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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진한(辰韓)

진한주 001
번역주 001)
辰韓 : 진한은 기원 전후부터 4세기 무렵까지 대체로 지금의 낙동강 동쪽 경상도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정치집단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12개의 소국이 보이며 규모가 큰 것은 4,000~5,000家, 작은 것은 600~700가 정도였다고 한다. 진한을 『삼국지』에는 辰國의 후신이라고 기록하였는데, 『후한서』에는 진국이 진한뿐만 아니라 삼한 전체의 전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망명인으로 秦나라의 苦役을 피해 韓으로 왔는데,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한은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반 사이에 斯盧國에 통합되어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하였다(주보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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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주 002
번역주 002)
辰韓在馬韓之東 : 『후한서』 한전에는 “辰韓在東”이라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삼국지』 진한전의 “辰韓在馬韓之東”을 옮긴 것으로, 『진서』의 본 문장은 진한의 기원 기사인 ‘古亡人’ 기사와 연결되는 점에서 『삼국지』 진한전과는 서술상의 위치와 구조가 같다(신현웅, 2005). 진한은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즉위년조에 ‘탈해가 진한의 阿珍浦口에 이르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해안을 따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사』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八域志』 등에 진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다고 하며, 한백겸의 『東國地理志』나 안정복의 『東史綱目』에서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현재는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에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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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말하기를 진주 003
번역주 003)
秦 : 기원전 771~기원전 221년 사이에 중국에 분립한 여러 소제후국 중 하나로, 전략적 요지인 渭水 유역을 점령했다. 기원전 3세 기 중반에서 기원전 2세기 말 사이에 秦國公은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엄격한 법률체계를 만들고 전국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다스리는 군·현을 설치하는 등 권력을 집중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개혁을 바탕으로 서서히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47년 嬴正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재상인 李斯와 함께 정복사업을 완성하고 기원전 221년 진 제국을 세웠다. 또한 스스로를 始皇帝라고 칭하고,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폈다. 서체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도 정비했다. 또한 봉건적인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13년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사상들을 없애기 위해 醫書와 같은 실용적인 서적들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사르게 했다. 이러한 가혹한 조치와 전쟁과 건설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피폐해졌고 결국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났다. 진은 기원전 206년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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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망명인으로 [진의] [노]역을 피해 한에 들어왔는데,주 004
번역주 004)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 『삼국지』 동이전의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을 『후한서』에서는 “秦之亡人 避苦役適韓國”이라 하였다. 이후 『후한서』의 내용을 『진서』·『양서』·『남사』·『북사』와 『한원』, 『太平寰宇記』와 『册府元龜』·『通典』 등이 따랐다. 『후한서』에는 『삼국지』의 “옛날 유망인들이 진나라의 役을 피하여(古之亡人避秦役)” 부분에서 그 실체가 불분명한 ‘古之亡人’을 ‘秦人’으로 보았는데, 이는 뒤이어 나오는 ‘秦役’으로 짐작하였다. 그리고 ‘진역’의 성격을 ‘苦役’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한에 온 이들이 秦人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삼국지』가 편찬된 당시에 “진한의 언어가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진한을 秦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것을, “진한의 언어가 秦語와 비슷하므로 달리 秦韓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辰韓 사람들은 유망한 진나라 사람들로서 진나라와 비슷한 말을 쓰기 때문에 秦韓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후한서』의 秦人 유망설은 『삼국유사』에 소개되어, 진한(신라)의 기원설 중 하나인 秦流亡人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옛날 秦의 전쟁을 피하여 유망한 사람”이라는 기사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중국 유망인의 남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한반도 남하는 아니다. 秦役을 피해서 한반도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곧 넓은 의미의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생긴 유민으로 보기도 한다(이현혜, 1984). 그런데 위만조선의 멸망 시기는 亡人들이 진역을 피해 온 시기보다 100여 년 늦다. 반면에 준왕의 남래 시기는 기원전 194년이어서 진망인의 발생 시기와는 10여 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노중국, 2007). 『진서』 역시 『후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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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주 005
