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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朱夢)의 탄생과 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주 001
번역주 001)
高句麗 : 『魏書』에서는 ‘高句麗’와 ‘高麗’라는 두 가지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高麗’는 2회 확인된다. 즉 『魏書』 帝紀 太祖 天興 元年(398) 正月조에 “辛酉 車駕發自中山 至于望都堯山 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 以充京師”라는 기사에서 처음 ‘고려’가 보이고 있으며, 같은 책 帝紀 世祖 太延 元年(435) 6월조에도 “丙午 高麗鄯善國並遣使朝獻”이라 하여 역시 고려 국호가 보이고 있다. 다만 『魏書』 列傳에서는 ‘高句麗’로 표기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사서의 성서 연대로 따졌을 때, 高麗란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중국 사서는 『宋書』이다. 『송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같은 책 本紀 少帝 景平 元年(423) 3월조에 “三月壬寅 孝懿皇后祔葬于興寧陵 是月 高麗國遣使朝貢”이라는 기사에서 ‘高麗’ 국호가 처음 확인된다. 이후 『남제서』 등 여러 사서에서 고구려는 ‘句麗’, ‘句驪’, ‘高句麗’, ‘高句驪’, ‘高驪’ 등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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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부여에서 나왔는데,주 002
번역주 002)
〈廣開土王碑〉에서는 ‘出自北夫餘’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 所引 『구삼국사』 逸文에서는 주몽이 ‘東扶餘’로부터 출자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는 夫餘와 北夫餘, 東夫餘(東扶餘) 각각의 실체와 상호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지속해 왔다. 대체로 夫餘와 北夫餘 양자에 대해서는 동일시하는 가운데 특히 ‘동부여’에 대해서만큼은 ① 285년 모용 선비의 공격을 받고 沃沮로 피신해갔던 부여인의 잔여세력이 오늘날 연변 지역에 세운 나라로 파악하는 견해(池內宏, 1951), ② 오늘날 지린시 일대의 부여와 동부여를 동일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李健才, 1982), ③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 보이는 설화 속 동부여의 연장선상에서 동부여를 파악하는 견해(이도학, 2005) 등이 거론되어 왔다. 대체로 ① 번 견해가 한·일 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 가운데, 부여의 잔여세력이 피신한 지역을 오늘날 蛟河市 일대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고(이성제, 2008), 최근에는 부여의 四出道 중 東方道에 포진한 부여의 지방세력을 동부여로 보아 이들이 고구려 국가형성기부터 관계를 맺어왔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이승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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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말하기를 선조가 주몽이라고 한다.주 003
번역주 003)
〈廣開土王碑〉, 〈牟頭婁墓誌〉, 〈集安高句麗碑〉와 같은 5세기 초 금석문들에서 고구려 시조의 명칭은 모두 ‘鄒牟’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서도 ‘一云鄒牟’라고 하였다. 그 외, 문헌에서 ‘衆解’, ‘仲牟’, ‘都慕’ 등으로 기록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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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주 004
번역주 004)
河伯 : ‘河伯’은 중국 신화 속 黃河의 水神으로, 전통시대 ‘河’는 일반 강이 아니라 단지 黃河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임을 감안하면, 엄밀히 말해 黃河의 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先秦 문헌에 이미 등장한다. 예를 들어, 『韓非子』 內儲說上에는 “齊人有謂齊王曰 河伯大神也 王何不試與之遇乎 臣請使王遇之 乃爲壇場大水之上 而與王立之焉 有閒 大魚動 因曰 此河伯”라는 내용이 있다. 『後漢書』 左周黃列傳에서는 구체적으로 “夫河伯以水爲城國 魚鱉爲民庶”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 『說苑』 辨物篇에서 “夫河伯以水爲國 以魚鱉爲民”이라고 하였다. 後漢 시기의 南陽畵像石(中國 河南省)에 ‘河伯出行圖’라고 하여 하백에 관한 도상이 확인된다. 다만 고구려 시조신화에 등장하는 ‘하백’은 강의 신으로서의 속성만을 차용한 고구려 고유의 신격으로 짐작된다. 또 〈廣開土王碑〉, 〈牟頭婁墓誌〉, 〈集安高句麗碑〉와 같은 5세기 초 금석문들에서 시조의 혈통과 관련해 모두 하백을 언급하고 있어, 이 신격이 당시 고구려 신앙체계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牟頭婁墓誌〉에서는 ‘河泊’ 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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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딸로 부여왕주 005
번역주 005)
夫餘王 : 고구려 시조 주몽의 출생담 중에 등장하는 부여왕에 대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 所引 『구삼국사』 逸文에서는 모두 동부여왕인 解夫婁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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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안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다가] 해가 비추기에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이윽고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니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니 돼지 또한 먹지 않았으며,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그것을 피하였다. 다시 [그 알을] 들에 버리니 새들이 깃털로 감쌌다.주 006
번역주 006)
茹 : ‘감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齊民要術』 “十月初凍尚暖 未須茹甕” 『三國史記』에서는 “鳥覆翼之”라고 했는데, ‘覆翼’이란 ‘감싸다’, ‘보호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詩經』 生民篇에 수록된 后稷 탄생 설화의 “誕寘之寒冰 鳥覆翼之”라는 표현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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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었고,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장성하자 자를 주몽주 007
번역주 007)
