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遼)의 국신사(國信使)를 작별하는 잔치에서 요의 군주에게 답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의 글
병인일에 요의 국신사(國信使) 소희(蕭禧) 등이 자신전(紫宸殿)에서 작별 인사하니, 수공전(垂拱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요의 군주에게 답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두 나라 조정의 우호가 이어져 온 것이 지금까지 6기[72년]이고, (양국 사이의) 일은 옛 상규를 따르고 안부를 물어온 것이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서로 연달아 사신을 주고받으면서 칙유가 변방에 오게 되면 이미 약속된 관사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게 하였습니다. 예전부터 땅을 지켜온 사실에 따라 구분하여야 하는데, 사신이 아직 가고 있지도 않은데 귀국의 군대가 먼저 모여 망루를 공격하여 불태우고 순찰하던 병사를 활로 쏘아 부상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힘을 다해 싸우겠다는 것을 보인 것으로 완전히 화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귀국은 가운데에 홀로 앉아 우리의 자리를 신하의 위치를 고치려고 합니다. 횡도곡(橫都谷)에 자리를 설치하는 때에는 거듭하여 자리를 빈주(賓主)의 위치에 마련하는 것을 어려워하였습니다. 여러 번 논의가 오간 끝에 겨우 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그 지역은 세 개의 주가 접하고 있어 형세가 한결 같으니, 함부로 서형채(西陘寨)라는 한 곳을 예를 들어서 모든 요새의 영역에 대해서는 한데 묶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를 위해 여러 차례 문서를 요구하였지만 증거는 없었습니다. 함께 현지를 조사하는 것도 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한 양측의 입장은 괴리가 있어서 점점 상황은 정체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귀국의 관료가 황제의 뜻을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하며, 나라의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신을 파견하여 거듭 편지로 질문을 드리며, 많은 예물을 바치게 되어 기쁜 마음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경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모두 문서를 주고받은 것이 분명하게 증거로 있습니다. 그렇지만 귀국 변신의 논의를 답습하고는 단지 우리측 담당자의 병으로 인해 지체되고 있다고 허물로 삼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깊이 살펴보면 사신이 아뢰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거듭 생각하건대 천지와 귀신의 부름에 응하여 함께 맹세의 말을 세우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고 백성의 생업을 각기 완전히 하고자 합니다. 종종 많은 수량의 은과 비단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겨우 땅을 탐내겠습니까? 다만 논의를 한 후에 국경의 침범이 없게 하려고 할 뿐인데, 귀국의 사신은 객관에 머물면서 분수령으로 국경을 획정할 것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추밀원이 타협안을 주어도 군사를 일으켜 우리측 군사시설을 이동, 파괴하는 것은 어찌 수년에 걸친 맹약을 사소한 이유로 파괴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지도를 보고 멀리 도읍에서 다시 획정을 한 후에 담당자에게 경계를 고치게 하겠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황제의 총명함으로 깊이 이해해줄 것을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참지정사 여혜경(呂惠卿)주 001이 쓴 글이다.
처음에 (거란의) 소소(蕭素), 양영(梁穎)주 002이 유침(劉忱)주 003, 여대충(呂大忠)주 004과 만나 지계 문제를 논의했는데, 오래도록 결정내리지 못하여 소희를 다시 보내오니, 한진(韓縝)주 005, 왕사약(王師約)주 006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했다. 소희가 국서를 전달하고 또한 그 나라의 차자 한 통을 바쳤는데, 그 요지는 소소와 양영이 말한 바와 같았고 또한 유침 등이 지연시켰다고 말했다. 한진 등은 며칠간 소희와 논의했는데, 소희는 단지 분수령을 경계로 삼자고 고집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디가 분수령인지 별도로 말하지 않았다. 조서를 내리기를, 두 나라가 화친을 맺은 지 오래되어 지금 변방의 신료에게 각각 자세히 살펴보는 임무를 맡기려 하는데, 오히려 유침 등이 두루 미치지 못했다고 아뢴 바가 염려되어 이미 한진과 장성일을 다시 보내 말을 타고 국경으로 가게 했으니, 화해하고 협의하라고 했다. 소희로 하여금 이로써 돌아가 보고하게 했으나 소희는 명을 받지 않았다. 또한 내시 이헌을 보내 조서를 갖고 가서 보이면서 장련성과 육번령을 경계로 삼기로 허락하고, 변방의 포사(방어시설)를 찾아내어 가까운 곳으로 옮기게 했다. 장련성, 육번령은 치평(治平)주 007 2년(1065) 거란이 일찍이 여기에 포(역참)를 설치했는데, 변방의 사람은 그것이 침략, 훼손되어 후에 다시 오지 않았다. 이 때 그 옛 터에 포의 설치를 허가했다. 그러나 소희는 오히려 따르지 않고 이전의 의견을 고집했다.
