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양(吳陽), 오(敖), 요왕(繇王) 거고(居股)가 여선을 죽이고 횡해장군 한열(韓說)에게 항복하였으며 전투성과에 따라 책봉을 받음
이전 월연후(粵衍侯)
주 001
오양(吳陽)은 전에 한나라에 머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한 조정에서는 그를 보내 여선을 회유하였으나 여선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횡해장군이 당도하자 월연후
오양은 자신의 읍인(邑人) 700여 명과 함께 여선에게 반기를 들고 한양(漢陽)
주 002에서 월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전 월의 건성후(建成侯)
오(敖)
주 003와 요왕(繇王) 거고(居股)가 모의하여 함께 여선을 죽이고, 그 무리를 이끌고 횡해군(橫海軍)주 004에 항복하였다. 거고(居股)는 동성후(東成侯)
주 005로 식읍 만호에 봉해졌으며, 오(敖)는 개릉후(開陵侯)
주 006에, 오양(吳陽)은 묘석후(卯石侯)
주 007에,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은 안도후(按道侯)에, 횡해교위(橫海校尉) 유복(劉福)은 요영후(繚嫈侯)
주 008에 봉해졌다. 복은 성양왕(城陽王)주 009의 아들인데, 이전에 해상후(海常侯)
주 010였다가 위법하여 후작을 잃었었다. 종군하여 공을 세우지 못했으나 종실인 까닭에 후가 되었다. 그리고 동월의 장수인 다군(多軍)
주 011은 한나라 군대가 도착하자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항복해서 무석후(無錫侯)
주 012에 봉해졌다. 이전 구락(甌駱)의 장수 좌황동(左黃同)
주 013은 서우왕(西于王)주 014
각주 014)
을 참하여 하부후(下鄜侯)
주 015에 봉해졌다.주 016
西于王 :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西越王이다. 箋文에는 于가 亏 혹은 雩로 표기되는데, 『漢書』는 古字를 대부분 사용하여 모두 雩로 표기, 隷書와 楷書로는 粤로 표기하였다. 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交阯外域記』에 安陽王이 甌駱지역을 정복한 뒤 交阯의 西于縣에 도읍을 세웠는데, 이 西于縣은 西于王의 옛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西于王은 安陽王에게 쫓겨나 북쪽 桂林의 甌駱지역으로 옮겨 살다가 武帝의 남월 정복 때 甌駱의 장수 左黃同에게 살해되었다(徐仲舒, 「交阯外域記蜀王子安陽王史適箋證」, 『四川大學學報』 叢刊第5輯, 2004-5). 둘째, 西甌王이다. 조타는 남월국을 세운 뒤 진대 설치된 상군에 교지와 구진군을 설치하고, 또 교지를 나눠 ‘西于王’에 분봉, 西于는 곧 西甌라고 한다(黃淼章, 『南越國』, 廣東人民出版社, 2004).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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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7)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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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西于王 :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西越王이다. 箋文에는 于가 亏 혹은 雩로 표기되는데, 『漢書』는 古字를 대부분 사용하여 모두 雩로 표기, 隷書와 楷書로는 粤로 표기하였다. 3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交阯外域記』에 安陽王이 甌駱지역을 정복한 뒤 交阯의 西于縣에 도읍을 세웠는데, 이 西于縣은 西于王의 옛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西于王은 安陽王에게 쫓겨나 북쪽 桂林의 甌駱지역으로 옮겨 살다가 武帝의 남월 정복 때 甌駱의 장수 左黃同에게 살해되었다(徐仲舒, 「交阯外域記蜀王子安陽王史適箋證」, 『四川大學學報』 叢刊第5輯, 2004-5). 둘째, 西甌王이다. 조타는 남월국을 세운 뒤 진대 설치된 상군에 교지와 구진군을 설치하고, 또 교지를 나눠 ‘西于王’에 분봉, 西于는 곧 西甌라고 한다(黃淼章, 『南越國』, 廣東人民出版社, 2004).
- 각주 015)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월연후(粵衍侯), 오양(吳陽), 여선, 여선, 월연후, 오양, 여선, 건성후(建成侯), 오(敖), 거고(居股), 여선, 거고(居股), 동성후(東成侯), 오(敖), 개릉후(開陵侯), 오양(吳陽), 묘석후(卯石侯), 한열(韓說), 안도후(按道侯), 유복(劉福), 요영후(繚嫈侯), 복, 해상후(海常侯), 다군(多軍), 무석후(無錫侯), 좌황동(左黃同), 하부후(下鄜侯)
- 지명
- 한나라, 한, 한양(漢陽), 월나라, 월,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