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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경계조사범위와 관련해 양 측이 다시 논쟁

  • 발송일
    1885년 10월 7일(음)(乙酉十月初七日)
□ (1885, 고종 22, 10월) 7일주 434
편자주 434)
『勘界使謄錄』본문에서는 단지 ‘初七日’로만 되어 있으나, ‘十月初七日在茂山筆談’을 약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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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국 관원을 보고 또 말하기를, “이 일에 긴요한 것(肯綮주 435
편자주 435)
사물의 가장 요긴한 곳이나 일의 가장 중요한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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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오로지 비석(碑)과 퇴(堆)에 있으니 먼저 비가 세워진 곳에 가서 동쪽과 서쪽의 수원(水源)을 자세히 살펴보고 물의 흐름에 따라서 경계를 조사함(査界)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류(下流)의 지도 그리는 것(圖繪)은 날짜를 허비하는 것이고 무산(茂山)주 436
편자주 436)
광복 이전까지 함경북도 서북단에 있었던 군이다. 도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군으로, 동쪽은 부령군과 경성군, 서쪽은 함경남도 혜산군, 남쪽은 길주군, 북쪽은 두만강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6,163.91km2, 인구은 10만8552명(1945년 현재)이고. 1개 읍 9개 면 40개 동으로 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무산읍 천동이다. 지형적으로는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는 마천령산맥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함경산맥과 두만강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로서, 대부분의 지역이 높이 1,000m 이상 되는 용암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악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2,744m)을 비롯, 소백산(2,174m)·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아무산(阿武山, 1,803m)·백사봉(白砂峰, 2,099m) 등이 마천령산맥의 주봉을 이루며, 함경산맥에는 곤봉산(坤峰山, 1,927m)·도정산(渡正山, 2,201m)·관모봉(冠帽峰, 2,541m)·투구봉(2,335m)·황토암(黃土巖, 2,043m) 등의 높은 봉우리가 무수히 솟아 있으며, 이들 주봉을 분수령으로 연면수(延面水)·서두수(西頭水)·소홍단수(小紅端水) 등이 협곡을 이루면서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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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령(會寧)주 437
편자주 437)
함경북도 북부에 있는 군. 동쪽은 종성군, 서쪽은 무산군, 남쪽은 부령군, 북쪽은 중국 만주 지방의 길림성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9°29'∼130°05', 북위 42°10'∼42°35'에 위치하며, 면적 1,255.80km2, 인구 7만6155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6개 면 43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회령읍 일동이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다.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한동안 당(唐)나라의 군정하에 있었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우자 그에 편입되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해 있었다. 918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초기의 영역은 통일신라 시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북쪽은 발해와 경계를 이루었다. 926년(태조 9)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하자 이 지역은 우리 영토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한반도 북변은 이후 1115년(예종 10)에는 금(金)나라에, 1234년(고종 21)에는 원(元)나라에, 1368년(공민왕 17)에는 명(明)나라에 속하여 수세기 동안 그 영역이 변천되어 왔다. 한편, 지난날 발해가 멸망할 때 벗어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은 한때 금(金)제국으로 국운을 유지하다가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뒤로는 백두산 동북 방면에 할거하였으나, 그 일부 종족은 차차 남하하여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쳐 고려와 자주 충돌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도 여진족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와무허[斡木河] 또는 오음회(吾音會)라 불렸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지고 명나라가 새로 일어설 무렵인 공민왕 말엽에야 비로소 갑산에서 함경산맥 이동의 해안을 따라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고려의 영토로 수복되었다. 1398년(태조 7) 두만강 하구에 경원부를 설치하였으나 1409년(태종 9)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부로 후퇴시켰고, 무산령산맥 이북의 두만강변에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여진의 알타리족(斡朶里族) 추장 퉁몽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가 인족 523호를 거느리고 이곳에 입거하여 약 10년 동안 정착하였다가, 1433년 두만강 하류 대안의 우디카(兀狄哈)가 내습하자 추장 부자는 죽고 잔족은 두만강 북쪽으로 퇴거하였다.