황제가 어쩔 수 없이 먼저 심괄(沈括)주 008을 보내 보빙할 것을 (신료들과) 논의했는데, 이에 추밀원이 말하기를, “본조의 변방 신료가 장련성, 육번령이 경계임을 입증하는 공문서 60통에서 다수는 북계에서 관구(關口), 파포(把鋪) 등지에서 적을 잡고 교종(交蹤)한 곳이 모두 장련성, 육번령의 북쪽이라고 말하고, 순의군(順義軍)주 009의 중희(重熙)주 010 2년(1033) 3월 18일 첩문에는 남계에서 장련성 양계 분수령에서 체포한 적인 장봉원 등을 산 뒤쪽으로 이송했는데 경계를 넘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법에 따라 처단했다고 합니다. 또한 순의군의 청녕 9년(1063) 10월 첩문에는 남계에서 노략질하던 대주(代州)주 011 곽현(崞縣)주 012 적니교(赤埿膠) 주호인 백우(白友)라는 소도둑을 잡은 일을 말하는데 장련성 분수령 상에서 양계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또한 백우가 대주 곽현의 주호와 관계되어 옛 장성이 아니라 가까운 분수령이 경계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치평 2년(1065) 북계에 포사를 이동시킨 것은 국경을 침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지에서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오래되어 장련성, 육번령 남쪽을 옛 터에 의거하여 보수하도록 했는데 이미 화친을 좋게 한 것입니다. 지금 소희는 다시 분수령이 경계라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가 산령, 수세, 분류를 모두 분수령이라 부르는데 있습니다. 지난 날 소소 등이 가져 온 입증하는 문서 3통에서 대석(大石)주 013, 의흥야(義興冶)주 014 두 성채가 이미 북계를 침범하여 치평 연간의 처리방침을 지키지 않아 장련성이 경계가 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서형채(西陘寨)주 015에서 가져온 장경(張慶)의 문서에 따르면 분수령 위에 토농(土隴)이 있다고 하는데 가리키는 곳에는 토농이 없습니다. 더불어 장경의 문서는 안문채(雁門寨)주 016 지역에서 북계 차로군(遮虜軍)주 017까지 11리라고 하는데, 지금 안문채에서 장련성까지 약 8~9리이고, 장련성에서 차로군까지 약 2리이니 이 또한 장련성이 경계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유침 등이 일찍이 소소 등에게 첩장을 보내 어느 산의 이름이 분수인지 지정하게 했는데, 소소 등이 답장을 보내와 말하기를, ‘변경의 산명, 지리, 계지(界至) 등 남쪽 경계를 스스로 알 만한데 어찌 문서를 보내 묻는 것입니까?’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원래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소희가 고집하는 바가 소소 등과 같은데 입증할 만한 문서가 전혀 없습니다. 바라건대 심괄 등으로 하여금 북조에 도착하는 날 입증하는 문서를 내보이며 일일이 북조에 알리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조서를 내리기를, “우리나라와 거란의 화친 기간이 오래되었으니 강역의 작은 문제로 우호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다. 이미 치평 연간에 포를 세운 곳을 옛 터에 의거하여 보수하도록 허가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썼는데, 도리어 입증여부를 막론하고 분수처를 지정하지 않으면, 조사할 때 (영토를) 분할하기 어려울까 걱정된다. 하나, 이복만(李福蠻) 지역은 현재 참호를 개방한 곳의 분수령을 경계로 삼도록 허락한다. 하나, 수욕(水峪) 안의 의아마포(義兒馬鋪)와 삼소포(三小鋪)는 가까운 남쪽으로 옮기고 현재 안신포(安新鋪) 산꼭대기 분수령을 경계로 삼는다. 하나, 서형채(西陘寨) 지방으로부터 제1, 제2, 제3, 제4, 제5 원탐(遠探)과 백초포(白草鋪) 산꼭대기 분수령에서 서쪽으로 접해 있는 옛 장성을 경계로 삼는다. 하나, 황외산(黃嵬山)주 018 지역은 이미 인종조에 관리와 북계관리를 섭재우(聶再友) 등이 이미 침범한 경지의 바깥으로 보내 표식 4개를 세웠다. 천지묘(天池廟)는 순의군의 첩장에 그 지역이 영화군(寧化軍)주 019에 속한다고 했으니 의논할 수 없다. 하나, 와요오(瓦窰塢) 지역은 이전 양계의 관사가 상의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미 지휘 한진 등이 즉시 조사하여 영토를 분할하고 분수령을 경계로 삼아라”라고 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답서를 갖고 가서 소희에게 보이니, 소희가 이에 인사하고 물러갔다. 심괄이 소희가 가는 것을 문후하고 갔다. 예전에는 사신이 도성에 10일 이상 머무르지 않았는데, 소희는 3월 경자에 와서 들어와 인사하고도 가지 않고 한진 등과 논쟁하거나 밤에 이르러 헤어지니, 도성에 머무른 기간이 거의 1개월이었다. 소희가 다시 오자 황제가 입내공봉관(入內供奉官)주 020·구당내동문사(勾當內東門司)주 021 배욱(裴昱)을 보내 한기, 부필, 문언박, 증공량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조정이 북조와 통호한 지 거의 80년이 되었는데 근래에 말썽이 일어나는 바가 매우 심해졌다. 대북(代北) 지역은 본디 봉지가 정해졌으나, 번번이 불화를 만들어서 터무니없이 와서 주장했다. 번번이 관리에게 명을 내려 함께 가서 조사하게 했는데, 비록 지도와 호적이 명확해도 궤변으로 불복하니, 지금 난폭한 사신이 다시 와서 반드시 얻고자 한다. 짐이 조종이 맹호(盟好)한 것의 엄중함으로 진실로 관용을 베풀려 하는데, 적의 성정이 만족함이 없고, 형세가 끝나지 않을까 두려우니, 만일 (이를) 헤아리지 않으면 어찌 대하겠는가? 예전에 중요한 정무는 반드시 원로들에게 문의했다. 경들은 충성과 절의를 품고 세 분의 황제를 섬겼으니 비록 그대들의 몸이 밖에 있어도 마음이 왕실에 없지 않으니, 대우하는 요령과 방어하는 방책을 빈틈없이 갖추어 아뢰면, 짐이 친히 (그것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기가 말하기를, “신이 노년에 병이 많아 심력(心力)이 소모되어 나날이 다시 치사(致仕)를 청해서 이 노쇠한 몸을 보전하고자 했습니다. 생각지 않고 있었는데 폐하께서 북쪽의 적이 사단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예방(預防)의 방법을 깊이 생각하시고, 기억하신 것이 외롭고 어리석은 (신에게) 미쳐 간곡하게 물어보기에 이르셨으니 감히 쇠잔해진 기력을 힘써 다하지 않을 수 없고 황제께서 의문이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거란이 강성함을 칭하며 북방에서 중국과 대항한 것이 대개 170여 년이 되었습니다. 석진(石晉)이 토지를 할양하면서부터 아울러 한(漢)의 강역을 점유했고 밖으로는 여러 오랑캐들을 겸병하여 더욱 스스로 교만하게 커졌으며 조종(祖宗)의 시대에는 여러 번 남쪽에서 유목하면서 횡포가 극에 달했습니다. 마땅히 이때에 어찌 천하의 힘을 다하여 반드시 그들과 겨루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에는 백성을 애석하게 여겨 굽히며 화호(和好)로 나아갔으니 무릇 변경에는 일이 시작되는 바가 있었고, 대대적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것을 깊이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70년 동안 두 변경 백성들은 각각 편안히 생업에 종사했고 늙어 죽을 때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전투의 일을 알지 못했으니 지극한 인자함과 큰 은혜가 (이보다) 더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이 근년 이래에 조정이 일을 행함을 보니 강한 적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들은 평소에도 오랫동안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보다 일찍이 조금도 아래인 적이 없었으니 하루라도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 반드시 우리에게 연남(燕南)을 수복하기를 도모하려는 뜻이 있다고 말하는데, 비록 듣기로는 그들의 군주가 나약하고 불교에 심취해 있다고 하지만 어찌 강력한 종실과 무릇 모신(謀臣) 및 책사(策士) 중에 먼저 사람들을 제압하는 말을 인용하는 자가 없어서 이러한 갈등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차례 횡포한 사신을 보내서 지계(地界)를 따진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우리가 응대하는 것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보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에 대해서 신이 그 대략적인 내용을 진술해 보겠습니다.