『禮記』 冠禮에서 “已冠而字之 成人之道也”라고 하였다. 또 『禮記』 檀弓篇 疏에서 “始生三月而加名 故去幼名 年二十 有爲人父之道 朋友等類不可複呼其名 故冠頂加字”이라고 하였다. 즉, 성인이 되어 冠禮를 행함과 동시에 ‘字’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원문의 ‘字之曰朱蒙’은 그 앞의 ‘及其長也’에 부합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三國史記』에서는 “年甫七歲 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이라고 하여 7세에 이미 ‘주몽’이라는 호칭이 붙여진 것처럼 기술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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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였다. 그 속언에주 008
번역주 008)
『三國遺事』에서는 ‘中國俗謂’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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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장차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으리라 여겨 그를 없애라고 청하였는데, 왕은 들어주지 않고 그에게 명하여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매일 남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가려내고, 준마는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일 들에 나가 사냥하는데,주 009
번역주 009)
狩田이란 겨울철 사냥을 말한다. 『周禮』 夏官, 大司馬의 “中冬教大閲 … 遂以狩田”이라는 구절에 鄭玄이 주석을 붙여 “겨울철 사냥을 ‘狩’라고 한다(冬田爲狩).”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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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 하나로 제한하였다. 주몽은 비록 화살이 적었으나 잡은 짐승이 아주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다시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리에 알고 주몽에게 일러주며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너를 해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멀리 외국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곧 오인·오위 등 두 사람과 함께주 010
번역주 010)
『三國史記』에서는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라고 하였다. 『魏書』의 ‘烏引’과 『三國史記』의 ‘烏伊’는 동일 인물로 짐작된다. 『三國遺事』에서는 “烏伊䓁三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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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 큰 강주 011
번역주 011)
大水 : 『梁書』에는 ‘淹滯水’, 〈廣開土王碑〉에는 ‘淹利大水’, 『三國史記』에는 ‘淹㴲水(蓋斯水)’, 『三國遺事』에는 ‘淹水’로 되어 있다. 이 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松花江說(李丙燾, 1977), 遼河說(리지린·강인숙, 1976), 渾河說(白鳥庫吉, 1895·1896) 등으로 보기도 하지만, 위의 『魏書』를 비롯하여 『隋書』와 『北史』에는 ‘大水’라고만 되어 있어, 강 이름을 특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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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맞닥뜨려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아주 급박하게 추격해오니 주몽이 강물에 일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주 012
번역주 012)
『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天帝之子’로 되어 있고, 〈廣開土王碑〉에서는 ‘天帝之子’, ‘皇天之子’라고 했으며, 〈牟頭婁墓誌銘〉에서는 ‘日月之子’로 썼다. 〈集安高句麗碑〉에는 ‘□□□子’만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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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주하는데 추격하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니 추격하던 기병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드디어 보술수주 013
번역주 013)
普述水 : 普述이 馬訾·蒲洲·婆猪·泊珠 등과 음이 통한다고 보면서 普述水를 지금의 渾江으로 비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7). 『三國史記』에서는 ‘毛屯谷’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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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납의주 014
번역주 014)
衲衣 : 일반적으로 승려나 도인의 의복 혹은 누더기 옷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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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입었으며,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고 있었다.주 015
번역주 015)
『三國史記』에서는 麻衣·衲衣·水藻衣를 입은 이들 세 인물의 이름을 각각 再思·武骨·默居라고 전한다.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들의 재능에 따라 왕 밑에서 일정한 정치조직을 이룬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白,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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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주 016
번역주 016)
紇升骨城 : 지금의 遼寧省 桓仁市의 五女山城으로 비정된다(白鳥庫吉, 1914). 『北史』에는 ‘紇斗骨城’으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는 ‘卒本川’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에서는 ‘卒夲州’라고 하고, 이어서 “沸流水上居之”라고 하였다. 〈廣開土王碑〉에는 “沸流谷忽本西城山上”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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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마침내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로] 인하여 씨로 삼았다.주 017
번역주 017)
