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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맺음말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 문제와 관련하여

Ⅴ. 맺음말 :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 문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한자의 수용과 이를 매개로 한 율령·유교·한역불교의 수용과 정착에는 군현민(郡縣民)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살필 수 있었다. 적어도 고구려의 경우에서는 그러하였다. 사실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지역은 한 군현의 설치 이래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압력이 지속적으로 가해진 지역이었다. 이 점에서 이 지역이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일원이 되는데 한인의 집단적 이주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자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문화적 지표로 설정되는 이들 문화요소들이 모두 중국에서 기원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가설은 충분한 논리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주민에 의한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을 논하기에 앞서, 이들 문화요소를 어째서 고구려가 수용하였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현토군과 고구려의 관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 군현의 설치는 고구려에 정치·군사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군사적 압력 속에서 고구려는 한자를 비롯하여 문서행정 그리고 정치제도 등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중국에 기원을 둔 것이어서 ‘중국화’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고구려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이루는 수단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고구려가 초기의 통치체제를 조직화하고 왕권에의 결속을 다지는데 필요한 도구들이었던 것이다. 즉 중국과 접촉하게 되었다는 대외적 위기 속에서 고구려가 한자를 수용하고 한의 정치제도를 참작한 관제(官制)를 마련했던 것은 자존을 도모하려는 국가전략의 일환이었다.
4~6세기의 제2기는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고구려의 국가전략 간의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중국계 이주민의 모습은 중국 방면의 정세 변화와 짝하여 이주의 물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에 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고구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정세에 긴밀히 연동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방면의 정치적 혼란이나 남북조 간의 대결관계에 휘말리지 않고 자존을 유지하면서 국가발전을 이룩하였다. 여기에 이시기 고구려의 대외전략이 중국계 이주민을 내세웠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역할은 철저히 고구려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고국원왕대부터 평양 등 과거 군현지역의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그 뒤를 이어 소수림왕대의 불교 수용과 건립·율령 반포가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옛 군현지역의 개발이 필요하며, 국가제체의 재편과 정비를 위해 국가 불교와 관리양성 등이 절실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국가전략 한가운데에 바로 군현민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에 기여한 바는 매우 컸다.
그런데 만주와 한반도지역이 동아시아세계의 제 문화요소를 수용한 배경이 이러하였다면,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경우는 어떻게 한자·유교·율령·한역불교를 수용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RISSRISS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는 기원전 200년 경부터 나타나지만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것은 5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보이는 이주의 흐름이다.주 084
각주 084)
관련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3세기까지의 이주민은 弥生문화의 전개와 관련, 在來人과의 동화에 의해 왜인이 되었기에 도래인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加藤謙吉(1986), 「渡來人」 『古代史硏究の最前線』(第1卷, 政治·經濟編 上), 雄山閣, 56~57쪽RISS). 또한 도래씨족 ‘왜한씨(倭漢氏)’와 ‘진씨(秦氏)’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들은 5세기 무렵 분산적으로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주민으로 야마토 정권의 외교·군사·재무 등 분야의 관료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이들 구래의 도래인이 소지한 기술과 문화는 왜국의 불교 수용과 관련하여 백제가 제공한 새로운 사찰 조영기술·문화와 혼합되어 일본열도의 불교발전에 기여하였다. 관련 내용은 田中史生(2008), 「百濟王興寺と飛鳥寺と渡來人」 『東アジアの古代文化』(特輯 文化交流の古代史) 136RISS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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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술·문화·지식을 가지고 이주하여 일정기간 왜국에 봉사하다가 귀국한 이들에 관심이 간다. 왜국의 불교 수용이 백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주 085
각주 085)
이와 관련하여 주변민족의 중국문화 수용에는 중국 왕조와 주변국의 관계만이 아니라 주변민족 상호간의 관계가 생각 이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는 지적이 있다(이성시a(2001), 앞의 책, 166~179). 여기에서 신라의 율령과 한자문화가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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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왜국이 고대 동아시아세계에 포함되는 계기는 중국과의 관계가 아닌 한반도의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왜국의 법흥사한국사DB위치(法興寺, 비조사(飛鳥寺)) 조영이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사찰인 법흥사는 588년 백제 창왕(昌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이 승려와 사찰 건립에 필요한 기술자를 제공해주었기에 세워질 수 있었다.주 086
각주 086)
田中史生b (2005), 『倭國と渡來人 交錯する「內」と「外」 』, 吉川弘文館, 49쪽.R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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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법흥사에 595년 건너간 고구려 승려인 혜자(慧慈)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가 머물렀고 법흥사의 장육불상(丈六佛像) 제작에 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이 황금 300냥한국사DB을 증여했다는 사실주 087
각주 087)
① “高麗僧慧慈歸化 則皇太子師之 是歲 百濟僧慧聰來之 此兩僧 弘演佛敎 並爲三寶之棟梁” (『日本書紀』 卷22, 推古 3年 5月 戊午條한국사DB).