고려는 거란에 신속(臣屬)하여 조정에 오랫동안 조공을 끊었다가 최근에 절로(浙路)에서부터 사람을 보내 초유했더니 (조정에) 왔습니다. 또 고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거란의 성대함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가)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국가에 손해나 이익이 될 것이 없는데, 거란이 이를 알면 조정에 장차 자신들을 도모하려 한다고 말하니 이것이 거란의 의심입니다. 진주(秦州)는 옛 위(渭)의 서쪽으로 토번의 부락이 산야(山野)에 흩어져 거주하면서 군장(君長)으로 다스리지 않는데도 농사를 짓고 목축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어 일찍이 변경의 근심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최근에 들으니 그 땅을 강제로 취하여 희하(熙河)라는 로(路)주 022 하나를 건립하고 노인과 아이를 죽인 것이 수만에 달한다고 하니 소모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하주(河州)주 023는 혹여 이르기를 땅이 유목민을 다스리는 곳에 속해 있고 곧 거란의 사위이며 이미 땅을 개척한 것이 그치지 않음이 염려되니 어찌 (거란에) 가서 하소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거란이 이를 듣고, 당연히 장차 자신들에게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 거란의 의심입니다.
북쪽 변경의 땅은 서산(西山)과 가깝고 지세가 점점 높아져서 저수지가 있을 수 없는 곳인데, 최근에 들으니 관리를 파견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두루 심어서 그것이 성장하여 적의 기병을 제어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경 지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지난날 경력(慶曆) 연간에 모욕적인 내용의 서신에서 이른바 ‘제방(隄防)을 만들어서 중요 길목을 막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믿을만해서 방어막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거란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삭(河朔)주 024의 의용군과 민병을 배치한 것이 세월이 오래 지나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이미 숙련되었고 장교들은 아주 잘 정돈되었으며 가르침 또한 면밀했는데, 갑자기 보갑(保甲)으로 편제하여 모두 뒤섞여 버렸습니다. 의용군에 있던 옛 사람들은 열에 일곱이 떠났고 혹은 보갑에 편입되거나 혹은 직임을 잃고 귀농하니 수를 늘린다는 헛된 명분을 얻으면서 활용할 수 있는 성법(成法)을 파괴했으니 이 또한 도리어 거란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국경을 관리하겠다고 왔을 때부터 하삭의 연변(緣邊)과 근처의 주군(州郡)에는 함께 관리를 파견하여 (상황을) 검토하고, 성루(城壘)를 고쳐 쌓고 참호를 준설(浚渫)하니 조주(趙州)주 025와 기주(冀州)주 026 및 북경(北京)주 027에서 이를 도와 일을 한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적을 감시하기 위한 누대(樓臺)와 전투용 누각의 부류는 모두 더욱 완벽하게 수리하고 수를 늘려 배치하고, 성을 방어하는 무구(武具)들은 전부 충분히 갖추라고 했으며 각지의 병사와 무기는 여러 차례에 걸쳐 관리를 보내 검사했으니 점검하고 추궁한 것이 앞뒤로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각지에 도작원(都作院)주 028을 창설하고 새로운 양식을 반포하여 널리 제작할 것을 꾀하니 전주(澶州)주 029 등지에서는 전차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었고 첩자들도 쉽게 염탐했으며 또 적들은 움직임이 없어 그들은 추호의 손해도 입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재물을 소비하고 힘을 다해서 먼저 스스로 극도로 피폐해졌으니 이 또한 도리어 거란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근래에 다시 하북에 37명의 장군을 두어 각자 군정만을 관할하게 하고, 주현은 간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웅주(雄州) 지역은 멀리 떨어진 변경을 관통하고 있어 또한 장군의 둔영을 설치했고, 그 군대에 수반되는 의복과 물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이미 갖추게 해야 할 것, 본영(本營)으로 하여금 더 두게 만들 것, 관으로 하여금 만들게 해서 지급할 것과 상호(上戶)로 편성될 자들의 수레, 말, 나귀, 노새에 이르기까지 준비하여 따라가게 했으니 이는 차제(次第)에 출정하겠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으로 숨길 수가 없으니 이 또한 깊이 거란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무릇 북조(北朝)는 평소 적국인데 이와 같이 배치를 하면 의심이 쌓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면 또한 좋은 것은 스스로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 횡포한 사신이 다시 이르러 처음부터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조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물며 대북(代北)과 웅주가 평소에 정해진 경계인데, 만약에 관용을 베풀어 땅을 주게 되면 진실로 그들의 정세에 만족함이 없어지면서 침입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진실로 성상(聖上)의 조서로 깨우친 바와 같으려면 결코 줄 수 없습니다. 혹여 이로 인해 허락하지 않으면 그들은 마침내 이를 가지고 이미 정해졌다고 하면서 멋대로 크게 들고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세력이 반드시 점점 여러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여 결국에는 맹약을 깨뜨릴 것입니다.