『三國史記』·『三國遺事』·『周書』·『北史』 등 여러 문헌들에서는 “以髙爲氏”라고 하여 ‘高’를 氏로 삼았다고 전한다. 『宋書』에서는 “高句驪王高璉”이라고 하여 처음으로 고구려왕의 이름 앞에 성을 붙여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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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아내주 018
번역주 018)
妻 : 『三國史記』에서는 ‘禮氏女’라고 하여 성씨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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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임신하였는데, 주몽이 도망한 후에 아들 하나를 낳으니, 자를 처음에는 여해라 하였다.주 019
번역주 019)
『北史』에서는 “生子始閭諧”라고 하였을 뿐, ‘字’라고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篇 疏에서 “始生三月而加名 故去幼名 年二十 有爲人父之道 朋友等類不可複呼其名 故冠頂加字”라고 하였다. 중화서국에서는 이름을 ‘始閭諧’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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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하자 주몽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귀의하니, 이름 짓기를 여달주 020
번역주 020)
閭達 : 주몽을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구려 제2대 왕으로, 〈廣開土王碑〉에서는 ‘儒留王’이라고 했고, 『三國史記』에서는 王號를 ‘瑠璃明王’이라고 하고, 諱를 ‘類利’·‘孺留’라고 하였다. 『三國遺事』 王曆에는 ‘累利’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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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고 나라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계승하여 임금이 되었다.주 021
번역주 021)
『冊府元龜』 外臣部에는 “其王高朱蒙死 子如栗立”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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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계승하여 임금이 되어 곧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크게 패해, 드디어 [고구려에] 예속되었다.주 022
번역주 022)
如栗이 부여를 탈출한 閭達의 子라고 했으므로 여율은 마땅히 주몽의 손자이고, 그 아들인 莫來는 증손자이다. 하지만 『三國史記』에서 부여를 정벌한 왕은 주몽의 증손자가 아닌 손자 大武神王이다. 또 『周書』에서도 “其孫莫來漸盛 擊夫餘而臣之”이라고 전한다. 혹자는 ‘莫來’와 ‘慕本’의 字形이 유사하여 傳寫 과정에서 오기했을 수도 있는 만큼, 莫來가 곧 慕本王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본왕 시기 부여를 정복한 사건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전의 ‘여율’과 ‘막래’를 『삼국사기』의 특정 고구려왕에 비정하기가 혼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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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래의 자손이 [왕위를] 서로 전하여 먼 후손 궁(태조왕, 재위: 53~146)주 023
번역주 023)
宮 : 『三國史記』에서 제6대 왕 太祖大王의 諱를 宮이라고 했는데, 그 출신을 瑠璃王의 子 古鄒加 再思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본전에서 부여를 정벌하였다고 전하는 막래를 대무신왕에 비정하면, 태조대왕 궁은 막래의 조카가 된다. 그리고 막래를 모본왕으로 볼 경우, 태조대왕과는 사촌사이가 된다. 그렇다면 본전에의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이라는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다. ‘子孫相傳’이나 ‘裔孫’은 적어도 몇 세대를 경과한 먼 후손을 지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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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 [궁은]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꺼렸다.주 024
번역주 024)
『風俗通儀』 佚文 釋忌에 따르면 “俗說 兒墮地便能開目視者 謂之寤生 舉寤生子 妨父母”라고 한다. 『左傳』 隱公元年條에 “莊公寤生 驚姜氏 故名寤生 遂惡之”라는 전승이 있다. ‘寤生’의 구체적인 의미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으나, 부정적인 인식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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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하자 흉학하니, 나라가 손상되고 무너졌다.주 025
번역주 025)
『三國史記』에는 태조왕 시기 고구려가 위기를 맞았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遼東 침탈과 같은 전쟁 기사가 많이 있다. 이는 『後漢書』에서 “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數犯邊境”이라고 한 점과 일치한다. 또 『通典』에서는 “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和帝時頻掠遼東 玄菟等郡”이라고 했고, 『冊府元龜』에서도 “後漢句驪王宮勇壯 數犯邊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전의 “國以殘破”나 『三國志』의 “國見殘破”는 기술자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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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증손 위궁(동천왕, 재위: 227~248) 역시 태어나면서 볼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증조 궁을 닮았다하여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주 026
번역주 026)
『三國志』에서는 位宮을 伊夷模의 子라고 하고, 宮을 曾祖라고 하였다. 그와 달리,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 제10대 왕 山上王 延優의 또 다른 이름이 位宮이고, 제9대 왕 故國川王 伊夷模의 동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산상왕은 태조대왕의 季弟 新大王 伯固의 子이므로, 본전에서 궁을 위궁의 ‘曾祖’라고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만약 태조대왕에 이은 제7대 왕 次大王과 제8대 왕 新大王을 태조대왕의 弟가 아닌 子와 孫으로 본다면, 본전에서 전하는 世系가 성립되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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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일컬어 ‘위’라고 한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었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다.

