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의 무역
조선 무역이나 은광의 채굴이 과거 번영했을 때에는 사치스러운 풍습이었는지 위와 같은 형식의 겉치레가 유풍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지 내의 근무자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세간의 일에 익숙해서 매사를 능숙하게 처리합니다. 조닌들도 지방 조닌의 품성이 아니라 에도·오사카 등 다른 지역에서 하는 것처럼 만사 세상 물정에 밝은 모습입니다. 무역을 본업으로 삼는 지역 특징으로 인해 질소 검약에 마음을 쓰는 세심한 풍습은 아닙니다. 영주의 상황은 곤궁하여 산킨 코타이 때 탈 배의 교체도 연기되었으며, 근래 딸이 교토(京都)에 시집가는 것이 17년이나 미루어졌다고 합니다. 올 봄 에도 저택이 소실되자 시중과 시골에 임시 자금징수를 지시하여 대략 금 1,000냥 정도를 모았는데, 시중에서 은 20관(貫) 정도를 냈고 돈야(問屋) 1명당 은 30몬메 정도의 할당량이었다고 합니다. 그 나머지는 시골에서 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