대개 일에는 원인이 있어서 이에 이르게 되니 번거로이 조서로써 방어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의 요체를 물어보셨습니다. 스스로 노쇠한 몸을 돌아보며 밤낮으로 생각했는데, 장차 무슨 계책을 올려 성상의 정책을 돕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듣기로 말을 하지 않는데도 말을 하는 것을 성급하다고 일컫고, 말을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을 숨긴다고 일컫는다고 합니다. 신이 예전에 일찍이 청묘전(靑苗錢)을 시행하는 것은 불편한 사안이라고 이야기하자 언관(言官)들은 번번이 거리끼지 않고 심하게 비방을 했는데, 폐하의 명철(明哲)함이 아니었다면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법(新法)의 치하에 있으면서부터 비록 그 중에서 심정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지만, 사실상 혐의를 피하면서 감히 다시 논의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직접 조서를 통한 질문을 받으니 사안이 국가의 안위와 연계되어 있어 말을 하면서도 숨기면 이는 엄청난 불충이니 그 죄는 주살(誅殺)되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삼가 헤아려보니 처음으로 폐하를 위해 정책을 꾀한 자가 반드시 말하기를, ‘조종 이래로 기강과 법도는 대부분 구차하고 간략한 것을 답습했으니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의 근본은 마땅히 먼저 부강의 수단에 있는데, 재물을 모으고 곡식을 쌓으며 백성을 군사로 훈련시키면 사방의 오랑캐를 혼내서 당나라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할 수 있고 그러한 연후에 예악(禮樂)을 제정하여 문치(文治)를 통해 태평해지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청묘전을 시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이익을 내게 하여 얻은 이익은 다시 자본으로 삼았으며 단지 많이 취득하는 것에 힘써서 해마다 본전(本錢)을 늘리니 정해진 기준이 없습니다.
또 면역(免役)의 법이 있어 상등(上等)부터 하호(下戶)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서대로 돈을 내게 했고 사람을 모집하여 역을 받게 했습니다. 종래에 상호가 돌아가면서 아전의 중난(重難)주 030을 충당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때때로 손실된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상호가 매년 돈을 내는 것이 30여 민(緡)을 넘지 않아 평안하고 아무런 탈이 없지만 하호 중에 평소에 역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년 돈을 내게 하니 이는 곧 하호에게는 손해이고 상호에게는 이익이 되어 비록 다양한 방식으로 잘못을 바로잡아도 결국에는 좋은 법이 아닙니다. 또 역전(役錢) 내에는 매년 또 관잉전(寬賸錢)주 031을 납부해서 다른 용도에 대비하는데, 이를 일컬어서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또 농민은 여름과 가을에 세금을 납부하는데, 1년에 2번은 납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처음으로 검열하는 형벌이 있고 지금은 청묘전과 역전을 납부하여 이미 세금을 추가했으며(납부의) 기한을 넘긴 사람은 또한 두 세금의 법에 의거해 검열하면 한 호가 1년 내에 항상 6번 검열을 받게 되니 백성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약간의 홍수나 가뭄을 만나면 관에 낼 돈을 체납하여 떠돌아다니며 생업을 잃은 것이 이미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또 내외에는 시역무(市易務)를 설치하여 전국에 있는 상인들의 물건을 모두 독점하여 관이 스스로 이득을 취하면서 주로 이익을 얻는 것을 공적으로 삼아 조그만 것도 반드시 취하니 영세 상인들은 결국 취급할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제도가 매일 시행되면서도 바뀌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주현의 관리들은 (법을) 알지 못해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는데, 조금이라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도형(徒刑)에 처해지고 비록 사면 조치가 내려진다고 해도 쫓겨난 관리는 면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監司)는 책무를 독촉하여 각박한 것을 밝음으로 삼으니 장부(帳簿)의 가혹함은 고민(告緡)주 032보다도 과도하기 때문에 주현 사이에서 관리들이 두려워해서 나날이 구차해지니 모두 죄에서 벗어난 것을 행운으로 여깁니다. 무릇 농민은 국가의 근본입니다. 상인은 국가를 위해 재물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관리는 조정의 교화를 돕는 사람입니다. 지금 농부는 토지에서 원망하고 있고, 상인은 도로에서 탄식하고 있으며 관리는 소재 지역에서 직임을 편안히 수행하지 못하니 폐하께서 모두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염려됩니다. 무릇 사방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막아서 태평을 일으키고자 하지만, 먼저 국가의 근본을 어지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가고 원망하는데 예부터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공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폐하를 위해 처음으로 정책을 꾀한 것이었다니 큰 잘못입니다. 폐하께서는 요 임금의 인자함과 순 임금의 총명함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잘못됨을 인지하셔서 오류를 고치실 수 있으니 성인의 큰 덕입니다. 지금 또 진격을 좋아하는 사람이 국가의 이해는 돌아보지 않고 단지 변경의 일을 장차 일으켜 부귀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방책을 올려서 폐하를 속인 자는 필시 ‘적의 세력이 이미 쇠하였는데 단지 겉으로만 교만해 보일 뿐입니다. 폐하의 신성한 문무(文武)로 장수를 선발하여 대병(大兵)을 이끌고 적과의 경계에 깊이 들어가게 한다면 유주(幽州)와 계주(薊州)의 땅까지 일거에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하삭(河朔)은 여러 해에 걸쳐 재해가 발생하여 민력(民力)이 크게 떨어져 있습니다. 변경과 그 뒤의 주군(州郡)의 추량(芻糧)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새로 선발한 장수들은 모두 거칠고 용감하여 보갑(保甲)에 새로 보충되었으나 아직 훈련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막강한 군대를 보내어 견고한 성 아래에서 진을 치더라도 식량이 지급되지 못하여 적이 사방에서 원조하여 앞뒤가 적에 막혀 퇴각하려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합니까? 이는 태종 때에 조빈(曹彬)주 033·미신(米信)주 034과 같이 명망 있는 훌륭한 장수들 조차 오히려 기구(岐溝)주 035에서 패한 요인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지금 폐하를 위해 계책을 올리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 보빙(報聘)하여 예물을 넉넉히 보내어 두터운 신뢰를 보이면 정성이 도달할 것이라는 겁니다. 또 이르기를 조정에 앞서 새로 부흥시킬 방안은 곧 수비의 일상적인 것이고, 북조(北朝: 거란)와 통교는 오래 되었는데 비록 전례없는 것이나 어찌 다른 뜻이 있겠으며 첩자들의 오해가 아닐지 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또 영토는 본래 정해진 것으로 마땅히 옛 지계(地界)와 같이 할 것이며, 변방의 하급관리는 근자에 차지한 땅에서 물러나게 하여 조정의 흔난을 일으켜서 조정 누대에 걸친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지 말고, 돈독한 신의를 유지하여 양쪽의 의심을 끊어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거란의 의심을 받는 일은 장수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들을) 파직하여 저들의 의심을 풀어야합니다.
