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파견과 쓰시마 도주 소 요시쓰구(宗義眞)의 서계
眞重 등이 울릉(蔚陵)이라는 한 구절이 들어 있음을 따지자, 박동지(朴同知)주 001가 은밀하게 말하였다.
“우리 조선이 죽도가 곧 울릉도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다만 작은 섬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 틈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은 남기고 땅을 버리려는 계책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을 제거하겠다고 한다면 이 서계 또한 손에 넣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眞重 등이 서계를 받아서 돌아갔다. 7년 갑술년(1694) 여름, 그 말이 실제로 함축된 바가 있어서 상주하기가 거북하다며 거듭 眞重 등을 조선에 보내어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서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습유(拾遺) 平義倫 주 002은 조선국 예조참판 대인 합하의 편지를 받들어 보았습니다. 사신이 돌아오자 바로 회답을 받들어 여러 차례 되풀이 하여 읽었습니다. 지난 번에 귀국의 어민이 우리나라의 죽도에 들어 온 것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편지에서는 울릉도의 일은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조선의] 답신에는 울릉도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다시 한 번 정관(正官)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와 도선주 藤成時를 보내니, 다만 바라건대 ‘울릉’이라는 이름을 제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동행(東行)주 003 일정이 가까워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으므로, 나머지는 사신의 입에 부쳐 보내겠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산물로 부족하나마 이렇게 멀리서 정성을 알리오니 웃으며 받아주십시오. 삼가 이만 줄입니다. 元祿 7년(1694) 갑술 2월 일.8월 3일에 접위관(接慰官)주 004이 내려오고, 5일에 이전의 사신 박동지와 박첨지가 와서 말하였다.
“지난해 박첨지가 문위사(問慰使)주 005로 귀 섬에 갔을 때에 여러 대감들께서 죽도와 울릉도는 한 섬인데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 이 서계의 내용을 보면 단지 울릉이라는 말을 제거해 달라고 청하면서 그 까닭을 말하지 않으니, 비단 전하여 아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례(茶禮)주 006 또한 베풀어 행할 수 없습니다.”
7일에 또 왔는데, 하는 말은 전과 같았다. 眞重 등이 언성을 높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한갓 다례를 마련하는데, 굳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략 저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는 설을 우리나라 사람들 입에서 먼저 나오게 하려는 것인데, 깊이 생각하여 속이려고 짜낸 계략이 참으로 놀랍다. 眞重 등은 터럭만큼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무턱대고 큰소리를 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때 날짜를 정하여 9일에 다례를 행하기로 하였기에 되풀이하여 정중하게 재앙과 복으로 써 깨우치며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는 설을 살짝 드러냈다.
접위관이 말했다.
“이 서계는 원래 아무런 거리끼는 점이 없으니 사신께서는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에도(大府)에 도착하면 자연히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계문을 올려 수정하기를 청하고 싶다면 모름지기 원래의 서계를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25일 봉진연석(封進宴席)주 007 자리에서 眞重 등이 다시 전에 했던 말을 거듭하자 접위관이 말하였다.
“귀국의 사신이 온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원래 서계의 말뜻이 마치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삭제할 수 있으면 삭제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까닭을 써 주기를 청하는 것으로, 오직 이 두 갈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원래의 서계를 돌려받아서 한꺼번에 계품(啓稟)주 008한다면 반드시 두 길 가운데 하나의 답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돌려보내려 하지 않는다면 감히 계품(啓稟)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도 또한 며칠 안에 상경(上都)할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眞重 등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바로 그날 박동지와 박첨지를 오라고 해서 원래의 서계를 가져가도록 하였다. 9월 12일에 박동지와 박첨지가 와서 접위관의 말을 전하며 말하였다.
“죽도에 관한 서계는 이미 고쳐 써서 本官에게 봉하여 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따로 분부하기를, 만약 귀국의 사신이 가지고 가기 어렵다면 本官이 차비(差備)하여 속히 북(北)으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지엄한 명령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이에 아울러 통보합니다.”
眞重 등이 크게 놀라서 말하였다.
“서계를 드리겠습니다.”
진실로 전날의 규정이 있는데 지금 관례를 깨면서 함께 하려고 하니 누가 감히 교령을 받아들이겠는가.