 이 기회를 타서 다음해부터 육진(六鎭) 개척의 대사업이 시작되었는바, 당초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서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이곳에는 성보(城堡)를 설치하여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영북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같은 해 5월 와무허에 따로 진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회령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443년 이 군의 독산연대를 기점으로 두만강을 끼고 춘융에 이르는 행성 중 군내 1만1720척의 공사를 끝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가 역도 국경인(鞠景仁)에게 초박되어 왜군에 넘겨진 일도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회령군으로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행정구역의 변천이 있다가 1914년 관해면이 부령군으로 이관되어 8개 면이 되었다. 1952년 12월 회령읍·창두면·화풍면의 전체 리(里)와 팔을면의 5개 리, 벽성면의 4개 리, 부령군 서상면의 1개 리, 종성군 남산면의 2개 리로 개편되었으며, 1954년 10월 회령군 세천리가 세천노동자구로, 1961년 3월 궁심리가 궁심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1974년 5월 유선군과 종성군이 폐지되면서 유선군의 전 지역과 종성군의 일부 지역인 방원리·낙생리·행영리·굴산리·중봉노동자구가 이 군에 편입되었다. 1991년 7월 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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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강(江)주 438
편자주 438)
무산, 회령 모두 두만강에 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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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경계를 조사하는 것(査界)은 도무지 상관이 없는데 오로지 이같이 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도문강(圖們江)의 경계 조사는 이미 총서(總署)주 439
편자주 439)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줄인 말이다. 청(淸) 말기에 외교사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총리아문(總理衙門) 또는 총서(總署)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청 말기까지 중국의 외교사무는 예부(禮部), 이번원(理藩院)에서 담당했으나 해외 각국은 동등한 외교의 대상이 아니라 조공국(朝貢國)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자 1861년 중국은 구미 제국의 주중(駐中) 외국공사관 설치를 대비하여 베이징조약 체결 당시 교섭을 맡았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이 총서(總署)를 설치했다. 총서의 수장인 대신(大臣)은 대개 군기대신(軍機大臣)이 겸임하였으므로 군기처의 분국인 양상을 띠었다. 1901년 외무부가 개설되면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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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의(奏議)주 440
편자주 440)
한(漢)에서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장(章), 죄를 지적하는 것을 주(奏), 소원을 말하는 것을 표(表),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의(議) 등으로 일단 정해진 틀은 있었으나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았다. 또, 위(魏)·진(晉) 이하에서는 계(啓), 당(唐)에서는 표(表)·장(狀), 송(宋)에서는 차(箚)·장(狀)·서(書)·표(表) 등이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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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거쳤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마땅히 유지(諭旨)를 따르고 받들어 행하여 원류(源流)를 자세히 그려서 공손히 어람(御覽)주 441
편자주 441)
임금이 봄을 높여 이르던 말이다. 상람(上覽), 신람(宸覽), 천람(天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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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바쳐야 합니다. 만약 혹 거칠고 간략하고 엉성하게 해서 올려서 다시 조사해 명확히 해야 함이 있어 결국 두 가지 일이 되면 허물은 마땅히 어찌 돌아갑니까?”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주 442
편자주 442)
이 부분부터는 본문에서 다른 예를 보면 줄 바꾸기를 하였으나 무슨 연유인지 줄 바꾸기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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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백성의 일과 관계가 됩니다. 형(兄) 또한 독서인(讀書人)주 443
편자주 443)
동아시아에서 유교경전을 읽는 것을 주요 업으로 삼았던 유생(儒生)들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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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모름지기 공평하게 마음을 써야 할 것(公平用心)입니다. 혹시 치우치고주 444
편자주 444)
본문에서는 ‘遍’자로 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偏’자의 誤字일 것이다. 후대의 表記로 ‘?’의 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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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견해를 일으킴이 없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큰 나라 백성이나 작은 나라 백성이나 백성은 하나입니다. 만약 혹시 치우치고주 445
편자주 445)
본문에서 ‘遍’자 옆에 ‘偏’자가 쓰여 있는데, 후대에 교정한 듯하다. 문맥으로 보아 후대에 교정한 ‘偏’자의 예와 같이 ‘偏’자의 誤字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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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라서 비록 한 백성이라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찌 가히 공정한 조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 당연히 묵묵히 살펴야 할 일 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주 446
편자주 446)
원문에는 ‘何’자로 되어 있고 글자 옆에 후대에 ‘仍’자로 교정한 표기가 있다. 문맥으로 보아 후대에 교정한 ‘仍’자의 예와 같이 ‘仍’자의 誤字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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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오늘 화원(畵員)이 오면 내일 즉시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마땅히 약속대로 합시다.”라고 하였다.

