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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고구려(高句麗)의 성립과 제도, 문화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주 001
번역주 001)
조선: 평양을 중심으로 한 樂浪郡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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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주 002
번역주 002)
예맥: 東濊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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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접한다. 그 나라는 사방 2천 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에 음식을 아끼는데, 궁실은 잘 지어 갖추었다. 동이에서 대대로 전해오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속이 [부여와] 닮은 점이 많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리듯이 빨리 간다. 5부가 있는데,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주 003
번역주 003)
原註 살펴보니, 지금 高句麗의 5부는 첫 번째 內部는 일명 黃部로, 즉 桂婁部이다. 두 번째 北部는 일명 後部로, 즉 絶奴部이다. 세 번째 東部는 일명 左部로, 즉 順奴部이다. 네 번째 南部는 일명 前部로, 즉 灌奴部이다. 다섯 번째 西部는 일명 右部로, 즉 消奴部이다. 集解: 惠棟이 이르길, ‘消’는 『三國志』, 「東夷傳」에서 ‘涓’으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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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지만, 점차 [세력이] 미약해져서 이후에 계루부에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 나라에서는 관직을 두었는데, 상가·대로·패자·고추대가주 004
번역주 004)
原註 古鄒大加는 高句麗에서 賓客 접대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鴻臚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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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주 005
번역주 005)
原註 集解: 先謙이 말하였다. “官本에서는 ‘部’를 ‘簿’로 적고 있다. [『三國志』] 「魏志」 및 『南史』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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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사자·백의·선인주 006
번역주 006)
原註 集解: 沈欽韓이 이르길, “『新唐書』, 「高麗傳」에서 ‘帛衣頭大兄’이라 하였는데, ‘帛衣’라는 글자는 ‘仙人’을 쓸 때 잘못 들어간 것이다. 『通典』에서는 ‘皁衣’라 쓰고, 국정을 총괄하며, 3년에 한 번 바꾼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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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고주 007
번역주 007)
原註 『前漢書』에서 元封中에 朝鮮을 정벌하고, 眞番·臨屯·樂浪·玄菟의 4郡을 설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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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취기인(鼓吹伎人)을 하사하였다. 그 습속은 음란하였으나, 모두 스스로 정결하기를 좋아했고, 밤에는 늘 남녀가 무리지어 노래 부른다. 귀신·사직·영성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였다주 008
번역주 008)
原註 『前書音義』에 전한다. 龍星[동방7수]의 左角을 天田이라 하니, 즉 農祥[房宿]이다. 辰日에 소를 써서 제사지내고, 이를 ‘零星’이라 부른다. 『風俗通』에서 辰의 신이 ‘靈星’이라 하였으니, 이 때문에 辰日에 동남쪽에서 제사 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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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어 크게 모였는데,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신(禭神)이라고 부르며, 또한 10월에 수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그 공회(公會)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 꾸몄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을 쓰는데, [중국의] 관책과 같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뇌옥이 없고, 죄인이 있으면 제가가 평의하여 곧 사형에 처하고, 부인과 자식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았다. 그 나라에서는 혼인할 때 모두 처가로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이후에 [남편의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다. [결혼 후] 곧 장례에 쓸 물건을 조금씩 준비한다. [장례를 치리는 데] 금은과 재물을 모두 써 후하게 장사 지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나라 사람은 성질이 흉악하고 포악한데, 기력이 있고 전투에 익숙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옥저와 동예가 모두 복속하였다. 구려는 일명 맥이(貊耳)이다. 별종(別種)이 있는데주 009
번역주 009)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였다. “문장을 살펴보니, 응당 ‘句驪有別種, 一名貊耳’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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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름하여 소수맥이라고 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 이것이다주 010
번역주 010)
原註 『魏氏春秋』에 이르길, “遼東郡 西安平縣의 북쪽이다. 小水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을 이름하여 ‘小水貊’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이르길, “小水는 옛 小遼水로서 지금의 渾河이고, 大遼水는 지금의 太子河인데, 이들이 만나서 遼水(지금의 遼河)가 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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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망(재위: 8~23) 초에 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를 치고자 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가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강압해 보냈는데, 모두 도망쳤고 새를 나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서 그들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엄우는] 구려후 추(騶)를 꾀어 새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참수하고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주 011