  • 번역주 001)
    高句麗 : 『魏書』에서는 ‘高句麗’와 ‘高麗’라는 두 가지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高麗’는 2회 확인된다. 즉 『魏書』 帝紀 太祖 天興 元年(398) 正月조에 “辛酉 車駕發自中山 至于望都堯山 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 以充京師”라는 기사에서 처음 ‘고려’가 보이고 있으며, 같은 책 帝紀 世祖 太延 元年(435) 6월조에도 “丙午 高麗鄯善國並遣使朝獻”이라 하여 역시 고려 국호가 보이고 있다. 다만 『魏書』 列傳에서는 ‘高句麗’로 표기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사서의 성서 연대로 따졌을 때, 高麗란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중국 사서는 『宋書』이다. 『송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같은 책 本紀 少帝 景平 元年(423) 3월조에 “三月壬寅 孝懿皇后祔葬于興寧陵 是月 高麗國遣使朝貢”이라는 기사에서 ‘高麗’ 국호가 처음 확인된다. 이후 『남제서』 등 여러 사서에서 고구려는 ‘句麗’, ‘句驪’, ‘高句麗’, ‘高句驪’, ‘高驪’ 등으로 표기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廣開土王碑〉에서는 ‘出自北夫餘’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 所引 『구삼국사』 逸文에서는 주몽이 ‘東扶餘’로부터 출자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는 夫餘와 北夫餘, 東夫餘(東扶餘) 각각의 실체와 상호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지속해 왔다. 대체로 夫餘와 北夫餘 양자에 대해서는 동일시하는 가운데 특히 ‘동부여’에 대해서만큼은 ① 285년 모용 선비의 공격을 받고 沃沮로 피신해갔던 부여인의 잔여세력이 오늘날 연변 지역에 세운 나라로 파악하는 견해(池內宏, 1951), ② 오늘날 지린시 일대의 부여와 동부여를 동일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李健才, 1982), ③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 보이는 설화 속 동부여의 연장선상에서 동부여를 파악하는 견해(이도학, 2005) 등이 거론되어 왔다. 대체로 ① 번 견해가 한·일 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 가운데, 부여의 잔여세력이 피신한 지역을 오늘날 蛟河市 일대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고(이성제, 2008), 최근에는 부여의 四出道 중 東方道에 포진한 부여의 지방세력을 동부여로 보아 이들이 고구려 국가형성기부터 관계를 맺어왔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이승호, 2018).바로가기
  • 번역주 003)
    〈廣開土王碑〉, 〈牟頭婁墓誌〉, 〈集安高句麗碑〉와 같은 5세기 초 금석문들에서 고구려 시조의 명칭은 모두 ‘鄒牟’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서도 ‘一云鄒牟’라고 하였다. 그 외, 문헌에서 ‘衆解’, ‘仲牟’, ‘都慕’ 등으로 기록되어 나타나기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河伯 : ‘河伯’은 중국 신화 속 黃河의 水神으로, 전통시대 ‘河’는 일반 강이 아니라 단지 黃河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임을 감안하면, 엄밀히 말해 黃河의 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先秦 문헌에 이미 등장한다. 예를 들어, 『韓非子』 內儲說上에는 “齊人有謂齊王曰 河伯大神也 王何不試與之遇乎 臣請使王遇之 乃爲壇場大水之上 而與王立之焉 有閒 大魚動 因曰 此河伯”라는 내용이 있다. 『後漢書』 左周黃列傳에서는 구체적으로 “夫河伯以水爲城國 魚鱉爲民庶”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 『說苑』 辨物篇에서 “夫河伯以水爲國 以魚鱉爲民”이라고 하였다. 後漢 시기의 南陽畵像石(中國 河南省)에 ‘河伯出行圖’라고 하여 하백에 관한 도상이 확인된다. 다만 고구려 시조신화에 등장하는 ‘하백’은 강의 신으로서의 속성만을 차용한 고구려 고유의 신격으로 짐작된다. 