만일 (그들이) 말을 듣고 따른다면 세월을 끌수 있어서 백성을 양육하고 사랑하며 현자를 선발하고 능한 이를 임용하며 간사한 이들을 멀리하고 충신을 임용하기에 더욱 힘써 천하가 기쁜 마음으로 복종을 할 수 있습니다. 변방의 수비를 날마다 정비하고 요새에는 곡식이 풍족하고 금고에는 재화를 넉넉하게 두어, 적의 쇠잔해진 형세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떨쳐 무예를 펴면 옛 영역을 회복하고 충의로운 사람들의 불평하는 마음을 되돌리고 조종 누대의 분을 씻어내어 폐하의 공덕이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태양이 무궁하게 비추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불복한다면 약속을 저버리고자 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곧 하북(河北)의 여러 주에 깊은 도랑을 파고 높을 보루를 세우도록 하여 스스로 수비함에 힘쓰게 하여야 합니다. 적이 과연 침입하면 그곳의 병사가 상황을 엿보다 몰아서 쫓아버리고 대수(大帥)는 진중하게 보존하여 이로부터 승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저들이 오고 우리들이 가면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진 것으로 싸움에서 늘 있는 것이며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 언제 다시 쉴지는 알지 못합니다. 청야(淸野)의 전술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행하기는 어려우니 대개는 상황에 따라서 한 지역의 백성들이 호마다 우마(牛馬)와 곡식을 이끌고 모두 성곽에 들여보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개 그때가 되면 혹자는 산채(山寨)를 보존하고자 가는 자도 있고, 혹자는 모든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 자도 있고, 혹자는 장사(莊舍)를 지키기 위해 머무르는 자도 있고, 혹자는 가까운 곳에서 성곽으로 들어와 머무는 자도 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편한 것을 하도록 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먼저 정한 것만을 도모하여 따르는 것을 불가하니 필시 성곽에 들어와 거주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비록 엄하게 명령을 내려도 필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도 경계의 북인(北人)들의 소란을 여러 번 거쳐서 지방민들이 도적을 피하여 모두 이와 같이 하였으니 원컨대 조정에서는 일일이 이를 처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세 조정을 섬겨 10년간 보상(輔相)으로, 관직이 극품(極品)에 이르러 고향에 영화롭게 돌아가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는 자인데, 나이가 70이고 지병이 몸에 있어 매번 치사를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으로 앞에 나아가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근래에 성상(聖上)의 물음에 감히 한번 말씀을 올리니 선인(善人)을 시기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더 나아가고자하는 것도 아니니, 스스로 확신하는 것만 활용한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사람들은 점점 감히 직언을 올리는 사람이 없어지니, 신이 여러 대에 걸쳐 은혜를 입은 것에 힘입어 실로 저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하나의 깨달음으로 성심을 다해 바라는 것은 조종의 성대한 복을 위함입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더욱 살피시어 신뢰를 내리시는 것은 비단 노신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영광입니다.”라고 하였다.
부필이 말하기를, “신은 본디 재업(才業)이 부족하여 이부(二府)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정력이 남에 미치지 못하였고, 지금 늙어서는 병으로 기지(氣志)가 쇠락하였으니 어찌 중요한 정사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실로 저의 소견이 없으나 지금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를 적어 올려 아뢰오니, 부디 성상의 총명함으로 판단하여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5, 6년 동안 듣자오니 수주(綏州)주 036·나올성(囉兀城)주 037·희하(熙河)·진주(辰州)주 038·금주(錦州)주 039·융주(戎州)주 040·노주(瀘州)주 041·교지(交趾)에 군사를 쓰는 것을 모두 의논하였는데 교지에 대해서만 중단하기로 하고 나머지 곳들은 모두 공격하기로 하여 혹은 이기거나 혹은 잃기도 했다는 것이 천하에 전해졌습니다. 수주·나올성·희하가 처음 흥거하였을 때 다시 듣기로는 조정에서 후에 영하(靈夏)를 회복하고 하란(賀蘭)을 평정했다하고 이윽고는 연(燕) 지역을 평정할 계책을 올린 이가 있다고도 하니 이와 같은 말들만 무성합니다. 북인들은 필시 탐지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조정에서 기갑(器甲)이 완전하게 수리되었는지 군대가 잘 훈련되었는지 성보(城堡)가 증축되었는지 추량이 넉넉한지 더해서 (송이) 고려를 초치하여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원조로 삼았는지를 탐지할 것입니다.