번역주 011)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에서는 ‘騶’를 ‘騊’로 썼고, 『前漢書』에서는 ‘騶’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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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의 명칭을 고쳐서 하구려후라고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방을 침구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 8년(32)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25~57)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시켜 주었다주 012
번역주 012)
『後漢書』 권1하, 「光武帝紀」 1下 建武 8年(32) 十二月. “高句麗王遣使奉貢.”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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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무] 23년(47) 겨울에 구려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군에 내속하였다주 013
번역주 013)
『後漢書』 권1하, 「光武帝紀」 1下 建武 23年(47) 冬十月. “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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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무] 25년(49) 봄에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했는데,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신의로써 초유하니 모두 귀순하였다주 014
번역주 014)
『後漢書』 권20, 「列傳」 10 祭肜. “[建武] 二十五年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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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구려왕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보니, 국인이 그를 꺼려하였다주 015
번역주 015)
原註 集解: 官本에서는 考證하여 ‘懷’라고 하였으나, 『三國志』, 「魏志」에서는 ‘惡’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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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하자 용맹하고 건장해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105) 봄에 [고구려인이] 다시 요동[군]을 침입하여 여섯 현을 침구하였으므로, 태수 경기가 격파하고, 그 거수를 참수하였다주 016
번역주 016)
원흥 원년: 『後漢書』 권4, 「孝和孝殤帝紀」 4, 元興 元年(105) 春正月. “高句驪寇郡界.”; 『後漢書』 권4, 「孝和孝殤帝紀」 4, 元興 元年(105) 秋九月. “遼東太守耿夔擊貊人 破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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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제 영초 5년(111)에 궁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보내오고 현도군에 속하기를 구하였다주 017
번역주 017)
영초 5년: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3年(109) 春正月. “高句驪遣使貢獻.”;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3年(109) 六月. “烏桓寇代郡·上谷·涿郡.”;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3年(109) 九月. “鴈門烏桓及鮮卑叛 敗五原郡兵於高渠谷.”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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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초 5년(118)에 예맥과 함께 다시 현도군을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주 018
번역주 018)
原註 華麗는 縣으로 樂浪郡에 속한다. 集解: 洪亮吉이 말하길, “華麗縣은 樂浪郡에 속한다. 살펴보니, 後漢에는 華麗縣이 없다. 이것은 아마도 옛 城인 것 같다. 注한 것이 『前志』로 인하여 잘못되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아래 遼隊縣 또한 그러하다.〉 惠棟이 말하길, “살펴보니 後漢은 華麗縣을 없애고, 그 현의 渠帥를 縣侯로 세웠다는 것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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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광 원년(121) 봄에 유주자사 풍환주 019
번역주 019)
原註 集解: 何焯이 말하길, “「本紀」에서는 ‘馮煥’이라고 썼다.”고 하였다. 先謙이 말하길, “官本에서는 ‘煥’이라고 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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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현도태수 요광과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새를 나가 그들을 공격해 예맥의 거수를 붙잡아서 참수하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주 020
번역주 020)
건광 원년: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建光 元年(121) 春正月. “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穢貊 不克.”;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建光 元年(121) 冬十二月. “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 夫餘王遣子與州郡幷力討破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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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궁이] 사자(使者)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지에 자리잡고, 한나라의 대군을 막았다. [궁은] 몰래 3천여 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워 2천여 명을 살상하였다주 021
