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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미키)

진기촌(秦忌寸; 하타노이미키)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우즈마사노키미노스쿠네)와 같은 조상이다.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후손이다. 공지왕(功智王), 궁월왕(弓月王)이 예전천황(譽田天皇)[시호는 응신(應神)이다.] 14년에 내조하였다. 표를 올려 다시 귀국하여 127현의 백성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아울러 금은옥백(金銀玉帛) 등 여러 종류의 보물을 바쳤다. 천황이 이를 기뻐하여 대화(大和)의 조진간(朝津間) 액상(腋上) 땅을 주어 거주하게 하였다. 아들은 진덕왕(眞德王)이고, 다음은 보통왕(普洞王)[고기(古記)에 포동군(浦東君)이라 한다.]이다.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시호는 인덕(仁德)이다.]의 치세에 성을 주어 파타(波陀)라고 하였다. 지금의 진(秦) 자의 훈이다. 다음은 운사왕(雲師王)이고, 다음은 무량왕(武良王)인데 보통왕의 아들 진주공(秦酒公)이다. 대박뢰치무천황(大泊瀨稚武天皇)[시호는 웅략(雄略)이다.]의 시대에 진(秦)이라 칭하였다. 보통왕 때에 진민(秦民)이 모두 미움을 받아 지금 보이는 사람은 열 중에 하나도 없다. 칙사를 보내어 불러모으도록 청하였다. 천황이 소자부뢰(小子部雷)를 보내어 대우(大隅), 아다(阿多)의 준인(隼人) 등을 이끌고 진씨(秦氏)92부 18,670인을 불러모아 드디어 술을 하사하였다. 여기에 진민을 이끌고 누에를 치고, 명주를 짜서 바구니에 담아 천황에게 공진하였다. 산악과 같이 조정에 (공물을) 쌓으니 천황은 이를 기뻐하여 특별히 은혜를 베풀고 호를 내려 우도만좌(禹都萬佐)라고 하였다. 이것은 쌓여서 이익이 있다는 뜻이다. 진씨(秦氏)들로 하여금 궁궐 옆에 8장의 대장(大藏)을 짓게 하여 공물을 납입시켰다. 이에 그 이름을 장곡조창궁(長谷朝倉宮)이라 불렀다. 이때에 비로소 대장의 관원을 두고, 주(酒, 진주공)를 장관으로 삼았다. 진씨 등 같은 조상의 자손들은 거주나 직무에 따라 여러 지족으로 갈라졌다. 천평(天平) 20년에는 경기(京畿)에 있는 자에게 모두 새로 이미길(伊美吉; 이미키)의 성을 주었다.
 
【주석】
1. 진기촌(秦忌寸)
진(秦)의 씨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 조(740) 참조.
진기촌의 옛 성은 조(造)이다. 『일본서기』 천무(天武) 12년(683) 9월조에 진조(秦造)가 연(連) 성을 받았고, 동 천무 14년(685) 6월조에는 진련(秦連)이 기촌(忌寸)으로 개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기촌의 일족으로는 진대진부(秦大津父)가 있다. 『일본서기』 흠명(欽明) 즉위전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천황이 어릴 적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천황께서 진대진부라는 자를 총애하시며, 커서 반드시 천하를 다스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사자를 보내 찾게 하니 산배국(山背國) 기군(紀郡)의 심초리(深草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씨명이 과연 꿈에서 본 바와 같았다. 이에 기뻐함이 가득하고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꿈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묻자, “(진대진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이세(伊勢)로 가서 장사하고 돌아올 때, 산에서 두 마리 늑대가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말에서 내려 입과 손을 씻고 기도하며 ‘너희는 귀한 신(神)이나 거친 행동을 즐긴다. 만약 사냥꾼을 만난다면, 반드시 잡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서로 다투는 것을 그치게 하고 피 묻은 털을 닦아 준 후에 놓아 주어 함께 생명을 보전하게 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천황이 반드시 이 보답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시 근시하도록 하니 나날이 총애를 더하여 크게 유복하게 되었다. 천황이 제위에 오르자, 대장성(大藏省)을 맡게 하였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동 흠명기 원년(540) 8월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 물품을 바치고 아울러 공직을 닦았다. 진인(秦人), 한인(漢人) 등 제번(諸蕃)의 투화자를 불러모아 국군(國郡)에 안치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진인의 호수는 총 7,053호였다. 대장연(大藏掾)을 진반조(秦伴造)로 임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장연은 진대진부이다.