근래에 또 하북 지역에 37명의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조사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여 상황은 급박해지고 떠들썩한 상황은 점차 오래되고 있으며 일의 기틀은 참고하여 종합하니, 이것이 적들이 먼저 틈을 만드는 까닭이 되어서 대북(代北)의 변경을 침탈하는 단초로 삼아 그만두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하란과 연 지역을 평정하려는 계책의 허실은 진실로 알 수는 없으나 전하는 사람이 이미 많고 오래되어 수많은 사람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니 그 누가 다시 명백히 밝히겠습니까? 설령 변별된다하여도 멀리 있는 오랑캐에게 어찌 신뢰를 얻겠습니까? 지금 불화의 틈은 이미 생성되었고 대북(代北)의 병마가 국경에 각기 둔하고 있으나 의논을 하며 세월을 보내지만 결론내지 못하고 횡포한 사신만 이르러 다시 일이 조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변방 신료의 직무이나 조정에서 그것을 맡아 부담하여 이치상 늦추기 어려워 가부를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거스르면 병사들이 들고 일어나 우환이 질풍같이 미치고, 그것을 따르면 하동(河東)의 척후가 지체되어 비록 우환은 늦춰질 것이니 대체로 옳지 못함이 자명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이는) 변방의 신료에게 모두 맡겨서 오래전에 내려온 강계(疆界)에 관한 도적(圖籍)을 근거로 삼아 견지하도록 명하고 (그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거란에게) 서로 힐난하게 만드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북인들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고, 고의로 일을 일으키고자 하여 마침내는 군사를 일으켜 그 기운이 우리를 삼킬 듯이 하여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해온 일을 빼앗고자 할 것입니다. 저들이 이유가 없어서 이러한 사단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니, 실로 (원인이) 있다면 그들을 오게 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살피고 숙려하시되 항상 오로지 적인이 흔단을 만들고 맹약을 배반할 것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만약 저들이 침입하면 사안이 부득이하니 우리는 병력을 엄히 배치하면서 대비하게 되니 (저들이) 오면 방어하며 싸우고 (저들이) 가면 수비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중국에서의 변방을 방비하는 기본 계책입니다. 만약 조정에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들어가 토벌하고자 한다면 신은 만에 하나 잘못이 생겨 그 해가 작지 않고 다시금 서하가 엄청난 기세로 몰아쳐 조정의 근심이 될까 염려됩니다. 일이 이에 이르러 변경에서 변고를 급하게 아뢰었으나 군대의 식량이 모두 바닥나서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모름지기 사방의 흉악한 무리들을 방비함에 필시 관망하는 자도 있어 국가 변방의 일외의 것들만 이야기하면서 그 세력이 우리를 제어하지 못한다 하다가도 끝내는 서로 모여 떠들어대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니 일이 장차 어찌되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폐하께서 종사(宗社)를 걱정하시어 민생을 염려하시고 과오를 포용하십시오. 또한 안정을 구하시고 세시(歲時)에 풍년을 다시 기다리시어 곤궁함을 타파하시고 유망하는 백성이 점차 돌아와 민생이 평안해지고 세금에 소실이 없으며 창름은 빈곳이 없어 은혜와 신뢰가 널리 퍼지고 인심이 고결해지게 하십시오. 그러한 후에 만전의 거사를 도모하시면 크게 어그러지는 실책을 면하실 수 있으니, 이는 천하가 원하는 바이자 신의 뜻이기도 합니다.
전일에 폐하께서 친정(親征)의 계획을 결정하셨다는 이야기가 퍼져 안팎으로 이익을 도리어 걱정하고 의지와 담력이 떨어졌습니다. 폐하께서는 영민하고 슬기롭기를 타고 나셨으니 필시 이미 계책을 이루었을 것이나, 태평한 시기의 천자와 창업의 군주는 일의 요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떨쳐 일어나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또한 조정에서 또 성세를 일으켜서 진실로 (침입할) 실제 마음이 없었는데 일이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이는 우리가 허성(虛聲)으로써 그들이 실제 오도록 만드는 것이 될까 염려됩니다. 허성을 일으키는 것에는 필시 엉성한 속임수가 있고, (적이) 실제로 오는 것은 필시 주도면밀한 생각이 있습니다. 엉성한 속임수로 주도면밀한 계책을 당한다면, 그 성패는 어찌 불 보듯 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들어가 토벌하여 뜻을 이루고 돌아온다 하여도 거란 한 종족에 대한 일도 바야흐로 이렇게 큰데, 더구나 하국(夏國)·곡시라(唃廝囉)·고려·흑수여진·달단 등의 여러 번(蕃)과 무리를 지으면 그 세력은 필시 모두 없애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변방의 우환을 만들고 군사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장구한 계책과 절제[長轡遠馭]의 도가 아닙니다.
신이 감히 말씀드리건대 횡포한 사신[橫使]이 왔으니 또한 사람을 뽑아 그들이 우리를 의심하는 몇 가지 일들을 회유하며 이르기를, ‘조정에서 무릇 무비(武備)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일상적인 것으로 외부로 정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군사를 도모한 곳들은 모두 잘못이 있는 작은 번들로 마땅히 조정에서 죄를 물어야 했다. 어찌 우리 두 큰 나라가 통호한지 이미 70여 년인데 이유도 없이 평화를 갑자기 깨뜨리고자 하겠는가? 두려운 것은 간사한 사람들이 함부로 망령되이 싸움을 일으키거나 혹은 우리가 변방을 정비한다는 것을 저들이 듣고 우리가 일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그것을 알고도 어찌 대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로 인하여 서로 의심하고 불화를 만들게 되어 마침내 오늘의 일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하십시오.