번역주 021)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서는 候城을 불태우고 遼隧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候城은 元蒐郡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先謙이 말하길, “官本에서는 ‘二千餘人’으로 썼는데, [이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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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한나라는 광양·어양·우북평·탁군·요동속국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징발해 함께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 8천여 명과 함께 요대를주 022
번역주 022)
原註 縣의 명칭인데, 遼東郡에 속한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지금 奉天府 海城縣 서쪽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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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주 023
번역주 023)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지금의 新昌縣 동쪽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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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공조 경모·병조연 용단주 024
번역주 024)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孫愐은 ‘龍姓으로 순임금 때 納言[舜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뜻을 임금에게 올리던 벼슬]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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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연 공손포가 몸을 바쳐 채풍을 막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포위하였다주 025
번역주 025)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本紀」에서는 겨울 12월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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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주 026
번역주 026)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台’는 다른 곳에서는 ‘治’로도 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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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2만여 명을 이끌고 주·군과 힘을 합하여 그를 쳐서 격파하고 5백여 명의 수급을 참수하였다. 이해(121)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요광이 상서하여 그 초상을 틈타 군사를 징발해 공격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주 027
번역주 027)
原註 集解: 沈宇가 말하기를, “「安帝紀」를 살펴보니, 姚光은 建光 원년 4월에 피살되었다. [그런데] 이 「傳」을 살펴보니, 즉 宮이 죽은 것은 마땅히 가을과 겨울 사이의 일이니, 그때에 광이 다시 살아 있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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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좋다고 여겨서 허락하였다. 그러나 상서 진충이 말했다. “궁이 생전에 사납고 교활하여 요광이 토벌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마땅히 사절을 보내어 조문하고, 지난날의 죄를 꾸짖고 그 죄를 용서하여 벌을 주지 않고, 그들이 이후 선(善)해지는 것을 취하십시오.” 안제가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122)에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를 돌려보내고 현도군에 와서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렸다. “수성 등이 포악무도하므로 목을 베고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한데, 다행히 마침 사면을 받고자 죄를 빌며 항복을 청했다. 그러나 선비·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하고 백성을 내몰아 움직인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이제 수백 명을 보냈으니, 교화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지금 이후 현관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친히 귀부하여 포로를 보내면, 모두 값을 치를 것이니 한 사람당 비단 40필, 아이[小口]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하였다. 그 이후에 예맥이 복속하니, 동쪽 변방의 일이 줄어들었다. 순제 양가 원년(132)에 현도군에 둔전(屯田) 6부를 설치하였다. 질제(재위: 145~146)·환제(재위: 146~167)의 시대에 고구려는 다시 요동군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현령주 028
번역주 028)
原註 『郡國志』에 따르면, 西安平과 帶方은 縣으로 모두 遼東郡에 속한다. 集解: 洪亮吉이 말하길, “『郡國志』을 살펴보니, 西安平縣은 遼東郡에 속하고, 帶方縣은 樂浪郡에 속하니, 注한 것이 틀렸다.”라고 하였다. 惠棟이 말하길, “『蔡邕集』에서 孝帝와 桓帝의 말년에 鮮卑가 塞로 들어와서 노략직하기 시작했고, 匈奴의 左部와 梁州가 모반하고, 羌族이 핍박하여 군사들이 淫衍을 베었으며, 東夷 高句驪의 아들 百固가 역모를 꾸며 아울러 군사를 일으켜서 세 변방이 떠들썩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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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주 029
번역주 029)
질제·환제의 시대: 『後漢書』 권51, 「열전」 40 陳龜. “桓帝末 鮮卑·南匈奴及高句驪嗣子伯固並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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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령 2년(169)에 현도태수 경림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니, 백고가 항복하여 현도군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

  • 번역주 001)