번역주 005)
韓割東界以居之 : 『삼국지』 진한전에는 “馬韓割其東界地與之”, 『후한서』 한전에는 “馬韓割東界地與之”로 나오므로 『진서』의 한은 마한임을 알 수 있다. 마한이 동쪽 경계를 떼어주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진한이 마한보다 열세였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 철기를 반출하지 않는 청동기가 중심이 된 반면에 경상도 일대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철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였다(이현혜, 1984). 한국 건국신화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신라는 그 계통이 다르다(趙芝薰, 1996). 따라서 본문의 기사는 유이민이 내려올 때 마한을 경유하였을 가능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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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성책을 세웠으며주 006
번역주 006)
城柵 : 『진서』 신라전의 ‘立城柵’에 대해서 『삼국지』 진한전에는 “有城柵”, 『후한서』 한전에는 “有城柵屋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 마한전에서는 “無城郭”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진한과 마한을 이룬 사회구성원이 다름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책은 성과 그 주위에 둘러싸인 나무 울타리, 즉 木柵을 말한다. 목책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성이다. 삼한 지역에서 성곽(성책)의 발전은 대체로 방어취락에서 토성으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남 지역에서 성곽의 기원은 창원 남산유적, 진주 대평리유적, 울산 검단리유적 등 청동기시대 취락유적의 외부를 둘러싼 환호에서 비롯된다. 선사시대 환호가 발전된 형태는 양산 평산리 마을유적에서 보이고 있는데, 구상유구를 중심으로 내측에는 목책열이 구상유구와 나란히 진행되고, 외부로는 구상유구 굴토 과정에서 나온 흙을 쌓아올리는 등 3중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또한 어긋문 형태의 문지 및 문지 주변에서 출입을 통제할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토성의 초기적인 모습과 연결되며 이 유적 내부의 주거지는 출토유물로 보아 2세기경으로 편년되고 있다(서영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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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여 이로 말미암아 혹은 그들을 일러 진한이라고 하 였다.주 007
번역주 007)
言語有類秦人 由是或謂之爲秦韓 : 『삼국지』와 『후한서』에 “有似秦人(語)” 즉 秦나라 사람의 언어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진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반면 『양서』와 『남사』·『북사』에는 진한의 언어에 대해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秦韓은 진한의 기원에 대한 4가지 설, 곧 秦유망인설, 고구려잔민설, 변한후예설, 燕人망명인설 가운데 진유망인설에 따른 명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후한서』·『양서』·『진서』·『남사』·『북사』 그리고 『한원』, 『책부원구』·『통전』 등에서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秦韓의 명칭은 진의 유망민이라는 전승 외에 진한의 언어가 마한과 다르고 중국 진나라 사람들과 유사하다는 『삼국지』·『후한서』 이래의 전승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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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6국이 있었는데, 이후에 점점 나누어져 12국이 되었다.주 008
번역주 008)
初有六國 後稍分爲十二 : 『삼국지』 진한전의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을 옮긴 것이다. 『후한서』 한전에는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으로 나온다. 진한이 처음에 6국이었다가 12국으로 나오는 것은 고조선 유민들이 남하해 諸國이 형성된 이후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이부오, 2012). 처음의 6국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2국과 관련해서는 『삼국지』 변진전에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고 하였다. 이 중 진한 12국은 ① 己柢國(안동 또는 풍기 基木鎭), ② 不斯國(창녕), ③ 勤耆國(영일 또는 청도), ④ 難彌離彌凍國(의성군 단밀면 또는 창녕군 영산), ⑤ 冉奚國(울산시 염포 또는 대구), ⑥ 軍彌國(사천군 곤양 또는 칠곡군 인동), ⑦ 如湛國(군위 또는 의성군 탑리), ⑧ 戶路國(상주군 함창면 또는 영천), ⑨ 州鮮國(경산군 자인 또는 경산 압독국), ⑩ 馬延國(밀양), ⑪ 斯盧國(경주 일대), ⑫ 優由國(청도 또는 울진)이다(이병도, 1976 ; 천관우, 197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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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변진이 있는데, 역시 12국이었으며주 009
번역주 009)
又有弁辰 亦十二國 : 『진서』의 편자는 변한과 진한이 합해서 12국이라고 하였지만,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고 하였다. 『후한서』 한전에는 “辰韓 … 十有二國”으로 나온다. 따라서 여기에서 변진 12국이라고 한 것은 변한 12국을 말한다. 변한 12국과 관련해서 『삼국지』 변진전에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고 하였다. 이 중 弁辰 12국은 彌離彌凍國(밀양 또는 고령), 古資彌凍國(고성), 古淳是國(산청), 半路國(고령 또는 성주), 樂奴國(하동군 악양), 彌烏邪馬國(창원), 甘路國(개령), 狗邪國(김해), 走漕馬國(함양), 安邪國(함안), 瀆盧國(부산 또는 거제도), 接塗國(칠원)이다(김태식,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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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해서 4만~5만 호로주 010