② “是時 高麗國大興王 聞日本國天皇造佛像 貢上黃金三百兩” (『日本書紀』 卷22, 推古 13年 夏四月 辛酉朔條한국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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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목된다. 즉 승려와 기술자 등 도래인을 매개로 한 백제와 고구려의 대왜외교(對倭外交)주 088
각주 088)
혜자가 왜국에 간 것은 영양왕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坂元義種, 「推古朝の外交 とくに隋との關係を中心に」 『歷史と人物』 100, 1979). 그의 渡倭와 왜국에서의 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양국 관계가 긴밀해져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것이 570년 이래 고구려가 왜국을 상대로 전개했던 대왜외교가 거둔 성과였다(李成制f, 「570年代 高句麗의 對倭交涉과 그 意味 새로운 對外戰略의 추진 배경과 내용에 대한 재검토」 『韓國古代史探究』 2, 2009, pp.84~85R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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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의 파견은 그러한 기능과 지식을 필요로 한 왜국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도래인’은 바다라는 자연장애물로 대륙과 격해 있다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열도가 고대 동아시아세계에 포함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의 파견과 정착에는 한반도의 3국과 일본열도의 왜국 사이에 전개된 대외전략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 각주 084)
    관련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3세기까지의 이주민은 弥生문화의 전개와 관련, 在來人과의 동화에 의해 왜인이 되었기에 도래인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加藤謙吉(1986), 「渡來人」 『古代史硏究の最前線』(第1卷, 政治·經濟編 上), 雄山閣, 56~57쪽RISS). 또한 도래씨족 ‘왜한씨(倭漢氏)’와 ‘진씨(秦氏)’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들은 5세기 무렵 분산적으로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주민으로 야마토 정권의 외교·군사·재무 등 분야의 관료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이들 구래의 도래인이 소지한 기술과 문화는 왜국의 불교 수용과 관련하여 백제가 제공한 새로운 사찰 조영기술·문화와 혼합되어 일본열도의 불교발전에 기여하였다. 관련 내용은 田中史生(2008), 「百濟王興寺と飛鳥寺と渡來人」 『東アジアの古代文化』(特輯 文化交流の古代史) 136RISS을 참조하라. 바로가기
  • 각주 085)
    이와 관련하여 주변민족의 중국문화 수용에는 중국 왕조와 주변국의 관계만이 아니라 주변민족 상호간의 관계가 생각 이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는 지적이 있다(이성시a(2001), 앞의 책, 166~179). 여기에서 신라의 율령과 한자문화가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바로가기
  • 각주 086)
    田中史生b (2005), 『倭國と渡來人 交錯する「內」と「外」 』, 吉川弘文館, 49쪽.RISS 바로가기
  • 각주 087)
    ① “高麗僧慧慈歸化 則皇太子師之 是歲 百濟僧慧聰來之 此兩僧 弘演佛敎 並爲三寶之棟梁” (『日本書紀』 卷22, 推古 3年 5月 戊午條한국사DB).
    ② “是時 高麗國大興王 聞日本國天皇造佛像 貢上黃金三百兩” (『日本書紀』 卷22, 推古 13年 夏四月 辛酉朔條한국사DB). 바로가기
  • 각주 088)
    혜자가 왜국에 간 것은 영양왕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坂元義種, 「推古朝の外交 とくに隋との關係を中心に」 『歷史と人物』 100, 1979). 그의 渡倭와 왜국에서의 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양국 관계가 긴밀해져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것이 570년 이래 고구려가 왜국을 상대로 전개했던 대왜외교가 거둔 성과였다(李成制f, 「570年代 高句麗의 對倭交涉과 그 意味 새로운 對外戰略의 추진 배경과 내용에 대한 재검토」 『韓國古代史探究』 2, 2009, pp.84~85RISS).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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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자료번호 : edeah.d_0002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