    조선: 평양을 중심으로 한 樂浪郡 지역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예맥: 東濊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原註 살펴보니, 지금 高句麗의 5부는 첫 번째 內部는 일명 黃部로, 즉 桂婁部이다. 두 번째 北部는 일명 後部로, 즉 絶奴部이다. 세 번째 東部는 일명 左部로, 즉 順奴部이다. 네 번째 南部는 일명 前部로, 즉 灌奴部이다. 다섯 번째 西部는 일명 右部로, 즉 消奴部이다. 集解: 惠棟이 이르길, ‘消’는 『三國志』, 「東夷傳」에서 ‘涓’으로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原註 古鄒大加는 高句麗에서 賓客 접대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鴻臚와 같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原註 集解: 先謙이 말하였다. “官本에서는 ‘部’를 ‘簿’로 적고 있다. [『三國志』] 「魏志」 및 『南史』가 같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原註 集解: 沈欽韓이 이르길, “『新唐書』, 「高麗傳」에서 ‘帛衣頭大兄’이라 하였는데, ‘帛衣’라는 글자는 ‘仙人’을 쓸 때 잘못 들어간 것이다. 『通典』에서는 ‘皁衣’라 쓰고, 국정을 총괄하며, 3년에 한 번 바꾼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原註 『前漢書』에서 元封中에 朝鮮을 정벌하고, 眞番·臨屯·樂浪·玄菟의 4郡을 설치했다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原註 『前書音義』에 전한다. 龍星[동방7수]의 左角을 天田이라 하니, 즉 農祥[房宿]이다. 辰日에 소를 써서 제사지내고, 이를 ‘零星’이라 부른다. 『風俗通』에서 辰의 신이 ‘靈星’이라 하였으니, 이 때문에 辰日에 동남쪽에서 제사 지낸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였다. “문장을 살펴보니, 응당 ‘句驪有別種, 一名貊耳’라고 써야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原註 『魏氏春秋』에 이르길, “遼東郡 西安平縣의 북쪽이다. 小水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을 이름하여 ‘小水貊’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이르길, “小水는 옛 小遼水로서 지금의 渾河이고, 大遼水는 지금의 太子河인데, 이들이 만나서 遼水(지금의 遼河)가 된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에서는 ‘騶’를 ‘騊’로 썼고, 『前漢書』에서는 ‘騶’로 썼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後漢書』 권1하, 「光武帝紀」 1下 建武 8年(32) 十二月. “高句麗王遣使奉貢.”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3)
    『後漢書』 권1하, 「光武帝紀」 1下 建武 23年(47) 冬十月. “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4)
    『後漢書』 권20, 「列傳」 10 祭肜. “[建武] 二十五年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5)
    原註 集解: 官本에서는 考證하여 ‘懷’라고 하였으나, 『三國志』, 「魏志」에서는 ‘惡’라고 썼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원흥 원년: 『後漢書』 권4, 「孝和孝殤帝紀」 4, 元興 元年(105) 春正月. “高句驪寇郡界.”; 『後漢書』 권4, 「孝和孝殤帝紀」 4, 元興 元年(105) 秋九月. “遼東太守耿夔擊貊人 破之.”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7)
    영초 5년: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3年(109) 春正月. “高句驪遣使貢獻.”;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3年(109) 六月. “烏桓寇代郡·上谷·涿郡.”;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永初 3年(109) 九月. “鴈門烏桓及鮮卑叛 敗五原郡兵於高渠谷.”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8)
    原註 華麗는 縣으로 樂浪郡에 속한다. 集解: 洪亮吉이 말하길, “華麗縣은 樂浪郡에 속한다. 살펴보니, 後漢에는 華麗縣이 없다. 이것은 아마도 옛 城인 것 같다. 注한 것이 『前志』로 인하여 잘못되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아래 遼隊縣 또한 그러하다.〉 惠棟이 말하길, “살펴보니 後漢은 華麗縣을 없애고, 그 현의 渠帥를 縣侯로 세웠다는 것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原註 集解: 何焯이 말하길, “「本紀」에서는 ‘馮煥’이라고 썼다.”고 하였다. 先謙이 말하길, “官本에서는 ‘煥’이라고 썼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건광 원년: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建光 元年(121) 春正月. “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穢貊 不克.”; 『後漢書』 권5, 「孝安帝紀」 5, 建光 元年(121) 冬十二月. “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 夫餘王遣子與州郡幷力討破之.”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21)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서는 候城을 불태우고 遼隧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候城은 元蒐郡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先謙이 말하길, “官本에서는 ‘二千餘人’으로 썼는데, [이것이] 옳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原註 縣의 명칭인데, 遼東郡에 속한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지금 奉天府 海城縣 서쪽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지금의 新昌縣 동쪽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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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孫愐은 ‘龍姓으로 순임금 때 納言[舜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뜻을 임금에게 올리던 벼슬]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本紀」에서는 겨울 12월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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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集解: 惠棟이 말하길, “‘台’는 다른 곳에서는 ‘治’로도 썼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原註 集解: 沈宇가 말하기를, “「安帝紀」를 살펴보니, 姚光은 建光 원년 4월에 피살되었다. [그런데] 이 「傳」을 살펴보니, 즉 宮이 죽은 것은 마땅히 가을과 겨울 사이의 일이니, 그때에 광이 다시 살아 있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原註 『郡國志』에 따르면, 西安平과 帶方은 縣으로 모두 遼東郡에 속한다. 集解: 洪亮吉이 말하길, “『郡國志』을 살펴보니, 西安平縣은 遼東郡에 속하고, 帶方縣은 樂浪郡에 속하니, 注한 것이 틀렸다.”라고 하였다. 惠棟이 말하길, “『蔡邕集』에서 孝帝와 桓帝의 말년에 鮮卑가 塞로 들어와서 노략직하기 시작했고, 匈奴의 左部와 梁州가 모반하고, 羌族이 핍박하여 군사들이 淫衍을 베었으며, 東夷 高句驪의 아들 百固가 역모를 꾸며 아울러 군사를 일으켜서 세 변방이 떠들썩하였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질제·환제의 시대: 『後漢書』 권51, 「열전」 40 陳龜. “桓帝末 鮮卑·南匈奴及高句驪嗣子伯固並畔.”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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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성립과 제도, 문화 자료번호 : jd.k_0003_0075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