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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이동과 동아시아 세계형성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관점

Ⅱ. 인구 이동과 동아시아 세계형성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관점

인구 이동의 문제는 주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문화 교류를 다루는 논의에서 주목되어온 주제이다. 고대 한국·중국·일본 지역의 문화 교류와 관련하여 인구 이동에 대한 이해에는 이제까지 두 가지 커다란 경향이 있어왔다. 하나는 중국에서 만주·한반도로 유입된 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삼한(三韓)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삼국(三國)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정치·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서 일본열도(日本列島)로의 인구 이동에 주목하여, 이들이 일본 고대국가(古代國家)의 형성에 기여한 바가 컸음을 강조하는 이해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주한 지역은 무주공산의 공백지가 아니어서 다른 국가 혹은 일정한 정치적 성장을 이룬 토착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4세기 초 북중국에서는 5호의 난립으로 인해 많은 이주민이 발생하였다. 이들 중 적지않은 수가 고구려(高句麗)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고구려에의 정착을 바라고 동(東)으로 향했지만, 모든 이주민이 고구려에 살게 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집단적 인구 이동에는 이들을 수용·정착케 해준 해당 지역의 국가 혹은 토착민의 의지·의도가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이들 국가 혹은 주민의 존재를 경시하고 집단적 인구 이동이 가져온 변화상만을 강조한다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역사상이라 말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집단적 인구 이동을 몰고 온 국제정세의 변동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였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위의 사례로 보면, 고구려가 이들 이주민을 수용한 것은 그러한 유이민이 발생하게 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새로운 정세에 걸맞는 대외전략이 마련되었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 이주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적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 두 가지에 주의하면서 인구 이동을 이해한다면, 자의와 타의에 의해 많은 이들이 오갔던 이 시기의 유동적인 상황과 그 결과로서의 각 지역의 정치적 성장과 문화 교류의 양상도 자연스럽게 살펴볼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결과가 동아시아라는 지역 세계의 형성이라고 조심스럽게 가설을 세우고 싶다. 즉 중국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가 그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영향을 주는, 서로 연동된 국제관계를 보였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이르러 동아시아가 하나의 지역 세계를 이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정을 한국사의 시점에서 살펴보면, 인구 이동의 양상을 고려할 때 다음의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낙랑군(樂浪郡)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 등 중국 군현과의 평화적·폭력적 교섭 아래 발전하고 있던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 초기로 기원후 1세기에서 3세기 무렵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국제정세의 주요한 변화로는 후한(後漢)위키백과이 삼국의 분열로 나아갔고 흉노를 대신하여 선비(鮮卑)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가 위세를 떨쳐 북방(北方) 유목세계(遊牧世界)를 장악하고 요하(遼河)위키백과위치 일대로 세력을 확장해오고 있었다. 이 점에서 중국 군현의 설치에 따른 군현세력과의 접촉이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의 국가적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시기에 해당한다. 다만 그것이 대규모의 인구 이동에 따른 것이 아니며, 군현을 상대한 측의 자발적인 교섭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였다는 점에 유의해서 보아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먼저 군현세력의 유입시기 만주·한반도 지역국가들이 보인 대응에 관심을 기울여 보겠다.
두 번째 시기는 앞서 언급한 5호16국의 등장이 남북조시대로 이어지면서 지역 간 충돌과 교섭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남북조를 상대로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만주와 한반도의 삼국은 불교의 수용을 비롯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책봉·조공(冊封朝貢)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 세계라는 하나의 지역 세계가 형성되는데 필요한 제반 요소를 갖추어 갔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에는 주목이 가는 인구 이동의 흐름이 나타난다. 요하를 건너 고구려로 유입된 중국계 이주민과 낙랑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대방군(帶方郡)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한국사DB 고지(故地)의 유민(遺民)들이다. 전자는 그 유입의 흐름이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났으며 무엇보다 중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존재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특히 이들은 제1기의 시기 이래 이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두 번째 시기의 급변하고 있던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고구려와 이 두 집단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국가전략을 반영한 것인지도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6세기 후반 이후 중국에 수(隋)위키백과와 당(唐)위키백과이라는 통일국가가 차례로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크게 요동치게 된다. 삼국과 왜의 대외전략도 이와 연동되어 기민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열도에는 일본학계가 ‘도래인(渡來人)’RISSRISS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이 나타난다. 이 인구 이동의 결과, 일본열도의 왜국(倭國)은 삼국에 뒤이어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도래인과 일본열도의 관계는 만주·한반도 지역의 그것과 비교하여 볼 때 어떤 특징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도래인은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가지는 것일까 하는 점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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