번역주 010)
合四五萬戶 :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는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진서』에서 변진이 “合四五萬戶”라고 한 것은 진한과 변한이 합쳐진 24국의 총 호수가 4만~5만 호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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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거수가 있으며주 011
번역주 011)
各有渠帥 : 渠帥는 고대 읍락사회의 首長을 말한다.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전에는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라고 하였고, 『후한서』 (진)한전에는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라 하였다. 이로 볼 때 거수는 소별읍을 다스렸는데, 소별읍은 主帥가 근거했다는 마한의 ‘국읍’에 대응한다(이부오, 2012). 그리고 삼한의 거수들은 세력의 크기에 따라 臣智·險側·樊濊·殺奚·邑借로 불렸다. 이처럼 거수는 소국의 수장을 가리키는 君長보다는 다소 격이 낮은 읍락의 우두머리로, 동옥저의 읍락 거수들은 스스로 三老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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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진한에 속했다.주 012
번역주 012)
皆屬於辰韓 : 『삼국지』 변진전에는 “其十二國屬辰王”으로 나온다. 이처럼 『삼국지』의 진왕이 『진서』에서는 진한으로 바뀌었고 『양서』와 『북사』에는 진한왕으로 나온다. 그리고 『통전』·『태평환우기』·『한원』은 『삼국지』를 따르며, 『후한서』에는 辰王을 ‘삼한을 모두 다스리는 辰國王’으로 기술하였다. 이와 같이 진(한)왕 관련 기사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辰王’은 『삼국지』의 계통을 따르는 것(『통전』·『태평환우기』·『한원』)과 『후한서』의 계통을 따른 것, 이들 양 계통과는 달리 ‘辰韓王’으로 표기한 계통(『양서』·『진서』·『북사』)이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공통되는 부분은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렸으며, 마한인으로서 진왕을 삼아 대대로 승계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지』에서 진왕은 진한 지역을 예속하였다고 한 데 대해, 『후한서』에서는 모든 삼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로써 『삼국지』의 기사를 따르게 될 경우 진왕은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통치자로 해석되지만, 『후한서』를 따른다면 삼한 전체를 다스리는 왕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기사대로 진왕을 목지국을 다스린 지배자 정도로 보고 있으며, 목지국은 마한뿐만 아니라 진한 지역까지 통제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진서』를 비롯하여 『양서』와 『북사』에서는 변진 12국은 진한에 속하며, 진한은 항상 마한인으로 왕을 삼아 진한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였다 하는데, 그 이유는 진한인이 유망하여 옮겨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삼국지』의 진왕을 『진서』에서 진한으로 바꾼 것과 관련해서 『진서』 찬자가 진왕을 오기로 판단해 진한으로 수정했다고 하기도 하고(박대재, 2002), 『위략』 원문에 의거해 기술했다고도 하며(신현웅, 2005), 『삼국지』의 진왕을 원래는 한으로 보면서 이것이 『진서』 진한조로 계승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이부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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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하게 하여, 비록 대대로 이어받았지만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설 수 없었는데,주 013
번역주 013)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지』의 ‘진왕’은 『진서』에는 ‘진한’으로 기록하였다. 진왕의 실체와 관련해서는 노중국, 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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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흘러들어온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에 마한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주 014
번역주 014)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 『삼국지』 진한전에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 “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가 주로 처리되어 있다. 조선 유민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마한의 동쪽을 지나왔으므로, 이를 마한의 부용으로 여겼을 것이다. 조선 유민이 남하해 諸國을 세우는 과정에서 마한의 승인과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혁거세거서간 38년(기원전 20)이 관심을 끈다(이부오, 2012). 이로 볼 때 유민이 새로 정착하는 데 있어 마한의 영향력이 상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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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오곡을 기르기에 적합하였으며주 015
번역주 015)
