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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보초로(方長老)가 상경(上京)한 일에 대한 보고

一 (八) 동 11월 1일, 의례를 행하기 위해 등성(登城)했더니 집권들의 지시에 의해 모두 동행하여 사카이 히고노카미 다다토모님댁으로 갔다. 집권들이 말하길, “보초로(方長老)가 전에 막부의 권위를 빌려서 조선으로 건너가 상경(上京)했다주 001
각주 001)
겐포(보초로)가 조선의 도읍에 상경했다는 것은 1629년 소씨가 파견한 일본국왕사에서 겐포가 正使 역할을 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조선은 전기부터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파악하여 쇼군이 파견한 사절을 특별히 ‘일본국왕사’라 불렀다. 1627년 조선이 후금의 침략을 받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소씨가 이 사실을 막부에 보고하자 후금의 군사적인 위협이 조선에 이어 일본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쇼군 이에미쓰는 ‘조선의 도읍에 사신을 파견하여 정묘호란의 정황을 자세하게 보고하라’는 지시를 소씨에게 직접 하달했다. 번주 소씨의 입장에서 쇼군의 지시는 자신의 대조선 외교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사절의 正使인 겐포는 쇼군 명의의 국서를 위조하지도 않고 국서가 없는 채로 副使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와 함께 1629년 조선에 도해했고, 조선 정부와 복잡한 교섭을 거친 끝에 전례 없이 도읍 한성(漢城)에까지 상경할 수 있었다. 사절이 귀국한 후 소씨는 조선과 후금의 긴장관계(강화의 성립) 와, 조선이 일본 측의 원고(援軍) 제의를 거절했음을 막부에 보고했다. 이를 계기로 소씨는 막부에 급속하게 접근했으나, 시게오키에게는 불리한 전개였기 때문에 그가 소씨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노선으로 전환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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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부젠이 말하였다.”고 했다. 제가 그때 모두에게 “보초로가 상경한 것은 오로지 막부의 권위를 빌린 것이지, 사사롭게 도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예조(禮曹)에서 보낸 답서를 지금 제출하고, 또 부젠이 젊었을 때 군신의 길을 어기지 않겠다고 서약한 문서주 002
각주 002)
시게오키의 서약서(起請文)는 ‘下’권의 말미에 시게오키의 가신 시치에몬의 서약서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617년 시게오키가 조선통신사의 접대역할에 임명되어 15세에 쓰시마로 처음으로 내려왔을 때 소씨가 명하여 작성한 것이다. 사실 이때 시게오키의 쓰시마행도 번주가 몇 차례나 독촉한 끝에 겨우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게오키의 세력 확대와 소씨 경시태도를 위험시한 소씨가 시게오키와의 주종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 작성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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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제출하였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예조의 답장과 부젠의 서약을 보시고는 부젠이 막부에 거짓을 고했다고 모두 여기 썼다. 제가 드린 말씀이 지당하니 보고드려야 한다면서 그날 바로 오이노카미(大炊頭)님·이즈노카미(伊豆守)님·분고노카미(豊後守)님·다지마노카미(但馬守)님·마치부교(町奉行)·민부쇼유(民部少輔)님·시키베쇼유(式部少輔)님 모두 등성하셨다. 모두 열좌한 가운데 예조의 답장을 교부쿄에이키(刑部卿永喜)스님주 003
각주 003)
하야시 에이키(林永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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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읽게 하여 [내용을] 들으셨다.

  • 각주 001)
    겐포(보초로)가 조선의 도읍에 상경했다는 것은 1629년 소씨가 파견한 일본국왕사에서 겐포가 正使 역할을 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조선은 전기부터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파악하여 쇼군이 파견한 사절을 특별히 ‘일본국왕사’라 불렀다. 1627년 조선이 후금의 침략을 받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소씨가 이 사실을 막부에 보고하자 후금의 군사적인 위협이 조선에 이어 일본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쇼군 이에미쓰는 ‘조선의 도읍에 사신을 파견하여 정묘호란의 정황을 자세하게 보고하라’는 지시를 소씨에게 직접 하달했다. 번주 소씨의 입장에서 쇼군의 지시는 자신의 대조선 외교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사절의 正使인 겐포는 쇼군 명의의 국서를 위조하지도 않고 국서가 없는 채로 副使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와 함께 1629년 조선에 도해했고, 조선 정부와 복잡한 교섭을 거친 끝에 전례 없이 도읍 한성(漢城)에까지 상경할 수 있었다. 사절이 귀국한 후 소씨는 조선과 후금의 긴장관계(강화의 성립) 와, 조선이 일본 측의 원고(援軍) 제의를 거절했음을 막부에 보고했다. 이를 계기로 소씨는 막부에 급속하게 접근했으나, 시게오키에게는 불리한 전개였기 때문에 그가 소씨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노선으로 전환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시게오키의 서약서(起請文)는 ‘下’권의 말미에 시게오키의 가신 시치에몬의 서약서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617년 시게오키가 조선통신사의 접대역할에 임명되어 15세에 쓰시마로 처음으로 내려왔을 때 소씨가 명하여 작성한 것이다. 사실 이때 시게오키의 쓰시마행도 번주가 몇 차례나 독촉한 끝에 겨우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게오키의 세력 확대와 소씨 경시태도를 위험시한 소씨가 시게오키와의 주종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 작성하게 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하야시 에이키(林永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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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로(方長老)가 상경(上京)한 일에 대한 보고 자료번호 : kn.k_0001_0010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