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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정묘년(丁卯年) 일일기(日日記)에 있었던 발췌문-에도에 참근했을 때

○ 1627(寬永 4)년 정묘년(丁卯年) 일일기(日日記)에 있었던 발췌문

○ 1627년 에도에 참근했을 때

一 (十八) 9월 24일 [에도로 오는] 도중, 구와나(桑名)주 001
각주 001)
미에(三重)현 북부에 위치. 에도시대에 구와나는 구와나 번(桑名藩) 11만 석의 城下町이었고, 東海道五十三次로 알려진 東海道 42번째의 宿驛·桑名宿으로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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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박했을 때 야나가와 부젠 숙소의 주인 덴자에몬(傳左衛門)이라는 자가 “이번 달 21일 이쪽(번주 쪽)에서 진상(進上)한다면서 2필(疋)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했다. 이쪽으로부터 반(半)은 올라가지 않았다. 부젠이 반을 이쪽의 반이라고 한 것을 히라타 쇼겐·후루카와 우마노스케·우에다 고로자에몬(植田五郞左衛門)이 들었다.

一 (右同) 이쪽의 에도 숙사(宿寺) 교안지(行安寺)에 동 10월 21일 밤 이쓰쓰토키(五ッ時分)주 002
각주 002)
저녁 7~9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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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사 우마노스케(花房右馬助)님주 003
각주 003)
하나부사 마사요시(花房正榮). 막부의 하타모토(旗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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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야나가와 부젠이 전해달라고 부탁해서 왔습니다. ‘나는 어쨌든 쇼군 뜻에 따를 것입니다. 2,000石 영지는 9년 전에 부교(奉行)님들께도 상속의 주인(朱印)주 004
각주 004)
영지의 상속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찍는 붉은 도장, 또는 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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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해 보고했으니 이것을 허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와서 새삼 말하면 내가 도둑이 되어버리니 어느 때라도 이를 말씀드릴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할 말인데 알아두라고 하니 [나와는] 다른 의견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다이코(太閤)님, 주 005
각주 005)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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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에야스공(家康公)을 거쳐 당대에 이르기까지 10,000石의 주인(朱印)을 받아놓고서, 이제 와서 9,000石의 주인을 주셨다고 하면 1,000石은 부젠에게서 억지로 취하려는 게 됩니다. 10,000石 중 1,000石은 현 부젠의 조부 시모쓰케에게 나의 아버지 요시토시(義智)가 부여한 영지입니다. 나중에 1,000石은 2,800석을 [막부가] 가증해 주셨을 때 혼다 고즈케노스케님의 지시로 부젠에게 1,000石을 준 것이니 나중의 1,000石에 관해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10,000石 중의 1,000石은 앞서 말한 대로 나의 아버지가 문서로 하사한 것이므로 승인하지 않았습니다.”고 잘라 답변했다.

  • 각주 001)
    미에(三重)현 북부에 위치. 에도시대에 구와나는 구와나 번(桑名藩) 11만 석의 城下町이었고, 東海道五十三次로 알려진 東海道 42번째의 宿驛·桑名宿으로 번성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저녁 7~9시 정도. 바로가기
  • 각주 003)
    하나부사 마사요시(花房正榮). 막부의 하타모토(旗本). 바로가기
  • 각주 004)
    영지의 상속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찍는 붉은 도장, 또는 그 문서. 바로가기
  • 각주 005)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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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년(丁卯年) 일일기(日日記)에 있었던 발췌문-에도에 참근했을 때 자료번호 : kn.k_0001_0030_0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