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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관원조신(菅原朝臣; 스가하라노아오미)

관원조신(菅原朝臣; 스가하라노아오미)
 토사숙녜(土師宿禰; 하지노스쿠네)와 조상이 같다. 건반근명(乾飯根命; 가라히네노미코토)의 7세손인 대보도련(大保度連; 오토노무라지)의 후손이다.
 
【주석】
1. 관원조신(菅原朝臣)
관원(菅原)이라는 씨명은 천평(天平) 19년(747) 2월 10일자 「법륭사가람연기유기자재장(法隆寺伽藍緣起流記資財帳)」 에 보이는 대왜국(大倭國) 첨하군(添下郡) 관원향(菅原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나량시(奈良市) 관원정(菅原町) 일대이다. 관원조신(菅原朝臣)의 원래 씨성은 토사숙녜(土師宿禰)였으며 후에 다시 관원숙녜(菅原宿禰)로 바뀌었다. 『속일본기』 천응(天應) 원년(781) 6월 임자조에 토사숙녜고인(土師宿禰古人)과 토사죽녜도장(土師宿禰道長) 등 15인이 아뢰기를, 자신들의 선조가 천수일명(天穗日命)에서 나왔으며, 그 14세손이 야견숙녜(野見宿禰)인데, 수인천황(垂仁天皇)의 시대에 토부(土部) 300여 인을 이끌고, 흙으로 모든 사물의 모양을 만들어 바쳐 사람을 대신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제 선조들이 하신 일을 보니, 길흉이 반반이어서 흉사와 길사를 함께 관장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오로지 흉사로 여기니, 거주지에 따라 토사(土師)를 고쳐서 관원(菅原)이라는 성으로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청에 따라 이를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어서 연력(延曆) 9년(790) 12월 신유조에 외종5위하 관원숙녜도장(菅原宿禰道長)과 추소숙녜안인(秋篠宿禰安人) 등에게 조신(朝臣)이라는 성을 내렸다. 관원조신씨 일족 중에는 처음으로 조신이라는 성을 받은 관원조신도장(菅原朝臣道長, 『속일본기』 延曆 10년 정월 무진조)을 비롯하여 관원조신상인(菅原朝臣常人, 『日本後紀』 延曆 15년 7월 무신조), 관원조신세도(菅原朝臣世道, 『類聚國史』 延曆 16년 7월 기유조), 관원조신문수(菅原朝臣門守, 『일본후기』 延曆 18년 2월 갑오조 등), 관원조신청공(菅原朝臣淸公, 『일본후기』 延曆 24년 6월 기사조 등), 관원조신청인(菅原朝臣淸人, 『日本後紀』 弘仁 2년 정월 갑자조 등), 관원조신선주(菅原朝臣善主, 『續日本後紀』 承和 11년 7월 갑신조 등), 관원조신한자(菅原朝臣閑子, 『續日本後紀』 承和 5년 11월 계미조 등), 관원조신시선(菅原朝臣是善, 『속일본후기』承和 6년 11월 계미조 등), 관원조신하도(菅原朝臣河道, 『日本文德天皇實錄』 齊衡 원년 정월 임진조 등), 관원조신세자(菅原朝臣勢子, 『日本三代實錄』 貞觀 원년11월 20일 신미조), 관원조신호조(菅原朝臣護祖, 『일본삼대실록』 貞觀 11년 정월 7일기축조), 관원조신도진(菅原朝臣道眞, 『일본삼대실록』 貞觀 11년 9월 11일 경신조 등), 관원조신유자(菅原朝臣類子, 『일본삼대실록』 元慶 8년 2월 16일 정사조) 등이 있다.
관원조신도장은 천응 원년에 토사숙녜에서 관원숙녜가 되었고, 연력 9년(790) 12월에는 조신 성을 받았다. 그는 『만엽집』 권17에 보이는 사생(史生) 토사숙녜도량(土師宿禰道良)과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관가어전기(菅家御傳記)』 에서는 관원숙녜고인(菅原宿禰古人)의 장남인 외종5위하 관원숙녜도장(菅原宿禰道長)이 환무(桓武) 연력(延曆) 9년12월에 관원조신(菅原朝臣)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속일본기』 연력 4년 12월 갑신조에서는 죽은 원강개(遠江介) 종5위하 관원숙녜고인의 아들 4명에게 옷과 양식을 지급하여 학업에 힘쓰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관원씨계도(菅原氏系圖)〉에 고인의 아들로 청공(靑公), 청강(淸岡), 청인(淸人)이 보인다. 그러므로 고인의 4명의 아들은 도장, 청공, 청강, 청인임을 알 수 있다. 청공의 훙전(薨傳)에 의하면 아버지인 고인은 유자로서의 행실이 세상에 드러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거론할 바가 아니라고 하여, 유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청공 역시 어릴 때부터 경서와 사서를 섭렵하여 연력 3년(784)에 동궁을 배종하였으며, 약관의 나이에 시험을 쳐서 문장생(文章生)에 보임되었고 대책 시험으로 등과하여 대학소윤(大學少允)에 임명되었고, 21년(802)에는 견당판관(遣唐判官) 겸 근강권연(近江權掾)에 임명되어 23년 7월에 당에 건너갔다가, 24년 7월에 돌아와서 종5위하에 서위되었다. 곧 대학조(大學助)에 임명되었으며, 홍인(弘仁) 10년(819) 정월에 정5위하 문장박사(文章博士)가 되었고, 문선(文選)을 천황에게 시독(侍讀)하였으며 집의(集議)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승화(承和) 2년(835)에 단마권수(但馬權守)가 되었고 『후한서』 를 시독하였다.
