이 죽을 힘을 다하는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다른 나머지 집단의 대인들은 모두 그를 공경하며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가비능단석괴에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 각주 001)
    원문은 “小種鮮卑”인데, “小種인 鮮卑”로 번역하는 것이 어색하여 번역문에서는 두 단어를 도치하여 번역하였다. 馬長壽 역시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三國志補注』에서 『晉書』를 인용하여 軻比能의 후예가 契丹이라고 기록했음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인용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馬長壽, 1962: 189 주)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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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弋獵”인데 ‘弋’은 날짐승을 활로 쏘아 잡는 것을, ‘獵’은 길짐승을 쫓아가 잡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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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旌麾:‘旌’은 천자가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사용하는 깃발을, ‘麾’는 대장기를 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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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河間郡:前漢 高帝 9년(전198)에 鉅鹿郡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후 文帝 2년(전178)에 河間國으로 바뀌었다가 文帝 15년(전165)에 國이 폐지되고 河間郡과 廣川郡, 渤海郡 3郡으로 나뉘었다. 景帝 2년(전155)에 다시 河間國이 되었으며, 治所는 樂成縣(현재의 河北省 獻縣 동남)이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靑縣과 南皮縣 서쪽, 河間市·深縣 以東, 任丘市 以南, 武康縣·阜城縣 以北 지역에 해당한다. 元朔 3년(전126) 이후 郡의 북부를 분할하여 涿郡에 속하게 하고 동부를 분할하여 渤海郡에 속하게 했으며, 서남부를 나누어 信都郡에 속하게 하여 甘露년간 말년에 관할구역은 현재의 獻縣, 泊頭, 東光, 阜城, 武强 등 市와 縣의 각각 일부 지역에 해당하였다. 建昭元年(전38)에 郡으로 바뀌었다. 建始元年(전32)에 다시 國이 되었다. 後漢 建武 13년(37)에 信都國으로 병합되었다가 永元 2년(90)에 다시 國이 설치되었다. 관할구역은 확대되어 현재 河北省 雄縣과 大淸河 이남, 南運河 以西, 高陽, 肅寧 등 縣 以東, 阜城縣 以北의 지역에 해당하였다. 三國 曹魏初 다시 郡으로 바뀌었다가 西晉時代에 다시 國이 되었고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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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曹彰(190?~223):三國時代 沛國 譙縣(현재의 안휘성 亳州) 사람이며, 字는 子文이다. 曹操의 아들이며 曹丕(文帝)의 아우이다.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힘이 셌다. 後漢 建安 21년(216)에 鄢陵侯에 봉해졌고, 建安 23년(219)에 北中郞將 行驍騎將軍이 되어 田䂊 등과 함께 代郡 오환을 정벌하여 대파하였다. 후에 行越騎將軍이 되어 長安에 주둔하였다. 조조가 죽자 낙양으로 달려가 조조가 지닌 옥새의 소재를 물었으나 賈逵가 이를 책망하였다. 위 문제 즉위 후에 任城王에 봉해졌다. 후에 수도 洛陽에서 갑자기 죽었다. 시호는 威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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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은 “魏人”인데, 역대 史書에서는 해당 왕조의 編民 혹은 백성들을 王朝名에 ‘人’字를 붙여 지칭하였다. “魏人”이라 불린 사람들은 後漢 말기에 軻比能에게 망명간 중국인들인데, 後漢이 멸망하고 魏(曹魏 혹은 三國 魏라고도 함)가 건국한 후이므로 “魏人”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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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 “比能帥部落大人小子代郡烏丸修武盧等三千餘騎”에서 ‘部落大人’·‘少子’·‘代郡烏丸’·‘修武盧’는 모두 동일인처럼 읽힌다. 그런데, 軻比能이 代郡烏丸과 연합하여 後漢의 북쪽 변방을 침공했다는 이 기록을 볼 때, 軻比能의 아들이 代郡烏丸이었는지 의심스럽다. 번역문에서는 中華書局標點校勘本의 標點과 달리 ‘部落大人’, ‘少子’, ‘代郡烏丸 修武盧’를 끊어서 세 부류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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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使君:본래 刺史를 지칭하는 말이다. 田豫의 직함인 烏丸校尉도 刺史에 준하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使君’이라고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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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三國志·尉遲』 「牽招傳」에 따르면 軻比能은 黃初 3년(222)과 太和 2년(228) 사이에 步度根이 지배했던 雲中故郡 지역을 점령하였다(馬長壽, 1962: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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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가비능, 가비능, 원소, 가비능, 가비능, 염유, 태조, 전은(田銀), 가비능, 염유, 전은, 가비능, 태조, 조조,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 가비능, 조창, 가비능, 가비능, 가비능, 문제, 가비능, 가비능, 가비능, 수무로(修武盧), 가비능, 소리, 보도근, 전예, 가비능, 소리, 전예, 가비능, 가비능, 쇄노(瑣奴), 전예, 전예, 가비능, 가비능, 선우보(鮮于輔), 염유, 소리, 소리, 소리, 쇄노, 보도근, 선우보, 문제, 전예, 가비능, 가비능, 가비능, 단석괴
지명
하간[군](河間郡), 대군, 대군, 한나라, 위(魏)나라, 대군(代郡), 대군, 위나라, 상곡군(上谷郡), 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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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대인 가비능(軻比能)과 중원왕조와의 관계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