진씨 일족인 진조하승(秦造河勝)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추고(推古) 11년(603) 11월조에 “황태자는 모든 대부들에게 ‘나에게는 존귀한 불상이 있다. 누가 이 불상을 얻어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때 진조하승이 나와서 ‘제가 예배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불상을 받았다. 그리고 봉강사(蜂岡寺)를 세웠다. 황태자가 천황에게 청하여 큰 방패와 화살통을 만들고, 또 깃발에 채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 추고 18년(610) 10월조에는 신라 사신이 왔을 때 신라사를 인도하는 영접의 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황극(皇極) 3년(644) 7월조에는 “이때 갈야(葛野)의 진조하승은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을 걱정하여 대생부다(大生部多)를 타도하였다. 무격들은 두려워하여 사람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진(太秦)이 신 중의 신이라는 평판이 높은 저 상세의 신을 때려 징계한 일이여.’라는 노래를 지었다”라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진하승(秦河勝)은 용명(用明)의 사후 물부수련(物部守屋) 토벌전에 성덕태자 편으로 가담하여 승리를 이끈 일화도 전하고 있다. 『상궁성덕태자전보궐기(上宮聖德太子傳補闕記)』 에는 “진천승(秦川勝, 秦河勝)은 군대를 이끌고 태자를 보위하였다. 관군의 기세가 쇠퇴해짐을 보고 달려가 태자와 모의하였다. 즉 진천승에게 백규목(白樛木)을 채취하여 사천왕상을 만들어 높이 세우게 하였다. 태자는 스스로 용사들을 이끌고 적들을 추격하였다. 적들은 물부부도대신(物部府都大神)의 활을 버리고 태자의 진영으로 투항하였다. 태자는 사천왕의 활을 쏘아 적의 우두머리 대련(大連)의 가슴에 명중시켰다. 진천승은 대련의 목을 베고 소장군(少將軍)은 잔당을 평정하였다. 평군신신수(平群臣神手), 군정인(軍政人) 진조천승(秦造川勝) 등 3인에게 새로이 위계를 만들어 신수(神手)는 소덕(小德), 천승(川勝) 등은 대인(大仁)으로 서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하승이 불교 공인을 둘러싼 내전에 병력을 이끌고 성덕태자를 호위하면서 적장 물부대련수옥(物部大連守屋)의 머리를 베어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 등에는 보이지 않지만, 진하승이 성덕태자의 불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의 측근으로서 불교 공인을 위한 종교전쟁에 참여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 『상궁성덕법왕제설』 「태자기칠사(太子起七寺)」 조에도 천승진공(川勝秦公)의이름이보인다. 『조야군재(朝野群載)』 소인 승화(承和) 5년(838) 11월 25일부의 「광륭사연기(廣隆寺緣起)」에는 추고천황(推古天皇) 즉위 30년(622)에 성덕태자를 위해 대화상(大花上) 진조하승(秦造河勝)이 세웠다고 하며, 인화(仁和) 3년(887) 『광륭사자재교체실록장(廣隆寺資財交替實錄帳)』 에도 이 절은 추고천황 치세 30년에 대화상(大花上) 진조하승(秦造河勝)이 성덕태자를 위해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광륭사는 실제로는 진조하승이 건립한 진씨의 씨사(氏寺)이다.
한편 『정사요략(政事要略)』 권54에 인용된 〈진씨본계장(秦氏本系帳)〉에는 “갈야대언(葛野大堰)를 만드는 일을 천하의 누구에 비할 바인가, 이는 진씨가 일족을 이끌고 이룩한 것이다. 옛날 진 소왕(昭王)이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1만 경을 만들어 진의 부를 수 배 늘렸다. ……지금 대정(大井)의 제방은 그에게 배워 만든 것이다”라고 하듯이 갈야천(葛野川, 桂川)에 거대한 제방을 만들고 관개용수를 공급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킨 진씨의 공로를 예찬하고 있다. 대판평야(大阪平野)의 개척에 대해서도 『고사기』 인덕천황단(仁德天皇段)에는 진인(秦人)이 자전제(茨田堤)와 자전삼택(茨田三宅)의 조영에 종사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 11년 10월조에는 “북쪽 하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자전제(茨田堤)를 쌓았다”라고 한다. 이 자전제와 자전삼택 조영과 대응하는 기록이 『고사류원(古事類苑)』 지부(地部) 〈하내지십자전군(河內志十茨田郡)〉에는 향명(鄕名)으로 ‘번다(幡多)’의 명칭이 보인다. 번다는 하타[秦]이고, 번다향(幡多鄕)이란 진향(秦鄕)으로 이 일대에는 고대에 진씨가 거주하면서 정천(淀川)의 치수 등을 관리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과 기록은 진씨가 왕성한 식산씨족(殖産氏族)으로서 갈야(葛野)뿐 아니라 하내(河內) 지역에도 미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갈야(葛野)는 압천(鴨川)과 계천(桂川)의 범람 지역이다. 