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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립과 풍속, 제도

신라주 001
번역주 001)
新羅 : ‘新羅’라는 국호가 확정된 것은 『삼국사기』 지증왕 4년(503)조의 “시조가 국가를 세운 이래로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못하여 혹은 斯羅, 斯盧로 칭하거나 혹은 新羅라고 일컬었습니다. 신들이 ‘新’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것으로, ‘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것으로 여겨, 이를 국호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한 데서, 지증왕 때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새로이 정해진 新羅라는 국호를 유교적인 이상적 국가관을 드러낸 것으로 보거나(文暻鉉, 1970), 지증왕을 전후한 신라 사회의 정치적 성숙도를 반영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申瀅植, 1977a). 특히 후자의 경우 신라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은 신라의 급격한 정치적 팽창을 의미하는데,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나 5세기 중에 세워진 〈충주고구려비〉(이하 〈충주비〉)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일찍부터 사용해오던 국호를 유교적 정치이념으로 수식한 것이 지증왕대 국호 제정 기사라고 보고 있다. 다만 우리 학계에 국가 형성 이론이 도입되면서, 伯濟와 百濟, 狗耶와 加耶, 구려와 고구려 등과 마찬가지로 성읍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 발돋움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경주 일대를 지칭한 徐羅伐·斯盧로부터 고대국가로서의 국호인 신라로 고정되었다고 보고 있다(千寬宇, 1975). 아무튼 신라의 국호는 6세기 이후에는 거의 新羅로만 쓰여진 듯하며, 奈勿王 26년(381)에 前秦에 사신을 보낸 사실은 있으나, 國號를 제정(지증왕 4년, 503)한 이후 최초로 중국과 교섭을 가진 것은 법흥왕 8년(521)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때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6세기 초엽 이후 辰韓 또는 新盧의 후신으로서 『梁書』에 新羅傳이 立傳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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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주 002
번역주 002)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 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네 가지의 견해로 나뉜다. 곧 신라는 중국 秦의 流亡人과 연결된 辰韓의 후예라는 것, 고구려계 殘民이라는 것, 그리고 弁韓의 후예, 연나라의 유망민이라는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三國志』 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이를 계승한 『후한서』·『梁書』·『晉書』·『南史』·『北史』 그리고 『翰苑』의 기록이며, 둘째는 『隋書』에서 毌丘儉의 침입 때 옥저로 피난했던 고구려의 殘留民이라고 한 설로, 『通典』·『文獻通考』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셋째는 신라를 弁韓의 후신으로 간주하는 『新·舊唐書』·『册府元龜』 등의 기록으로서 전자의 두 계통과는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다. 넷째는 최치원의 연나라 사람 망명설이다. 곧 연나라 사람이 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읍리의 이름을 沙涿(沙梁)·漸 涿(漸梁) 등으로 일컬었는데, 이들은 사도·점도 등으로 읽는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연나라 망명인이 진한을 세웠다고 하는 설은, 위만이 연나라 망명객으로서 위만조선을 세웠다가 한나라의 공격으로 남하하여 진한을 세웠다는 의미로 새겨진다. 이에 秦役을 피해서 한반도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넓은 의미의 衛氏朝鮮系 유민으로 보기도 한다(李賢惠, 1984 ; 丁仲煥 , 1962). 무엇보다도 한반도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가 철기를 반출하지 않는 청동기가 중심이 된 반면에 경상도 일대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철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양 지방 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현혜, 1984). 건국신화에 있어서도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신라는 그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趙芝薰, 1996). 무엇보다도 백제·신라의 왕을 비교할 때, 고구려와 백제의 왕은 주로 善射者나 强勇者임에 반해, 신라왕은 德望·智慧者임을 강조하고 있어 양국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申瀅植, 1984).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옛날 秦의 역(役)을 피하여 유망한 사람’이라는 기사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중국 유망인의 남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한반도 남하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동시에 辰韓을 秦韓과 결부시킨 것은 중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는 북방 유민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마한의 동쪽을 지나왔을 것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馬韓의 부용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양서』의 경우, 秦人들이 秦의 役을 피하여 마한 땅에 이르러 그 동쪽에 거주함으로써 신라를 이루었다는 『삼국지』·『후한서』 등의 전승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수서』는 신라의 기원에 관하여 『삼국지』·『후한서』·『양서』 등과 그 사료의 계통을 달리하며, 『북사』에 보이는 신라의 기원에 관한 내용은 『양서』의 계통을 따르면서도 『수서』의 내용도 아울러 전재함으로써 두 계통의 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북사』는 신라의 관등을 비롯한 풍속·형정·물산 등에 관해서는 『수서』를 그대로 전재하고 있어, 『남사』의 내용이 『양서』를 그대로 따르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申瀅植, 1985a). 