또 〈廣開土王碑〉, 〈牟頭婁墓誌〉, 〈集安高句麗碑〉와 같은 5세기 초 금석문들에서 시조의 혈통과 관련해 모두 하백을 언급하고 있어, 이 신격이 당시 고구려 신앙체계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牟頭婁墓誌〉에서는 ‘河泊’ 으로 썼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夫餘王 : 고구려 시조 주몽의 출생담 중에 등장하는 부여왕에 대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및 「동명왕편」 所引 『구삼국사』 逸文에서는 모두 동부여왕인 解夫婁로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茹 : ‘감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齊民要術』 “十月初凍尚暖 未須茹甕” 『三國史記』에서는 “鳥覆翼之”라고 했는데, ‘覆翼’이란 ‘감싸다’, ‘보호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詩經』 生民篇에 수록된 后稷 탄생 설화의 “誕寘之寒冰 鳥覆翼之”라는 표현과 닮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禮記』 冠禮에서 “已冠而字之 成人之道也”라고 하였다. 또 『禮記』 檀弓篇 疏에서 “始生三月而加名 故去幼名 年二十 有爲人父之道 朋友等類不可複呼其名 故冠頂加字”이라고 하였다. 즉, 성인이 되어 冠禮를 행함과 동시에 ‘字’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원문의 ‘字之曰朱蒙’은 그 앞의 ‘及其長也’에 부합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三國史記』에서는 “年甫七歲 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이라고 하여 7세에 이미 ‘주몽’이라는 호칭이 붙여진 것처럼 기술되어 나타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三國遺事』에서는 ‘中國俗謂’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狩田이란 겨울철 사냥을 말한다. 『周禮』 夏官, 大司馬의 “中冬教大閲 … 遂以狩田”이라는 구절에 鄭玄이 주석을 붙여 “겨울철 사냥을 ‘狩’라고 한다(冬田爲狩).”고 해석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三國史記』에서는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라고 하였다. 『魏書』의 ‘烏引’과 『三國史記』의 ‘烏伊’는 동일 인물로 짐작된다. 『三國遺事』에서는 “烏伊䓁三人”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1)
    大水 : 『梁書』에는 ‘淹滯水’, 〈廣開土王碑〉에는 ‘淹利大水’, 『三國史記』에는 ‘淹㴲水(蓋斯水)’, 『三國遺事』에는 ‘淹水’로 되어 있다. 이 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松花江說(李丙燾, 1977), 遼河說(리지린·강인숙, 1976), 渾河說(白鳥庫吉, 1895·1896) 등으로 보기도 하지만, 위의 『魏書』를 비롯하여 『隋書』와 『北史』에는 ‘大水’라고만 되어 있어, 강 이름을 특정하지 않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天帝之子’로 되어 있고, 〈廣開土王碑〉에서는 ‘天帝之子’, ‘皇天之子’라고 했으며, 〈牟頭婁墓誌銘〉에서는 ‘日月之子’로 썼다. 〈集安高句麗碑〉에는 ‘□□□子’만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普述水 : 普述이 馬訾·蒲洲·婆猪·泊珠 등과 음이 통한다고 보면서 普述水를 지금의 渾江으로 비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7). 『三國史記』에서는 ‘毛屯谷’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衲衣 : 일반적으로 승려나 도인의 의복 혹은 누더기 옷을 지칭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三國史記』에서는 麻衣·衲衣·水藻衣를 입은 이들 세 인물의 이름을 각각 再思·武骨·默居라고 전한다.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들의 재능에 따라 왕 밑에서 일정한 정치조직을 이룬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白, 1985).바로가기
  • 번역주 016)
    紇升骨城 : 지금의 遼寧省 桓仁市의 五女山城으로 비정된다(白鳥庫吉, 1914). 『北史』에는 ‘紇斗骨城’으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에는 ‘卒本川’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에서는 ‘卒夲州’라고 하고, 이어서 “沸流水上居之”라고 하였다. 〈廣開土王碑〉에는 “沸流谷忽本西城山上”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三國史記』·『三國遺事』·『周書』·『北史』 등 여러 문헌들에서는 “以髙爲氏”라고 하여 ‘高’를 氏로 삼았다고 전한다. 