청공의 넷째 아들 관원조신시선(菅原朝臣是善)의 훙전(薨傳, 『일본삼대실록』 元慶 4년 8월 신해조)에서도 “아버지 청공이 학예가 두루 통하고 재주와 덕이 아주 높아, 약관의 나이에 시험에 합격하여 문장생이 되었고 수재(秀才)에 합격하고 대책으로 등과하였으며, 연력 연간에 견당사가 되어 복명한 후에 현요직을 거쳐 작위가 3위에 이르고 드디어 문장박사가 되니, 유문(儒門)의 영수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관원조신시선(菅原朝臣是善)은 관원조신도진(菅原朝臣道眞)의 아버지이며, 그의 훙전에서 “시선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와 학문이 날로 새로워져서, 홍인(弘仁) 말 나이 11세에 전상(殿上)에서 천황을 모셨으며, 항상 천황 앞에서 책을 읽고 시를 지었다. 22세에는 문장득업생(文章得業生)이 되었으며, 문장박사(文章博士), 동궁학사(東宮學士), 대학두(大學頭), 식부대보(式部大輔)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시선은 생각이 우아하고 아름답고 섬세하여, 평판이 더욱 높았다. 소야황(小野篁)은 시가(詩家)의 으뜸이고, 춘징선승(春澄善繩)과 대강음인(大江音人)은 조정의 달통한 유자이고, 아울러 문장으로 서로 마음을 허락하였다. 시선은 상경(上卿)에 이르고 좋은 관리였으며 선비이자 문인이었으므로 문하에 제자가 많았다. (중략) 시선은 『일본문덕천황실록』 10권을 편찬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동궁절운(東宮切韻)』 20권, 『은방수율(銀牓輸律)』 10권, 『집운율시(集韻律詩)』 10권, 『회분류집(會分類集)』 70권을 지었고, 『가집(家集)』 10권이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원래 일치신(日置臣), 일치조(日置造), 일치수(日置首)라는 씨성을 가지고 있다가 관원조신(菅原朝臣)을 사성받은 씨족이 있다. 『일본삼대실록』 정관(貞觀) 8년(866)윤3월 17일 임술에서 “좌경인(左京人) 목공소속(木工少屬) 종7위상 일치신강성(日置臣岡成)에게 관원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 [그 선조가 토사숙녜와 조상이 같다.]”라고 하였다. 정관 9년 11월 20일 기묘조에서도 태정대신가(太政大臣家) 소종(少從) 정6위하 일치조구미마(日置造久米麿)에게 관원조신업리(菅原朝臣業利)라는 성명을 내렸다. 2품(二品)식부경(式部卿) 충량친왕(忠良親王) 가령(家令) 정6위상 토사숙녜익웅(土師宿禰益雄), 소부권대속(掃部權大屬) 종6위하 토사숙녜제징(土師宿禰諸澄), 이세권소목(伊勢權少目)정6위상 토사숙녜풍웅(土師宿禰豐雄) 등에게 관원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 모두 아타숙녜(阿陁宿禰)의 후손이다.“라고 하였고, 원경(元慶) 원년(877) 12월 25일 신묘조에서 기이국(紀伊國) 나하군(那賀郡) 사람 우대신(右大臣) 가령(家令) 겸 주전권윤(主殿權允) 일치수영진(日置首永津)과 아우인 소부소속(掃部少屬) 정8위하 일치수금진(日置首今津)에게 관원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 천수일명(天穗日命)의 후손으로 대강(大江), 관원(菅原), 추소조신(秋篠朝臣)과 조상이 같다고 하였다.
2. 토사숙녜동조(土師宿禰同祖)
『속일본기』 천응(天應) 원년(781) 6월 임자조에 사는 곳의 지명에 따라 토사(土師)를 고쳐 관원(菅原)이라는 성으로 하였다는 내용이 보이고, 『관가어전기(菅家御傳記)』 에도 토부씨만엽(土部氏萬葉)이 관원(菅原) 복견읍(伏見邑)에 살았는데 지명을 따라서 토부를 고쳐 관원이라는 성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속일본기』 연력(延曆) 9년(790)11월 신유조에 토사씨(土師氏)에는 모두 4복(腹)이 있는데 나머지 3복 중 어떤 사람은 관원조신(菅原朝臣)에 속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관원조신씨가 토사숙녜(土師宿禰)와 동족·동족 관계임을 알 수 있다. 토사숙녜에 대해서는 우경 신별(하) 「토사숙녜」 조(456)참조.
3. 건반근명(乾飯根命)
가미건반근명(可美乾飯根命)과 같다. 건반근명에 대해서는 우경 신별(하) 「토사숙녜(土師宿禰)」 조(456)의 가미건반근명 참조.
4. 대보도련(大保度連)
여기에만 보인다. 『관가어전기(菅家御傳記)』 에 의하면 노유정명(鸕濡渟命)의 아우가 감미건반근명(甘美乾飯根命)이고, 감미건반근명의 아들을 야견숙녜(野見宿禰)라고 한다. 토부신야견숙녜(土部臣野見宿禰)의 3세손 신신(身臣)에게 난파고진궁어우인덕천황(難波高津宮御宇仁德天皇) 때 토부신(土部臣)을 고쳐 토부련(土部連)이라는 성을 내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건반근명의 7세손으로 전하는 대보도련(大保度連)은 야견숙녜의 3세손인 신신의 증손에 해당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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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조신(菅原朝臣; 스가하라노아오미) 자료번호 : ss.k_0002_0010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