“우리 조선이 죽도가 곧 울릉도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다만 작은 섬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 틈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은 남기고 땅을 버리려는 계책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을 제거하겠다고 한다면 이 서계 또한 손에 넣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眞重 등이 서계를 받아서 돌아갔다. 7년 갑술년(1694) 여름, 그 말이 실제로 함축된 바가 있어서 상주하기가 거북하다며 거듭 眞重 등을 조선에 보내어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서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습유(拾遺) 平義倫 주 002은 조선국 예조참판 대인 합하의 편지를 받들어 보았습니다. 사신이 돌아오자 바로 회답을 받들어 여러 차례 되풀이 하여 읽었습니다. 지난 번에 귀국의 어민이 우리나라의 죽도에 들어 온 것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편지에서는 울릉도의 일은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조선의] 답신에는 울릉도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다시 한 번 정관(正官)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와 도선주 藤成時를 보내니, 다만 바라건대 ‘울릉’이라는 이름을 제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동행(東行)주 003 일정이 가까워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으므로, 나머지는 사신의 입에 부쳐 보내겠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산물로 부족하나마 이렇게 멀리서 정성을 알리오니 웃으며 받아주십시오. 삼가 이만 줄입니다. 元祿 7년(1694) 갑술 2월 일.8월 3일에 접위관(接慰官)주 004이 내려오고, 5일에 이전의 사신 박동지와 박첨지가 와서 말하였다.
“지난해 박첨지가 문위사(問慰使)주 005로 귀 섬에 갔을 때에 여러 대감들께서 죽도와 울릉도는 한 섬인데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 이 서계의 내용을 보면 단지 울릉이라는 말을 제거해 달라고 청하면서 그 까닭을 말하지 않으니, 비단 전하여 아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례(茶禮)주 006 또한 베풀어 행할 수 없습니다.”
7일에 또 왔는데, 하는 말은 전과 같았다. 眞重 등이 언성을 높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한갓 다례를 마련하는데, 굳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략 저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는 설을 우리나라 사람들 입에서 먼저 나오게 하려는 것인데, 깊이 생각하여 속이려고 짜낸 계략이 참으로 놀랍다. 眞重 등은 터럭만큼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무턱대고 큰소리를 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때 날짜를 정하여 9일에 다례를 행하기로 하였기에 되풀이하여 정중하게 재앙과 복으로 써 깨우치며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는 설을 살짝 드러냈다.
접위관이 말했다.
“이 서계는 원래 아무런 거리끼는 점이 없으니 사신께서는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에도(大府)에 도착하면 자연히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계문을 올려 수정하기를 청하고 싶다면 모름지기 원래의 서계를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25일 봉진연석(封進宴席)주 007 자리에서 眞重 등이 다시 전에 했던 말을 거듭하자 접위관이 말하였다.
“귀국의 사신이 온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원래 서계의 말뜻이 마치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삭제할 수 있으면 삭제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까닭을 써 주기를 청하는 것으로, 오직 이 두 갈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원래의 서계를 돌려받아서 한꺼번에 계품(啓稟)주 008한다면 반드시 두 길 가운데 하나의 답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돌려보내려 하지 않는다면 감히 계품(啓稟)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도 또한 며칠 안에 상경(上都)할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眞重 등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바로 그날 박동지와 박첨지를 오라고 해서 원래의 서계를 가져가도록 하였다. 9월 12일에 박동지와 박첨지가 와서 접위관의 말을 전하며 말하였다.
“죽도에 관한 서계는 이미 고쳐 써서 本官에게 봉하여 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따로 분부하기를, 만약 귀국의 사신이 가지고 가기 어렵다면 本官이 차비(差備)하여 속히 북(北)으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지엄한 명령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이에 아울러 통보합니다.”
眞重 등이 크게 놀라서 말하였다.
“서계를 드리겠습니다.”
진실로 전날의 규정이 있는데 지금 관례를 깨면서 함께 하려고 하니 누가 감히 교령을 받아들이겠는가.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眞重, 眞重, 眞重, 平義倫,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 藤成時, 眞重, 眞重, 眞重, 眞重, 眞重
- 지명
- 울릉(蔚陵), 죽도, 울릉도, 죽도, 울릉도, 울릉도, 울릉, 죽도, 울릉도, 울릉, 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