  • 편자주 434)
    『勘界使謄錄』본문에서는 단지 ‘初七日’로만 되어 있으나, ‘十月初七日在茂山筆談’을 약칭한 것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편자주 435)
    사물의 가장 요긴한 곳이나 일의 가장 중요한 대목.바로가기
  • 편자주 436)
    광복 이전까지 함경북도 서북단에 있었던 군이다. 도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군으로, 동쪽은 부령군과 경성군, 서쪽은 함경남도 혜산군, 남쪽은 길주군, 북쪽은 두만강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6,163.91km2, 인구은 10만8552명(1945년 현재)이고. 1개 읍 9개 면 40개 동으로 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무산읍 천동이다. 지형적으로는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는 마천령산맥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함경산맥과 두만강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로서, 대부분의 지역이 높이 1,000m 이상 되는 용암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악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2,744m)을 비롯, 소백산(2,174m)·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아무산(阿武山, 1,803m)·백사봉(白砂峰, 2,099m) 등이 마천령산맥의 주봉을 이루며, 함경산맥에는 곤봉산(坤峰山, 1,927m)·도정산(渡正山, 2,201m)·관모봉(冠帽峰, 2,541m)·투구봉(2,335m)·황토암(黃土巖, 2,043m) 등의 높은 봉우리가 무수히 솟아 있으며, 이들 주봉을 분수령으로 연면수(延面水)·서두수(西頭水)·소홍단수(小紅端水) 등이 협곡을 이루면서 두만강으로 흘러든다.바로가기
  • 편자주 437)
    함경북도 북부에 있는 군. 동쪽은 종성군, 서쪽은 무산군, 남쪽은 부령군, 북쪽은 중국 만주 지방의 길림성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9°29'∼130°05', 북위 42°10'∼42°35'에 위치하며, 면적 1,255.80km2, 인구 7만6155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6개 면 43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회령읍 일동이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다.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한동안 당(唐)나라의 군정하에 있었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우자 그에 편입되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해 있었다. 918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초기의 영역은 통일신라 시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북쪽은 발해와 경계를 이루었다. 926년(태조 9)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하자 이 지역은 우리 영토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한반도 북변은 이후 1115년(예종 10)에는 금(金)나라에, 1234년(고종 21)에는 원(元)나라에, 1368년(공민왕 17)에는 명(明)나라에 속하여 수세기 동안 그 영역이 변천되어 왔다. 한편, 지난날 발해가 멸망할 때 벗어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은 한때 금(金)제국으로 국운을 유지하다가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뒤로는 백두산 동북 방면에 할거하였으나, 그 일부 종족은 차차 남하하여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쳐 고려와 자주 충돌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도 여진족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와무허[斡木河] 또는 오음회(吾音會)라 불렸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지고 명나라가 새로 일어설 무렵인 공민왕 말엽에야 비로소 갑산에서 함경산맥 이동의 해안을 따라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고려의 영토로 수복되었다. 1398년(태조 7) 두만강 하구에 경원부를 설치하였으나 1409년(태종 9)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부로 후퇴시켰고, 무산령산맥 이북의 두만강변에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여진의 알타리족(斡朶里族) 추장 퉁몽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가 인족 523호를 거느리고 이곳에 입거하여 약 10년 동안 정착하였다가, 1433년 두만강 하류 대안의 우디카(兀狄哈)가 내습하자 추장 부자는 죽고 잔족은 두만강 북쪽으로 퇴거하였다.
