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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츠쿠시노무로츠미

筑紫館
  • 저필자
    이현주(성균관대학교)
  • 시대
    발해
  • 원소장처
    후쿠오카시(福岡市) 후쿠오카성 부근
  • 시대
    발해
  • 유형
    건축지
유적개관
이와이[磐井]의 난(乱)(527年-528年) 이후 선화원년(宣化元年, 536年) 원(遠)의 조정(朝廷)을 설치(設置)하고 구주지배(九州支配)와 외교(外交)를 위해 설치하였다. 추고17년(推古17年, 609年)에는 축자대재(筑紫大宰)라는 이름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한다. 백촌강(白村江) 전투의 다음 해에(664年) 행정기능(行政機能)은 내륙(内陸)의 대재부(大宰府)로 이전되고, 해외교류(海外交流) 및 방어거점 시설로만 운영되었다. 이 시설은 축자관(筑紫館)으로 불리며 당(唐)·신라(新羅)·발해(渤海)의 사절(使節)을 맞이하는 영빈관(迎賓館) 겸 숙박소(宿泊所)로서의 기능을 했다. 해외사절(海外使節)은 우선 홍려관(鴻臚館)에 들어와 숙박하고 대재부(大宰府)나 도성으로 이동하였다. 축자관(筑紫館)과 대재부(大宰府) 사이에는 약 16km이고, 그 폭은 최대 10m의 직선도로가 갖추어 있었다.
해설
축자관, 즉 츠쿠시노무로츠미[筑紫館]는 일본의 후쿠오카시 후쿠오카성 부근에 위치한다.
츠쿠시노무로츠미는 처음에 이와이[磐井]의 반란(527년~528년)이후 센카[宣化] 천황 원년(536년)에 쿠슈(九州)의 지배와 외교를 위해 설치하였다. 스이코(推古)천황 17년609년)에는 츠쿠시다자이(筑紫大宰)라는 이름이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백촌강(白村江) 전투의 다음해인 664년에 행정기능은 다자이후[大宰府]로 이전되었고, 해외교류 및 방어거점시설로만 운영되었다.
츠쿠시노무로츠미는 나라시대[奈良時代]에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고 접대하던 영빈관 겸 숙박소이다. 나라시대에는 츠쿠시노무로츠미로 불리웠는데, 헤이안시대에 고로칸[鴻臚館]이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개명되었다. 츠쿠시노무로츠미는 당이나 신라, 발해에서 온 외교사절들이 머물며 일본의 입경허가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고로칸’은 헤이안시대(794~1185)에 일본에 온 사신들을 접대하고, 외교를 하기 위해 건축된 영빈관이다. 외국사절은 우선 고로칸에 들어와 숙박하고 다자이후[大宰府]나 도성으로 이동하였다. 츠쿠시노무로츠미와 다자이후 사이에는 약16km이고, 그 폭은 최대 10m의 직선도로가 갖추어 있었다. 또한 당이나 신라 등으로 보내지는 유학생들이 출발 전에 머물던 장소이기도 했다.
헤이안시대에 외교사절의 왕래가 폐지된 이후에는 당이나 신라, 발해의 상인들이 츠쿠시노무로츠미의 장소를 사용하였다. 현재 고로칸의 장소는 다이쇼[大正]시대에 들어와 큐슈제국대학의 나카야마헤이지로[中山平次郞]라는 교수가 ‘만엽집(万葉集)’이라는 고대가요집의 견신라사라는 노래가 묘사한 배경을 근거로 추정한 곳이다.
1987년 헤이와다이[平和台]야구장의 외야석 보수공사를 위해 조사를 하던 중 고로간의 유적을 발견하였고, 이후 1988년부터 순차적으로 발굴하였다. 발굴지 옆에 고로칸전시관을 세우고,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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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쿠시노무로츠미 자료번호 : isea.d_0003_0020_0020_004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