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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군(巴郡)과 남군(南郡)의 만(蠻)에 있던 5개의 성씨중 파씨(巴氏)의 자손 무상(務相)이 군주로 추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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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군·남군만(巴郡·南郡蠻)
파군(巴郡)남군(南郡)의 만(蠻)은 본래 5개의 성씨가 있었는데, 파씨(巴氏), 번씨(樊氏), 심씨(瞫氏), 상씨(相氏),주 001
각주 001)
相氏: 『秦書』 권120 「李特載記」에서는 “相氏”가 “柏氏”로, 『太平御覽』권769 「敍舟」에 인용된 『世本』에서는 “栢氏”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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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鄭氏)로, 모두 무락(武落) 종리산(鍾離山) 주 002
각주 002)
鍾離山: 현재 湖北省 長陽縣에 있는 산으로 三峽 계곡 淸江 연안에서 30km지역에 있다. 위진남북조시대 李特이 廩君蠻 출신으로, 『晋書』 卷120 「載記」20 「李特傳」에 廩君蠻의 조상의 출생과 鍾離山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전설이 실려 있다. 현재는 土家族의 祖先에 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진시대에는 氐族인 李特의 조상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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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왔다.주 003
각주 003)
李賢註에서 『代本』을 인용하여 늠군의 선조는 옛날 무탄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代本曰 ‘廩君之先, 故出巫誕’ 也.). 『代本』은 『世本』이라고도 하는데, 三皇五帝부터 春秋時代까지 제왕, 왕후, 귀족의 계보와 성씨, 거주지, 시호제정과 관련된 시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편저자는 미상이다. 北宋代까지 존재했다가 이후에 망실되어 일문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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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에는 붉고 검은 두 동굴이 있는데, 파씨의 자손은 붉은 동굴에서 출생하였고, 4개 성씨는 모두 검은 동굴에서 출생하였다. 군장(君長)이 아직 없었을 때 모두 귀신(鬼神)을 섬겼는데, 다함께 동굴에서 칼던지기를 하였는데, 능히 명중시킨 사람을 군주로 하기로 약조하였다. 파씨의 아들 무상(務相)만 홀로 명중시키자, 무리들 모두가 찬탄하였다. 또 각각 흙으로 된 배를 타도록 하여 능히 뜨는 자를 마땅히 군주로 삼기로 약조하기도 하였다. 나머지 성씨들은 모두 가라 앉았는데, 오직 무상만이 홀로 떴다. 이로써 다함께 그를 [군주로] 추대하였으니, 이가 늠군(廩君)이었다. 이에 흙으로된 배를 타고 이수(夷水) 주 004
각주 004)
夷水: 현재의 湖北省 西南 武陵山, 巴山, 巫山을 휘감으면서 흘러 長江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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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부터 염양(鹽陽)에까지 이르렀다.주 005
각주 005)
李賢註에서는 『荊州圖』와 盛弘之의 『荊州記』를 인용 소개하고 있다. 『荊州圖』에는 “夷陵縣의 서쪽에는 온천이 있다.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길 이 온천에서는 원래 소금이 나왔는데 오늘날에도 물에 소금기가 있다고 한다. 현의 서쪽으로 유일하게 홀로 있는 산에는 석굴이 있는데, 두 개의 큰 돌이 굴 속에 나란히 서있으며 서로와의 거리는 1장 정도로 속칭 陰陽石이라고 한다. 陰石은 항상 축축하고 陽石은 항상 건조하다.”라고 되어 있으며, 盛弘之의 『荊州記』에는 “옛날 늠군이 夷水를 떠돌아 다닐 때, 陽石 위에서 소금의 神에게 활을 쏘았다. 살펴보건대, 오늘날 施州 淸江縣을 흐르는 물을 일명 鹽水라고 하니 淸江縣 서쪽 都亭山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고, 『水經』에서는 “夷水는 한편으로는 巴郡의 漁復縣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는데, 注에서는 “물의 빛깔이 맑아 10장이나 되는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며 모래와 돌을 분간할 수 있다. 촉지방의 사람들이 그 맑고 깨끗한 것을 보고 淸江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荊州圖[副]曰: “(副)夷[陵]縣西有溫泉. 古老相傳, 此泉元出鹽, 于今水有鹽氣. 縣西一獨山有石穴, 有二大石並立穴中, 相去可一丈, 俗名爲陰陽石. 陰石常濕, 陽石常燥.” 盛弘之荊州記曰: “昔廩君浮夷水, 射鹽神于陽石之上. 案今施州淸江縣水一名鹽水, 源出淸江縣西都亭山.” 水經云: “夷水[別出]巴郡魚復縣.” 注云: “水色淸, 照十丈, 分沙石. 蜀人見澄淸, 因名淸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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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鹽水)에 신녀(神女)가 있었는데, 늠군에게 말하기를, “이땅은 넓고, 또 물고기와 소금이 생산된다. 원컨대 여기에 남아 함께 살자”고 하였는데, 늠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염신(鹽神)은 날이 저물면 홀연히 나타나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곤충으로 변하여, 여러 곤충과 함께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해의 빛을 차단하니 천지가 어두워졌다. 10여 일이 계속되자 늠군은 그 똥을 살펴 화살을 쏘아 [염신을] 죽이자, 천지가 다시 밝아졌다.주 006
각주 006)
李賢注에서 인용된 『代本』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늠군이 사람을 시켜 푸른 실을 가지고 가서 염신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이것을 감고 있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대와 함께 살며 장차 떠나지 못하게 하는 데 좋다고 합니다.’ 염신이 실을 받아 들고 그것을 몸에 감자 늠군이 즉시 양석 위에 올라 푸른 실에 반응하여 그 쪽을 향해 활을 쏘아 鹽神을 맞추니 鹽神은 죽고 하늘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代本曰 “廩君使人操靑縷以遺鹽神, 曰: ‘嬰此卽相宜, 云與女俱生, [弗]宜將去’. 鹽神受縷而嬰之, 廩君卽立陽石上, 應靑縷而射之, 中鹽神, 鹽神死, 天乃大開”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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늠군은 이에 이성(夷城)에서 군주를 칭하니,주 007
각주 007)
李賢注에서는 이 이상은 모두 『代本』에 나와 있는 이야기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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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성씨가 모두 신하로 복속하였다. 늠군이 죽자 혼백(魂魄)이 대대로 백호(白虎)가 되었다. 파씨는 호랑이가 사람의 피를 먹는다고 하여 결국 사람을 [희생으로] 제사지냈다.