地宜五穀 :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 “土地肥美 冝種五糓及稻”라고 하였다. 『후한서』 진한전에 “土地肥美 宜五穀”이라고 하였다. 오곡의 구체적인 종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稷(조 또는 피), 黍(기장), 麥(보리), 豆(콩)와 麻(삼) 또는 稻(벼)를 말한다(조재영, 1998). 이 중 稻는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책인 『주례』와 『管子』에는 오곡에 들어있는데, 『삼국지』에서 쌀은 5곡의 개념에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후한서』와 『진서』의 오곡 기사는 稻의 기록을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에서 일찍이 김해패총에서 탄화된 쌀이 발견되었고 무문토기에서도 쌀농사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의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라는 표현과 빈번한 수리 관계 기록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삼국지』 단계에서 쌀은 오곡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진서』 단계에서 쌀은 오곡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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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속에 누에와 뽕나무가 충분하여 겸포를 잘 제작했고,주 016
번역주 016)
俗饒蠶桑 善作縑布 : 『삼국지』 변진전에는 “曉蠶桑 作縑布”, 『후한서』 진한전에는 “知蠶桑 作縑布”가 보인다. 이 기록은 일찍부터 진한과 신라에서 뽕나무를 재배하였고 縑布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겸포는 “『석명』에 ‘縑은 兼의 뜻으로, 실이 가늘어서 몇 개의 실을 겹쳐서 布나 絹을 짜는 것이다.” 하였다(『해동역사』 권26, 物産志 布帛類 布). 이와 같은 잠상과 겸포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이래의 산업이 신라에도 그대로 전승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의 “勸督農桑”, 파사이사금 3년(82)의 下令 중 “勸農桑”도 참고된다. 특히 유리이사금 9년(32)의 기사를 보면 8월 15일에 績麻大會가 열리고 있음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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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부리며 말을 탔다. 주 017
번역주 017)
服牛乘馬 : 『삼국지』 변진전과 『후한서』 진한전에 “乘駕牛馬”로 나온다. 『진서』 마한전에는 마한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단지 장사지내는 데 쓰기 위해서이다(不知乘牛馬 畜者但以送葬).”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마한과 진한의 문화적 풍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를 이용함으로써 노동력이 절감되고 깊이갈이를 할 수 있어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신라에서는 “지증왕 3년(502)에 처음으로 우경을 이용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경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이용되어 오고 있던 우경을 국가적으로 장려한 조치하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노례왕(24~57) 때 쇠 보습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축력을 이용한 쟁기 사용이 더 빨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끄는 쟁기인 극젱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는 한 점의 보습도 나오지 않았고 6세기 이후 안변 용성리유적과 진주 옥봉유적에서 둥근 U자형의 보습이 출토되었다(김재홍,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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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습속은 마한과 비슷하였으며주 018
번역주 018)
其風俗可類馬韓 : 『진서』 마한전에는 마한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俗少綱紀 無跪拜之禮 居處作土室 形如冢 其戶向上 擧家共在其中 無長幼男女之別 … 俗不重金銀錦罽 而貴瓔珠 用以綴衣或飾髮垂耳 其男子科頭露紒 衣布袍 履草蹻 … 俗信鬼神 常以五月耕種畢 群聚歌舞以祭神 至十月農事畢 亦如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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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기 또한 마한과 같았다.주 019
번역주 019)
兵器亦與之同 : 『진서』 마한전에는 “활·방패·창·큰 방패를 잘 쓴다(善用弓楯矛櫓).”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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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넓적하게 하였다.주 020
번역주 020)
初生子 便以石押其頭使扁 : 『삼국지』에는 “今辰韓人皆褊頭”, 『후한서』 한전에는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이라고 나온다. 머리 모양[頭形]을 변하게 만드는 頭型變形 풍속은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었다. 변진에서는 돌을 사용한다는 것이 특색이다. 머리를 편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두형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로, 한국인은 대체로 단두형이다.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의 모양을 바르게 잡지 못하면 균형을 깨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은 오늘날에도 민간에서 시행하고 있다. 다만 돌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보조적인 도구의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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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기를 좋아했으며 비파 연주를 잘했다.주 021
번역주 021)
喜舞 善彈瑟 : 『후한서』 한전에는 “俗憙歌舞飮酒鼓瑟”이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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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의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다.