조정이 다시 뭇 논의를 말할 수가 있으면, 다만 모두 말하기만 해도 (요가) 모름지기 마음이 환히 풀려서 의혹됨이 없으니, 이것이 하나의 도움입니다. 오랑캐의 사신[橫使]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바로 보빙사를 보내어 요의 군주 앞에서 이런 뜻을 갖추어 말하고, 일단 듣고 반드시 이익이 되는 바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런 까닭에 크게 조정이 해마다 사여해주는 것에 힘입어 바야흐로 (요) 국가의 계책을 이루니, 이미 보살펴주려는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고 조용하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단지 조목조목 의심이 쌓여 풀리지 않으니 끝내 완고하게 고집피우기만 합니다. 만약 도리를 분명히 깨달으면 반드시 기꺼이 마음을 돌려 중화를 향할 것이니, 무릇 모든 가시와 겨자가 모두 떨어질 것입니다. 진실로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두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화가 날로 깊어져서 기필코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거듭 『춘추』를 보니, 전국 시대까지 제후들이 번갈아 정벌하면 양측의 군대가 붙으면 위로는 화살이 날아 다니고 아래로는 사신이 달리면서, 그 사이에 설득하거나 설명하여 마침내 다툼을 풀고 물러나고는 바로 다시 화친을 맺는 경우가 많은 것이 모두 이런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틈이 점점 벌어지는데도 군대는 아직 교전하지는 않고 있으며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황을 풀거나 해결할 수 있고, 더불어 싸움을 써서는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으니 만 번이라도 꾀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의혹을 풀고 지키는 두 가지 일이니, 신은 모두 여러 논의를 모은 것이지 (개인의) 생각만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이것은 모두 눈앞의 무리가 함께 알고 함께 보고서 반드시 그렇게 여기는 이치이니, 반드시 이 외의 다른 뛰어난 기이한 계책을 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 모두 폐하께서 널리 의견을 구하고 오로지 한쪽만의 말을 듣지 않기를 바라며, 성상의 뜻에 거스르고 일을 하는 사람을 피하게 하여 감히 있는 그대로 모두 상주하지 못하여 국가의 큰 계책을 그르치게 할까 걱정됩니다.
신이 지금 이것을 바치는 것은, 가만히 듣건대 지난 봄에 오랜 가뭄으로 폐하께서 특별히 수조(手詔)를 내리시어 사람들에게 조정의 득실에 대해 분명히 진술하도록 허락하여 중외의 전국이 기뻐하고 모두 성상의 인정이 이미 크게 열렸다고 하였다가 얼마 뒤에 문서[章]를 올려 말씀을 드린 이가 매우 많은데, 그에 따라서는 혹 관직의 폄출이나 강직(降職)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특별히 수조로 사람을 불러 강하게 말하도록 하는 것을 뜻으로 삼고서는 더욱 용서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주니 사대부들이 이 때문에 모두 입을 닫아 충성스럽고 진심을 다한 말이 감히 다시는 입에서 나오지 않으니, 신은 아랫사람의 인정이 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조정의 크나큰 근심이라 생각합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더욱 헤아려서 빨리 천하로 하여금 은혜를 내려받고 조정이 무사하게 하면 큰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상주는 갑작스레 나온 것이고 또 사리에 맞게 하고자 하였어도 감히 조금도 문장을 꾸미고 고사에 근거하지 못하고, 단지 이해 관계를 곧바로 적었을 뿐입니다. 옛날에 초상[楚相]주 042의 아들이 구차한 송나라도 오히려 신하된 이를 속이지 않았다고주 043 돌아와서 말하였는데, 하물며 중원의 대국이 북인과 우호를 맺었는데 지금 만약 다시 진심을 다해 대접하지 않으면 의혹을 풀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용서를 더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문언박이 말하기를, “적대하는 이들의 성정은 이익을 탐하고 의를 잊었음에도 역대의 조정이 우호를 통한 이래로 백성을 쉬게 한 것이 거의 80년인데 일찍이 세상의 도리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경력주 044 초에 우리가 서하와의 일에 전념하여 해이해지지 않았는데도 틈을 타서 멀리서 요구해 와서 당시에 다시 맹세를 세웠으니, 또한 예전의 맹세한 뜻을 거듭 밝힌 것입니다. 몇 년 전부터는 백구(白溝)의 객관이 있는 지역으로 여러 차례 와서 망령되이 다스리다가 건물을 없애고 가버립니다. 하물며 맹서(盟誓) 중에 웅주의 소관으로 백구라 분명히 실려 있어 두 나라가 이를 준수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며, 또 신서(信誓)의 말로 천지신령에게 진실되게 맹세하였고 종묘와 사직에 고하였으니, 이렇게 달라지게 되면 어떻게 나라를 향유하겠습니까? 지금 소희(蕭禧)가 거듭 와서는 다시 웅주의 북정(北亭)에서 예물을 나누자고 하니 그 뜻은 웅주의 북정을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탐욕스러운 마음의 근원을 보면 또한 경력 초에 서하와의 일로 평안하지 않은 틈을 타서 (거란이) 황외(黃嵬)의 땅을 요구하자 조정이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주었던 것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오랑캐를 방어하고 신뢰를 지키는 것을 상책(上策)으로 정하고 반드시 맹서를 증빙으로 삼으면, 저들이 비록 말로 속일지라도 올바른 주장을 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또한 사리로 헤아려보면, 일에는 반드시 순리와 역리가 있고 이치에는 분명히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만약 적이 옳고 그름, 이익과 손해를 셈하지 않고 감히 순리를 범하려는 마음을 싹틔웠다면 조정은 분명히 대비해야 하는 요지를 엄중히 하여 식량과 병사를 풍족하게 하고 성보를 단단하게 완비하고 인민을 온전히 지켜야 싸우면 이기고 지키면 굳게 지키니, 단지 이것뿐입니다. 무릇 중국의 군대는 이익이 있는 곳을 주(主)로 삼아 주(主)로써 객(客)을 상대하면서 지키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났으니 이치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가만히 성상의 뜻을 헤아려 보니 거동을 무겁게 하시고 말씀을 하면 궁정을 채우고 용모로는 남다른 논의가 있습니다. 혹자는 ‘먼저 드러내 사람을 다스린다[先發制人]’라고 하니 뜻은 동작을 가볍게 하는 데에 있으며, 혹자는 ‘아직 대비하지 않은 틈을 탄다[乘其未備]’라고 하니 연과 계의 지역을 습격하여 취하는 것입니다. 