  • 각주 001)
    相氏: 『秦書』 권120 「李特載記」에서는 “相氏”가 “柏氏”로, 『太平御覽』권769 「敍舟」에 인용된 『世本』에서는 “栢氏”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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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鍾離山: 현재 湖北省 長陽縣에 있는 산으로 三峽 계곡 淸江 연안에서 30km지역에 있다. 위진남북조시대 李特이 廩君蠻 출신으로, 『晋書』 卷120 「載記」20 「李特傳」에 廩君蠻의 조상의 출생과 鍾離山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전설이 실려 있다. 현재는 土家族의 祖先에 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진시대에는 氐族인 李特의 조상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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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李賢註에서 『代本』을 인용하여 늠군의 선조는 옛날 무탄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代本曰 ‘廩君之先, 故出巫誕’ 也.). 『代本』은 『世本』이라고도 하는데, 三皇五帝부터 春秋時代까지 제왕, 왕후, 귀족의 계보와 성씨, 거주지, 시호제정과 관련된 시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편저자는 미상이다. 北宋代까지 존재했다가 이후에 망실되어 일문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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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夷水: 현재의 湖北省 西南 武陵山, 巴山, 巫山을 휘감으면서 흘러 長江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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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李賢註에서는 『荊州圖』와 盛弘之의 『荊州記』를 인용 소개하고 있다. 『荊州圖』에는 “夷陵縣의 서쪽에는 온천이 있다.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길 이 온천에서는 원래 소금이 나왔는데 오늘날에도 물에 소금기가 있다고 한다. 현의 서쪽으로 유일하게 홀로 있는 산에는 석굴이 있는데, 두 개의 큰 돌이 굴 속에 나란히 서있으며 서로와의 거리는 1장 정도로 속칭 陰陽石이라고 한다. 陰石은 항상 축축하고 陽石은 항상 건조하다.”라고 되어 있으며, 盛弘之의 『荊州記』에는 “옛날 늠군이 夷水를 떠돌아 다닐 때, 陽石 위에서 소금의 神에게 활을 쏘았다. 살펴보건대, 오늘날 施州 淸江縣을 흐르는 물을 일명 鹽水라고 하니 淸江縣 서쪽 都亭山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고, 『水經』에서는 “夷水는 한편으로는 巴郡의 漁復縣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는데, 注에서는 “물의 빛깔이 맑아 10장이나 되는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며 모래와 돌을 분간할 수 있다. 촉지방의 사람들이 그 맑고 깨끗한 것을 보고 淸江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荊州圖[副]曰: “(副)夷[陵]縣西有溫泉. 古老相傳, 此泉元出鹽, 于今水有鹽氣. 縣西一獨山有石穴, 有二大石並立穴中, 相去可一丈, 俗名爲陰陽石. 陰石常濕, 陽石常燥.” 盛弘之荊州記曰: “昔廩君浮夷水, 射鹽神于陽石之上. 案今施州淸江縣水一名鹽水, 源出淸江縣西都亭山.” 水經云: “夷水[別出]巴郡魚復縣.” 注云: “水色淸, 照十丈, 分沙石. 蜀人見澄淸, 因名淸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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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李賢注에서 인용된 『代本』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늠군이 사람을 시켜 푸른 실을 가지고 가서 염신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이것을 감고 있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대와 함께 살며 장차 떠나지 못하게 하는 데 좋다고 합니다.’ 염신이 실을 받아 들고 그것을 몸에 감자 늠군이 즉시 양석 위에 올라 푸른 실에 반응하여 그 쪽을 향해 활을 쏘아 鹽神을 맞추니 鹽神은 죽고 하늘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代本曰 “廩君使人操靑縷以遺鹽神, 曰: ‘嬰此卽相宜, 云與女俱生, [弗]宜將去’. 鹽神受縷而嬰之, 廩君卽立陽石上, 應靑縷而射之, 中鹽神, 鹽神死, 天乃大開”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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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李賢注에서는 이 이상은 모두 『代本』에 나와 있는 이야기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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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무상(務相), 무상, 늠군(廩君), 늠군, 늠군, 늠군, 늠군, 늠군
지명
파군(巴郡), 남군(南郡), 종리산(鍾離山), 이수(夷水), 염양(鹽陽), 염수(鹽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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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군(巴郡)과 남군(南郡)의 만(蠻)에 있던 5개의 성씨중 파씨(巴氏)의 자손 무상(務相)이 군주로 추대 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