[서진] 무제 태강 원년(280)에 그 왕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태강] 2년(281)에 다시 와서 조공하였고 [태강] 7년(286)에 또 왔다.주 022
번역주 022)
武帝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 復來朝貢 七年又來 : 『진서』 마한전에는 “武帝 太康元年 …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 … 又頻至”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진한뿐만 아니라 마한 역시 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진한왕이 사신을 보내서 진에 조공했다는 기사는 3세기 후반에 와서 사로국의 조공무역 본격화를 반영한다고 이해하였고(이현혜, 1994), 사로국의 급격한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며(이부오, 2012), 『진서』의 조공 기사는 서진 무제의 무공을 현양시키기 위해 과장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윤용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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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辰韓 : 진한은 기원 전후부터 4세기 무렵까지 대체로 지금의 낙동강 동쪽 경상도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정치집단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12개의 소국이 보이며 규모가 큰 것은 4,000~5,000家, 작은 것은 600~700가 정도였다고 한다. 진한을 『삼국지』에는 辰國의 후신이라고 기록하였는데, 『후한서』에는 진국이 진한뿐만 아니라 삼한 전체의 전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망명인으로 秦나라의 苦役을 피해 韓으로 왔는데,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한은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반 사이에 斯盧國에 통합되어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하였다(주보돈, 2002).바로가기
  • 번역주 002)
    辰韓在馬韓之東 : 『후한서』 한전에는 “辰韓在東”이라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삼국지』 진한전의 “辰韓在馬韓之東”을 옮긴 것으로, 『진서』의 본 문장은 진한의 기원 기사인 ‘古亡人’ 기사와 연결되는 점에서 『삼국지』 진한전과는 서술상의 위치와 구조가 같다(신현웅, 2005). 진한은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즉위년조에 ‘탈해가 진한의 阿珍浦口에 이르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해안을 따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사』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八域志』 등에 진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다고 하며, 한백겸의 『東國地理志』나 안정복의 『東史綱目』에서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현재는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에 비정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秦 : 기원전 771~기원전 221년 사이에 중국에 분립한 여러 소제후국 중 하나로, 전략적 요지인 渭水 유역을 점령했다. 기원전 3세 기 중반에서 기원전 2세기 말 사이에 秦國公은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엄격한 법률체계를 만들고 전국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다스리는 군·현을 설치하는 등 권력을 집중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개혁을 바탕으로 서서히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47년 嬴正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재상인 李斯와 함께 정복사업을 완성하고 기원전 221년 진 제국을 세웠다. 또한 스스로를 始皇帝라고 칭하고,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폈다. 서체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도 정비했다. 또한 봉건적인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13년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사상들을 없애기 위해 醫書와 같은 실용적인 서적들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사르게 했다. 이러한 가혹한 조치와 전쟁과 건설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피폐해졌고 결국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났다. 진은 기원전 206년 멸망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4)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 『삼국지』 동이전의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을 『후한서』에서는 “秦之亡人 避苦役適韓國”이라 하였다. 이후 『후한서』의 내용을 『진서』·『양서』·『남사』·『북사』와 『한원』, 『太平寰宇記』와 『册府元龜』·『通典』 등이 따랐다. 『후한서』에는 『삼국지』의 “옛날 유망인들이 진나라의 役을 피하여(古之亡人避秦役)” 부분에서 그 실체가 불분명한 ‘古之亡人’을 ‘秦人’으로 보았는데, 이는 뒤이어 나오는 ‘秦役’으로 짐작하였다. 