일은 곳곳을 살피지 않으면 장차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될 것이 걱정되니, 군대가 만전에 대비하고 나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면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 뜻을 깊이 살피는 데에 두어 주십시오. 지금 조정은 장관(將官)을 나누어 두고 군대의 기물을 정비하여서 분명히 잘 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장교가 한쪽으로 치우쳐 보좌하면 다시 적임자를 고르는 데에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하삭 지방은 굶주림이 이어져 만약 전쟁이 계속되어 그치지 않으면, 물산이 고갈되어 곧바로 준비가 잘 된 성[金城湯池]일지라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일에 앞서 자세히 살피고 나서야 이후의 어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증공량이 말하기를, “국가 우호를 맺는 계책으로 강한 적에게 재갈을 물렸으니, 비록 해마다 금과 비단을 맡길지라도 병사와 백성을 쉬게 한 것이 70년이 넘습니다. 근래에 몇 차례 전투가 일어나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으나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어긋난 것을 생각해 보면, 대북의 땅은 조지로 말씀하신 바를 자세히 보니, 관리가 도적(圖籍)을 가서 살펴보면 매우 분명할 것입니다마는, 비록 포함하고자 하여도 또한 명분이 없을까 걱정되고, 주고자 해도 명분이 없으니, 거리낄 것이 없는 욕심은 나중에도 채울 수 없습니다. 또 적인의 성정은 두려움에는 강하고 모욕에는 약하여 요체는 견제하는 방법뿐입니다. 가우주 045 연간 이전에는 서하가 자못 맹약을 잘 지켰으나, 가우 원년(1056)에 인주(麟州)주 046와 부주(府州)주 047의 지역에서 망령되이 싸워서 마침내 (서하가) 곽은(郭恩)주 048, 무감(武戡)과 황도원(黃道元)을 사로잡았는데도 조정은 잠시 용서하는 마음을 품고서 한 마디의 죄를 묻는 말도 없었습니다. 치평 2년(1065)에 (거란이) 망령되이 동가보(同家堡)주 049가 국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토로 삼고는 그곳의 속호 궁전수(弓箭手) 수천을 죽이고 소, 말 1만 마리를 갖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동가보 지역을 지켜보면서 서하 이원호 때의 생번 19호가 바친 것이라고 하니, 마침내 조서를 내려 타일렀습니다. 제사부사(諸司副使) 왕무기(王無忌)가 조서를 갖고 국경에 도착하였으나 거부하고 (조서를) 받지 않자, 조정이 깊이 다스리고자 하지 않아 단지 연주(延州)주 050에 첩문으로 명령을 내려서 대순성(大順城)주 051을 포위하러 공격하다가 양조(諒祚)주 052가 화살에 맞고서는 가버렸습니다. 그 후예가 비록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면서도 자주 변경에 들어와 노략질하니, 이에 조서를 내려 임시로 해마다 내려주는 세여(歲予)를 없앴더니 다시 간절히 (세여를) 구하여 (우리 조정을) 대하기를 처음처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복속을 표시한 것이 8, 9년입니다. 신이 북적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신의 우려는 조정이 책략이 있는 신하를 골라 답방하도록 하여서 저들 나라에서 일어난 일과 중국이 품은 뜻을 달래어 경계에 가서 분명한 사실을 조사하여 경계를 넘어올 수 없다는 것을 적의 군주가 분명히 알게 할 수 있으면, 공로를 차지하려는 신하에게 미혹되지 않고 반드시 감히 변경을 범하려는 뜻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중국의 오늘날 정세는 옹희, 경덕 연간의 때와 같지 않아서 하북의 군대가 이미 갑절로 늘었고 또 (거기에) 민병을 더하니 행군과 훈련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나가는데, 이것으로 대적함에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장수를 택하는 것을 꾀하면서 북쪽의 변방이 오랫동안 군대를 쓰지 않으니, 비록 발탁할만한 사람이 있어도 시험하지 못합니다. 만약 장수로 적절한 사람이라면 한 방면을 맡겨서 그 직임에 오래 두고서 조치하는 재주와 식견을 보아서 후일의 등용을 놓고 시험할 만합니다. 또는 하북에서 오랫동안 수자리 선 병졸은 정벌을 경험하지 않았는데, 섬서와 하북에는 근래 전쟁에 승리한 군대가 있으니 스스로 이름을 적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징발하는 데에 대비하십시오. 오랑캐인 적이 만에 하나라도 변경을 범하면 원컨대 먼저 세사(歲賜)를 끊고, 훌륭한 장수와 날랜 병사로 마주하게 하면, 저들 또한 스스로 망할 때입니다. 경덕 연간에 적의 기병이 남쪽에 유목을 하다가 한번 친정하는 군대를 만나 낭패를 보고 맹약을 요청하였으니, 만약 진종께서 저들이 보인 정성을 가련히 여겨 전쟁을 끝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면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방어하는 형세는 또한 옛날에 비할 바가 아니니, 단지 정주(定州)의 한쪽 통로를 가장 잘 움켜쥐고 있으면 만약 노략질하러 들어오는 초기에도 그 날카로움을 범하지 못할 것이니 경계에 들어와서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중무장 한 병사로 양쪽에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적이 만약 감히 내지 깊숙이 들어오면, 신은 큰 강의 험함으로 견고한 성이 여러 겹이고 날랜 병사가 수십만 명인 듯이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오랑캐가 강의 북쪽 기슭에 이르러도 앞으로는 큰 강의 험함을 대하고 뒤로는 중무장한 군대에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달아나지도 못할 것이니, 우리의 군대가 강한 노(弩)를 남쪽 기슭에 늘어놓고 (적병을) 맞이하면 되니, 이것은 백 번 싸워 이기는 형세입니다. 지금 중국이 적을 접대하는 까닭은 포용의 뜻이 지극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이 일어나기를 그치지 않고 저들에게 두려움을 알게 하지 못한다면, 신은 적을 쉽게 길들여 복속시킬 수 없을까 걱정되오니, 적을 견제하는 자루를 거꾸로 잡아서는 안 됩니다. 북쪽의 적이 중국을 엿볼 수 없음을 알면 간교한 계책 또한 저절로 멈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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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29)
- 각주 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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