진씨가 그 일대의 개척에 힘쓴 것에 대해서는 『영집해(令集解)』 에도 하천 수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갈야천언(葛野川堰)을 거론하고 있다(“假令, 葛野川堰之類, 是以用水之家不合堪修治也”). 또 〈진씨본계장〉에는 갈야대언이 진의 소왕이 조영한 도강언(都江堰)의 위업을 모방했다고 하면서 연력(延曆) 19년(800)에는 산성(山城), 대화(大和), 하내(河內), 섭진(攝津), 근강(近江), 단파(丹波)의 6국으로부터 백성 1만 명을 징발하여 수리했을 정도로 거대한 시설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진대진부는 『일본서기』 흠명 즉위전기에 커다란 경부(鏡富)를 이룩하여 후에 천황에게 근시해서 출납의 직무를 맡을 수 있었다. 『성덕태자전력』 에도 ‘부요가(富饒家)’라고 하였듯이 그 재력에 의해 성덕태자의 측근으로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재부의 축적은 기술력에 의한 토지 개발로 더욱 발전하였고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대장(大藏) 관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2.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
『신찬성씨록』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 조(740) 참조.
3. 진시황제지후(秦始皇帝之後)
『일본삼대실록』 정관(貞觀) 5년(863) 9월조에 산성국(山城國) 갈야군(葛野郡) 사람 도서대윤(圖書大允) 종6위상 진기촌춘풍(秦忌寸春風), 단마소목(但馬少目) 정8위상 진기촌제장(秦忌寸諸長) 등 3인에게 시원숙녜(時原宿禰)의 씨성을 하사하였고, 그들의 선조는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 공지왕(功智王)
「태진공숙녜」 조(740) 등에 보이는 진시황의 후손으로 나오는 공만왕(功滿王)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5. 대화조진간액상(大和朝津間腋上)
조진간은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 22년 정월조에 아좌두마(阿佐豆磨), 동 윤공기(允恭紀) 즉위전기에 윤공의 이름이 조진간(朝津間)으로 나오며, 『만엽집』(10-1818)의 조처(朝妻) 등에 보이듯이 지명이다. 현 나량현(奈良縣) 어소방(御所市) 조처(朝妻)이다. 액상(腋上)은 나량현 어소시(御所市) 본간(本間), 지지내(池之內) 일대이다.
6. 운사왕(雲師王), 무량왕(武良王)
이 인명은 기타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7. 진공주(秦公酒)
『신찬성씨록』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 조(740) 진공주(秦公酒) 참조.
8. 천황견사소자부뢰(天皇遣使小子部雷)
이 부분은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6년(462) 3월조에 “천황은 후비에게 몸소 뽕을 따서 누에치는 일을 권하고자 하였다. 이에 과라(蜾蠃)에게 국내의 누에를 모으도록 명하였다. 과라가 잘못하여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이 크게 웃으며 어린아이들을 과라에게 주며 “네가 스스로 길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과라가 곧 어린아이들을 궁의 담 근처에서 키웠다. 그래서 성을 내려 소자부련(少子部連)이라고 하였다”라고 하는 전승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찬성씨록』 좌경 황별(상) 「소자부숙녜(小子部宿禰)」 조(078) 참조.
9. 진씨구십이부일만팔천육백칠십인(秦氏九十二部一萬八千六百七十人)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15년(471)조에 “진민(秦民)을 모아 진주공(秦酒公)에게 주어 진주공이 180승을 통솔하여”라는 기록이 있고, 『고어습유』 에도 진주공이 180승부(勝部)를 통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일본서기』 흠명기 원년(540) 8월조에도 진인(秦人)의 호수가 총 7,053호라는 관련 기록이 보인다.
10. 우도만좌(禹都萬佐)
『신찬성씨록』 좌경 제번(상) 「태진공숙녜」 조(740) 참조.
11. 수복(數腹)
복(腹)은 혈연, 동족 계통을 의미한다. 『신찬성씨록』 일문(逸文)에 형복조(兄腹祖), 중복조(中腹祖), 제복조(弟腹祖) 등의 용례가 보인다. 『속일본기』 보귀(寶龜) 3년 4월조에 ‘삼복(三腹)’이 나오고, 동 연력(延曆) 9년 12월조에도 ‘사복(四腹)’의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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