그리고 ‘진역’의 성격을 ‘苦役’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한에 온 이들이 秦人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삼국지』가 편찬된 당시에 “진한의 언어가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진한을 秦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것을, “진한의 언어가 秦語와 비슷하므로 달리 秦韓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辰韓 사람들은 유망한 진나라 사람들로서 진나라와 비슷한 말을 쓰기 때문에 秦韓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후한서』의 秦人 유망설은 『삼국유사』에 소개되어, 진한(신라)의 기원설 중 하나인 秦流亡人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옛날 秦의 전쟁을 피하여 유망한 사람”이라는 기사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중국 유망인의 남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한반도 남하는 아니다. 秦役을 피해서 한반도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곧 넓은 의미의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생긴 유민으로 보기도 한다(이현혜, 1984). 그런데 위만조선의 멸망 시기는 亡人들이 진역을 피해 온 시기보다 100여 년 늦다. 반면에 준왕의 남래 시기는 기원전 194년이어서 진망인의 발생 시기와는 10여 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노중국, 2007). 『진서』 역시 『후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따랐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5)
    韓割東界以居之 : 『삼국지』 진한전에는 “馬韓割其東界地與之”, 『후한서』 한전에는 “馬韓割東界地與之”로 나오므로 『진서』의 한은 마한임을 알 수 있다. 마한이 동쪽 경계를 떼어주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진한이 마한보다 열세였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 철기를 반출하지 않는 청동기가 중심이 된 반면에 경상도 일대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철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였다(이현혜, 1984). 한국 건국신화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신라는 그 계통이 다르다(趙芝薰, 1996). 따라서 본문의 기사는 유이민이 내려올 때 마한을 경유하였을 가능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城柵 : 『진서』 신라전의 ‘立城柵’에 대해서 『삼국지』 진한전에는 “有城柵”, 『후한서』 한전에는 “有城柵屋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 마한전에서는 “無城郭”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진한과 마한을 이룬 사회구성원이 다름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책은 성과 그 주위에 둘러싸인 나무 울타리, 즉 木柵을 말한다. 목책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성이다. 삼한 지역에서 성곽(성책)의 발전은 대체로 방어취락에서 토성으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남 지역에서 성곽의 기원은 창원 남산유적, 진주 대평리유적, 울산 검단리유적 등 청동기시대 취락유적의 외부를 둘러싼 환호에서 비롯된다. 선사시대 환호가 발전된 형태는 양산 평산리 마을유적에서 보이고 있는데, 구상유구를 중심으로 내측에는 목책열이 구상유구와 나란히 진행되고, 외부로는 구상유구 굴토 과정에서 나온 흙을 쌓아올리는 등 3중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또한 어긋문 형태의 문지 및 문지 주변에서 출입을 통제할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토성의 초기적인 모습과 연결되며 이 유적 내부의 주거지는 출토유물로 보아 2세기경으로 편년되고 있다(서영일, 2009). 바로가기
  • 번역주 007)
    言語有類秦人 由是或謂之爲秦韓 : 『삼국지』와 『후한서』에 “有似秦人(語)” 즉 秦나라 사람의 언어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진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반면 『양서』와 『남사』·『북사』에는 진한의 언어에 대해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秦韓은 진한의 기원에 대한 4가지 설, 곧 秦유망인설, 고구려잔민설, 변한후예설, 燕人망명인설 가운데 진유망인설에 따른 명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후한서』·『양서』·『진서』·『남사』·『북사』 그리고 『한원』, 『책부원구』·『통전』 등에서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秦韓의 명칭은 진의 유망민이라는 전승 외에 진한의 언어가 마한과 다르고 중국 진나라 사람들과 유사하다는 『삼국지』·『후한서』 이래의 전승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初有六國 後稍分爲十二 : 『삼국지』 진한전의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을 옮긴 것이다. 『후한서』 한전에는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으로 나온다. 진한이 처음에 6국이었다가 12국으로 나오는 것은 고조선 유민들이 남하해 諸國이 형성된 이후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이부오, 2012). 처음의 6국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2국과 관련해서는 『삼국지』 변진전에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고 하였다. 이 중 진한 12국은 ① 己柢國(안동 또는 풍기 基木鎭), ② 不斯國(창녕), ③ 勤耆國(영일 또는 청도), ④ 難彌離彌凍國(의성군 단밀면 또는 창녕군 영산), ⑤ 冉奚國(울산시 염포 또는 대구), ⑥ 軍彌國(사천군 곤양 또는 칠곡군 인동), ⑦ 如湛國(군위 또는 의성군 탑리), ⑧ 戶路國(상주군 함창면 또는 영천), ⑨ 州鮮國(경산군 자인 또는 경산 압독국), ⑩ 馬延國(밀양), ⑪ 斯盧國(경주 일대), ⑫ 優由國(청도 또는 울진)이다(이병도, 1976 ; 천관우, 1976a).바로가기