     이 기회를 타서 다음해부터 육진(六鎭) 개척의 대사업이 시작되었는바, 당초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서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이곳에는 성보(城堡)를 설치하여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영북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같은 해 5월 와무허에 따로 진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회령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443년 이 군의 독산연대를 기점으로 두만강을 끼고 춘융에 이르는 행성 중 군내 1만1720척의 공사를 끝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가 역도 국경인(鞠景仁)에게 초박되어 왜군에 넘겨진 일도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회령군으로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행정구역의 변천이 있다가 1914년 관해면이 부령군으로 이관되어 8개 면이 되었다. 1952년 12월 회령읍·창두면·화풍면의 전체 리(里)와 팔을면의 5개 리, 벽성면의 4개 리, 부령군 서상면의 1개 리, 종성군 남산면의 2개 리로 개편되었으며, 1954년 10월 회령군 세천리가 세천노동자구로, 1961년 3월 궁심리가 궁심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1974년 5월 유선군과 종성군이 폐지되면서 유선군의 전 지역과 종성군의 일부 지역인 방원리·낙생리·행영리·굴산리·중봉노동자구가 이 군에 편입되었다. 1991년 7월 시로 승격되었다.바로가기
  • 편자주 438)
    무산, 회령 모두 두만강에 접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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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줄인 말이다. 청(淸) 말기에 외교사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총리아문(總理衙門) 또는 총서(總署)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청 말기까지 중국의 외교사무는 예부(禮部), 이번원(理藩院)에서 담당했으나 해외 각국은 동등한 외교의 대상이 아니라 조공국(朝貢國)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자 1861년 중국은 구미 제국의 주중(駐中) 외국공사관 설치를 대비하여 베이징조약 체결 당시 교섭을 맡았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이 총서(總署)를 설치했다. 총서의 수장인 대신(大臣)은 대개 군기대신(軍機大臣)이 겸임하였으므로 군기처의 분국인 양상을 띠었다. 1901년 외무부가 개설되면서 폐지되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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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에서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장(章), 죄를 지적하는 것을 주(奏), 소원을 말하는 것을 표(表),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의(議) 등으로 일단 정해진 틀은 있었으나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았다. 또, 위(魏)·진(晉) 이하에서는 계(啓), 당(唐)에서는 표(表)·장(狀), 송(宋)에서는 차(箚)·장(狀)·서(書)·표(表) 등이 많이 쓰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441)
    임금이 봄을 높여 이르던 말이다. 상람(上覽), 신람(宸覽), 천람(天覽).바로가기
  • 편자주 442)
    이 부분부터는 본문에서 다른 예를 보면 줄 바꾸기를 하였으나 무슨 연유인지 줄 바꾸기를 하지 않았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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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에서 유교경전을 읽는 것을 주요 업으로 삼았던 유생(儒生)들을 부르던 이름이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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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는 ‘遍’자로 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偏’자의 誤字일 것이다. 후대의 表記로 ‘?’의 표시가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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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 ‘遍’자 옆에 ‘偏’자가 쓰여 있는데, 후대에 교정한 듯하다. 문맥으로 보아 후대에 교정한 ‘偏’자의 예와 같이 ‘偏’자의 誤字일 것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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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에는 ‘何’자로 되어 있고 글자 옆에 후대에 ‘仍’자로 교정한 표기가 있다. 문맥으로 보아 후대에 교정한 ‘仍’자의 예와 같이 ‘仍’자의 誤字일 것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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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조사범위와 관련해 양 측이 다시 논쟁 자료번호 : gd.k_0001_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