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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영안도 경차관 조위가 치계하여, 삼봉도에 들어가는 자와 날짜 등을 아뢰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479년 10월 30일(음)
  • 출전
사료해설
동해에 울릉도와 독도와 다른 삼봉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서는 섬주민의 쇄환을 결정하고, 쇄환을 위해 삼봉도(三峯島)에 들어가기를 자원하는 함경도인 32명을 선발하여 마상선(麻商船)에 태워 파견하였다. 이 사료는 영안도(함경도) 경차관 조위가 마상선을 타고 삼봉도에 들어갈 사람과 병선의 출발 날짜 등을 아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울릉도 쇄환 정책 이후에도 조선정부가 동해와 동해의 섬에 대한 탐색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원문
○永安道敬差官曺偉馳啓曰: “三峯島自願入去人, 於諸邑宣布事目, 廣諭召募, 吉城六名、明川四名、鏡城十四名、富寧八名, 合三十二名, 麻尙船, 則亦於諸邑擇取體大。 且前此逃去嚴永山族親, 則時未聞見, 故更移會寧府, 窮極訪問, 嚴永山一時逃去金貴實之兄, 會寧居良人金長命, 李奉生族親富寧居甲士李仲善二名, 將以入送, 竝令治裝。 前此逃去現捉被囚人等, 皆願入歸, 而劉六生、李枝, 則本船上慣熟, 故亦令治裝。 餘自願人內, 金漢京, 則三度往還, 自稱熟知, 鏡城居護軍崔興、司直金自周亦言: ‘李克均觀察時, 以看審事, 再度入歸, 遙望還來。’ 金自周, 則非唯解文, 身彩言語可取, 故今欲作頭入送。 將於本月二十七日, 富寧南面靑巖海邊發船, 其入送數, 自願人內揀擇送麻尙船, 亦與節度使同議, 量數入送。
번역문
영안도 경차관(永安道敬差官) 조위(曺偉)가 치계(馳啓)하기를,
“삼봉도(三峯島)에 들어가기를 자원하는 사람을 여러 고을에 사목(事目)을 선포(宣布)하고 널리 유시(諭示)하여 모집하였던 바, 길성(吉城)에 6명, 명천(明川)에 4명, 경성(鏡城)에 14명, 부령(富寧)에 8명, 합계 32명이며, 마상선(麻商船)은 역시 여러 고을에서 선체(船體)가 큰 것을 골라 취하였습니다. 또 이보다 먼저 도망해 간 엄영산(嚴永山)의 족친(族親)은 이에 아직 듣고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회령부(會寧府)로 옮겨서 끝까지 찾아 보겠으며, 엄영산과 같은 때에 도망해간 김귀실(金貴實)의 형으로 회령에 사는 양인(良人) 김장명(金長名)과 이봉생(李奉生)의 족친으로 부령(富寧)에 사는 갑사(甲士) 이중선(李仲善)의 2명은 장차 들여보내려고 모두 장비를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이보다 먼저 도망해 가다가 붙잡혀서 갇힌 사람들이 모두 들어갔다가 돌아오기를 원하는데, 유육생(劉六生)과 이지(李枝)는 본래 배에 익숙하기 때문에 역시 장비를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나머지 자원한 사람 가운데 김한경(金漢京)은 세번이나 갔다가 돌아와서 익숙하게 안다고 스스로 일컫고, 경성(鏡城)에 사는 호군(護軍) 최흥(崔興)과 사직(司直) 김자주(金自周)도 말하기를, ‘이극균(李克均)이 관찰사로 있을 때에 살펴보는 일로 두 번 들어갔다가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김자주는 글을 알 뿐만 아니라 풍채와 언어가 취할 만하기 때문에 이제 우두머리로 삼아서 들여보내려고 합니다. 장차 이 달 27일에 부령(富寧) 남면(南面)의 청암(靑巖)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키려고 하는데, 그 들여보내는 수(數)는 자원한 사람 가운데에서 골라 보내며 마상선(麻尙船)도 절도사(節度使)와 같이 의논하여 수를 헤아려서 들여보내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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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도 경차관 조위가 치계하여, 삼봉도에 들어가는 자와 날짜 등을 아뢰다 자료번호 : sd.d_0149_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