  • 번역주 009)
    又有弁辰 亦十二國 : 『진서』의 편자는 변한과 진한이 합해서 12국이라고 하였지만,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고 하였다. 『후한서』 한전에는 “辰韓 … 十有二國”으로 나온다. 따라서 여기에서 변진 12국이라고 한 것은 변한 12국을 말한다. 변한 12국과 관련해서 『삼국지』 변진전에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고 하였다. 이 중 弁辰 12국은 彌離彌凍國(밀양 또는 고령), 古資彌凍國(고성), 古淳是國(산청), 半路國(고령 또는 성주), 樂奴國(하동군 악양), 彌烏邪馬國(창원), 甘路國(개령), 狗邪國(김해), 走漕馬國(함양), 安邪國(함안), 瀆盧國(부산 또는 거제도), 接塗國(칠원)이다(김태식, 2007).바로가기
  • 번역주 010)
    合四五萬戶 :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는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진서』에서 변진이 “合四五萬戶”라고 한 것은 진한과 변한이 합쳐진 24국의 총 호수가 4만~5만 호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1)
    各有渠帥 : 渠帥는 고대 읍락사회의 首長을 말한다.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전에는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라고 하였고, 『후한서』 (진)한전에는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라 하였다. 이로 볼 때 거수는 소별읍을 다스렸는데, 소별읍은 主帥가 근거했다는 마한의 ‘국읍’에 대응한다(이부오, 2012). 그리고 삼한의 거수들은 세력의 크기에 따라 臣智·險側·樊濊·殺奚·邑借로 불렸다. 이처럼 거수는 소국의 수장을 가리키는 君長보다는 다소 격이 낮은 읍락의 우두머리로, 동옥저의 읍락 거수들은 스스로 三老를 칭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2)
    皆屬於辰韓 : 『삼국지』 변진전에는 “其十二國屬辰王”으로 나온다. 이처럼 『삼국지』의 진왕이 『진서』에서는 진한으로 바뀌었고 『양서』와 『북사』에는 진한왕으로 나온다. 그리고 『통전』·『태평환우기』·『한원』은 『삼국지』를 따르며, 『후한서』에는 辰王을 ‘삼한을 모두 다스리는 辰國王’으로 기술하였다. 이와 같이 진(한)왕 관련 기사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辰王’은 『삼국지』의 계통을 따르는 것(『통전』·『태평환우기』·『한원』)과 『후한서』의 계통을 따른 것, 이들 양 계통과는 달리 ‘辰韓王’으로 표기한 계통(『양서』·『진서』·『북사』)이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공통되는 부분은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렸으며, 마한인으로서 진왕을 삼아 대대로 승계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지』에서 진왕은 진한 지역을 예속하였다고 한 데 대해, 『후한서』에서는 모든 삼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로써 『삼국지』의 기사를 따르게 될 경우 진왕은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통치자로 해석되지만, 『후한서』를 따른다면 삼한 전체를 다스리는 왕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기사대로 진왕을 목지국을 다스린 지배자 정도로 보고 있으며, 목지국은 마한뿐만 아니라 진한 지역까지 통제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진서』를 비롯하여 『양서』와 『북사』에서는 변진 12국은 진한에 속하며, 진한은 항상 마한인으로 왕을 삼아 진한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였다 하는데, 그 이유는 진한인이 유망하여 옮겨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삼국지』의 진왕을 『진서』에서 진한으로 바꾼 것과 관련해서 『진서』 찬자가 진왕을 오기로 판단해 진한으로 수정했다고 하기도 하고(박대재, 2002), 『위략』 원문에 의거해 기술했다고도 하며(신현웅, 2005), 『삼국지』의 진왕을 원래는 한으로 보면서 이것이 『진서』 진한조로 계승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이부오, 2012).바로가기
  • 번역주 013)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지』의 ‘진왕’은 『진서』에는 ‘진한’으로 기록하였다. 진왕의 실체와 관련해서는 노중국, 2007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4)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 『삼국지』 진한전에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 “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가 주로 처리되어 있다. 조선 유민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마한의 동쪽을 지나왔으므로, 이를 마한의 부용으로 여겼을 것이다. 조선 유민이 남하해 諸國을 세우는 과정에서 마한의 승인과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혁거세거서간 38년(기원전 20)이 관심을 끈다(이부오, 2012). 이로 볼 때 유민이 새로 정착하는 데 있어 마한의 영향력이 상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5)