『宋書』에서는 “高句驪王高璉”이라고 하여 처음으로 고구려왕의 이름 앞에 성을 붙여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妻 : 『三國史記』에서는 ‘禮氏女’라고 하여 성씨를 전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北史』에서는 “生子始閭諧”라고 하였을 뿐, ‘字’라고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篇 疏에서 “始生三月而加名 故去幼名 年二十 有爲人父之道 朋友等類不可複呼其名 故冠頂加字”라고 하였다. 중화서국에서는 이름을 ‘始閭諧’로 보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閭達 : 주몽을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구려 제2대 왕으로, 〈廣開土王碑〉에서는 ‘儒留王’이라고 했고, 『三國史記』에서는 王號를 ‘瑠璃明王’이라고 하고, 諱를 ‘類利’·‘孺留’라고 하였다. 『三國遺事』 王曆에는 ‘累利’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冊府元龜』 外臣部에는 “其王高朱蒙死 子如栗立”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如栗이 부여를 탈출한 閭達의 子라고 했으므로 여율은 마땅히 주몽의 손자이고, 그 아들인 莫來는 증손자이다. 하지만 『三國史記』에서 부여를 정벌한 왕은 주몽의 증손자가 아닌 손자 大武神王이다. 또 『周書』에서도 “其孫莫來漸盛 擊夫餘而臣之”이라고 전한다. 혹자는 ‘莫來’와 ‘慕本’의 字形이 유사하여 傳寫 과정에서 오기했을 수도 있는 만큼, 莫來가 곧 慕本王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본왕 시기 부여를 정복한 사건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전의 ‘여율’과 ‘막래’를 『삼국사기』의 특정 고구려왕에 비정하기가 혼돈스럽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宮 : 『三國史記』에서 제6대 왕 太祖大王의 諱를 宮이라고 했는데, 그 출신을 瑠璃王의 子 古鄒加 再思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본전에서 부여를 정벌하였다고 전하는 막래를 대무신왕에 비정하면, 태조대왕 궁은 막래의 조카가 된다. 그리고 막래를 모본왕으로 볼 경우, 태조대왕과는 사촌사이가 된다. 그렇다면 본전에의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이라는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다. ‘子孫相傳’이나 ‘裔孫’은 적어도 몇 세대를 경과한 먼 후손을 지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風俗通儀』 佚文 釋忌에 따르면 “俗說 兒墮地便能開目視者 謂之寤生 舉寤生子 妨父母”라고 한다. 『左傳』 隱公元年條에 “莊公寤生 驚姜氏 故名寤生 遂惡之”라는 전승이 있다. ‘寤生’의 구체적인 의미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으나, 부정적인 인식이 일반적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三國史記』에는 태조왕 시기 고구려가 위기를 맞았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遼東 침탈과 같은 전쟁 기사가 많이 있다. 이는 『後漢書』에서 “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數犯邊境”이라고 한 점과 일치한다. 또 『通典』에서는 “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和帝時頻掠遼東 玄菟等郡”이라고 했고, 『冊府元龜』에서도 “後漢句驪王宮勇壯 數犯邊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전의 “國以殘破”나 『三國志』의 “國見殘破”는 기술자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三國志』에서는 位宮을 伊夷模의 子라고 하고, 宮을 曾祖라고 하였다. 그와 달리,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 제10대 왕 山上王 延優의 또 다른 이름이 位宮이고, 제9대 왕 故國川王 伊夷模의 동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산상왕은 태조대왕의 季弟 新大王 伯固의 子이므로, 본전에서 궁을 위궁의 ‘曾祖’라고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만약 태조대왕에 이은 제7대 왕 次大王과 제8대 왕 新大王을 태조대왕의 弟가 아닌 子와 孫으로 본다면, 본전에서 전하는 世系가 성립되기는 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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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朱夢)의 탄생과 고구려의 성립 자료번호 : jd.k_0010_010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