    地宜五穀 : 『삼국지』 진한전에는 보이지 않고 변진조에 “土地肥美 冝種五糓及稻”라고 하였다. 『후한서』 진한전에 “土地肥美 宜五穀”이라고 하였다. 오곡의 구체적인 종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稷(조 또는 피), 黍(기장), 麥(보리), 豆(콩)와 麻(삼) 또는 稻(벼)를 말한다(조재영, 1998). 이 중 稻는 기원전 6세기 이전의 책인 『주례』와 『管子』에는 오곡에 들어있는데, 『삼국지』에서 쌀은 5곡의 개념에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후한서』와 『진서』의 오곡 기사는 稻의 기록을 빠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에서 일찍이 김해패총에서 탄화된 쌀이 발견되었고 무문토기에서도 쌀농사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의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라는 표현과 빈번한 수리 관계 기록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삼국지』 단계에서 쌀은 오곡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진서』 단계에서 쌀은 오곡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6)
    俗饒蠶桑 善作縑布 : 『삼국지』 변진전에는 “曉蠶桑 作縑布”, 『후한서』 진한전에는 “知蠶桑 作縑布”가 보인다. 이 기록은 일찍부터 진한과 신라에서 뽕나무를 재배하였고 縑布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겸포는 “『석명』에 ‘縑은 兼의 뜻으로, 실이 가늘어서 몇 개의 실을 겹쳐서 布나 絹을 짜는 것이다.” 하였다(『해동역사』 권26, 物産志 布帛類 布). 이와 같은 잠상과 겸포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이래의 산업이 신라에도 그대로 전승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의 “勸督農桑”, 파사이사금 3년(82)의 下令 중 “勸農桑”도 참고된다. 특히 유리이사금 9년(32)의 기사를 보면 8월 15일에 績麻大會가 열리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7)
    服牛乘馬 : 『삼국지』 변진전과 『후한서』 진한전에 “乘駕牛馬”로 나온다. 『진서』 마한전에는 마한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단지 장사지내는 데 쓰기 위해서이다(不知乘牛馬 畜者但以送葬).”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마한과 진한의 문화적 풍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를 이용함으로써 노동력이 절감되고 깊이갈이를 할 수 있어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신라에서는 “지증왕 3년(502)에 처음으로 우경을 이용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경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이용되어 오고 있던 우경을 국가적으로 장려한 조치하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노례왕(24~57) 때 쇠 보습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축력을 이용한 쟁기 사용이 더 빨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끄는 쟁기인 극젱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는 한 점의 보습도 나오지 않았고 6세기 이후 안변 용성리유적과 진주 옥봉유적에서 둥근 U자형의 보습이 출토되었다(김재홍, 2007).바로가기
  • 번역주 018)
    其風俗可類馬韓 : 『진서』 마한전에는 마한의 풍속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俗少綱紀 無跪拜之禮 居處作土室 形如冢 其戶向上 擧家共在其中 無長幼男女之別 … 俗不重金銀錦罽 而貴瓔珠 用以綴衣或飾髮垂耳 其男子科頭露紒 衣布袍 履草蹻 … 俗信鬼神 常以五月耕種畢 群聚歌舞以祭神 至十月農事畢 亦如之.”바로가기
  • 번역주 019)
    兵器亦與之同 : 『진서』 마한전에는 “활·방패·창·큰 방패를 잘 쓴다(善用弓楯矛櫓).”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0)
    初生子 便以石押其頭使扁 : 『삼국지』에는 “今辰韓人皆褊頭”, 『후한서』 한전에는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이라고 나온다. 머리 모양[頭形]을 변하게 만드는 頭型變形 풍속은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었다. 변진에서는 돌을 사용한다는 것이 특색이다. 머리를 편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두형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로, 한국인은 대체로 단두형이다.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의 모양을 바르게 잡지 못하면 균형을 깨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은 오늘날에도 민간에서 시행하고 있다. 다만 돌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보조적인 도구의 하나였을 것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1)
    喜舞 善彈瑟 : 『후한서』 한전에는 “俗憙歌舞飮酒鼓瑟”이라고 나온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2)
    武帝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 復來朝貢 七年又來 : 『진서』 마한전에는 “武帝 太康元年 …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 … 又頻至”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진한뿐만 아니라 마한 역시 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진한왕이 사신을 보내서 진에 조공했다는 기사는 3세기 후반에 와서 사로국의 조공무역 본격화를 반영한다고 이해하였고(이현혜, 1994), 사로국의 급격한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며(이부오, 2012), 『진서』의 조공 기사는 서진 무제의 무공을 현양시키기 위해 과장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윤용구, 1998).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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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자료번호 : jd.k_0005_0097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