『수서』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옥저 지방에 피난한 고구려 사람들이 잔류하여 신라국을 세운 것으로 풀이하고, 이로써 신라가 강성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구당서』 신라전에서 신라를 “弁韓의 苗裔”라 한 것은 왕성인 金城 주위에 3,000명의 獅子隊를 배치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수서』의 기록에 새로이 추가한 것이다. 신라를 변한의 묘예라 한 것은 『당회요』에도 보이고 있어 10세기 무렵 중국인의 인식을 반영한다. 『당회요』의 경우 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수서』를 따르면서도 신라인의 계통에 대하여는 “弁韓之苗裔”라 하여 『양서』·『수서』와 달리 『구당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풍속·제도 등의 기사는 없고 진덕왕 때부터 會昌 원년까지의 조공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通典』은 ‘상태’의 기술과 조공 등 ‘사건’에 관한 기술이 혼합된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先種이라 한 「진한전」에서는 辰韓의 기원을 ‘秦之亡人’에서 찾아 『삼국지』·『후한서』·『양서』의 계통을 따르고 있으나, 「신라전」에서는 신라의 기원을 위장 관구검의 침입으로 옥저 지방에 도망 온 고구려인들의 잔류로부터 찾고 있어 『수서』의 계통을 따르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법은 양무제 때의 기사를 『양서』에서, 수 문제 때의 기사를 『수서』에서 취하면서, 신라의 풍속·지방제·물산·관등 등의 내용도 해당 사료의 내용을 각각의 시기에 그대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각각의 사료를 그대로 편집한 것으로 여겨지거니와, 이는 杜佑가 『양서』나 『수서』에 나타난 풍속 등에 관한 기사를 각 시기의 특징적 사실로 이해했던 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通典』은 부견 때에 신라 사신 위두가 조공한 사실을 새로이 편입하고 貞觀 22년 김춘추가 조공한 사실을 추가하고 있는 것만이 기존의 사서와 다른 점이다(박남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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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주 003
번역주 003)
秦韓 : 韓에는 3개의 종족 곧 마한, 진한, 변한이 있다고 서술한 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부터이다. 이에 대해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는 마한, 진한, 변진으로 서술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후한서』의 변진을 『晉書』와 『양서』에서는 모두 변한으로 서술하고 있다. 趙一淸은 『후한서』에서 ‘변진’이라 일컬은 것은 ‘변한’의 잘못으로 보았다. 청 말기의 학자 丁謙은 삼한 가운데 마한이 가장 커서 충청·전라 2도와 경상도의 반을 차지하고, 진한과 변한은 오직 경주 일대만을 차지하였을 뿐이며, 삼한이 분립하였다고 하나 실제로 변한과 진한 2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는데, 세력이나 힘에 있어서 마한에 대적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 위치에 대하여 진한은 북쪽에, 변한은 남쪽에 거처하고, 중간에 진한과 변한이 섞여 거처하므로 이를 합쳐서 변진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이들 변진 24국 가운데 弁辰을 관칭한 11개국은 변한의 소속이고, 나머지는 모두 진한에 속한다고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脫解尼師今條에는 “辰韓阿珍浦口”라고 하여 辰韓이 해안에 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高麗史』를 비롯하여 『世宗實錄地理志』의 “경상도는 三韓 때에 辰韓이었는데, 삼국에 이르러 신라가 되었다.”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경상도는 본래 辰韓의 땅이었는데 후에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고 하였으며, 『八域志』에서는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인데, 경상도는 옛날 卞韓과 辰韓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그 뒤에 韓百謙의 『東國地理志』나 安鼎福의 『東史綱目』에서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李丙燾는 「三韓問題의 新考察」에서 辰韓의 위치를 한반도 중심부로 비정함으로써, 학계의 새로운 쟁점이 되었다. 이병도는 韓의 명칭이 朝鮮王 準이 남쪽으로 온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 사회 전체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보았다. 곧, 그는 辰의 동북계인 유이민 사회가 韓王 準 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이 ‘辰韓’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李丙燾, 1976). 이에 대하여 任昌淳과 金貞培는 이병도설을 반대하고 ‘진한=경상도설’을 옹호하였다(任昌淳, 1959 ; 金貞培, 1968). 한편 千寬宇는 신채호의 삼한이동설을 채용하면서 辰韓을 낙동강 이동으로, 弁韓을 낙동강 이서 지방에 정착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千寬宇, 1976a). 한편 『삼국사기』에는 초기 신라·백제의 강역을 벗어난 지역에서 양국 간의 전투 기사가 보이고 있어, 申采浩는 당시 한반도의 정황, 양국의 국세 및 兵勢 등에 비추어 『삼국사기』에 전하는 전투 기사에 상당한 의문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申采浩, 1983).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백제와 소백산맥 일대에서 상쟁한 주체를 신라로 보는 입장과 진한계로 보는 입장이 있었다. 전자는 申瀅植·申東河 등으로, 후자는 千寬宇·崔炳云 등으로 대표된다. 신형식은 그 전투 지역을 보은·옥천 일대로 비정하고, 이 지역의 철 생산 및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가 상쟁하였던 것으로 설명하였다(申瀅植, 1971 ; 申瀅植, 1983). 신동하는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유형을 구분하면서, 2~3세기경 소백산맥 일대에서 벌어진 나·제 간의 전투를 신라로부터 기왕의 지위를 인정받은 족장들에 의하여 수행된 것이라 하였다(申東河, 1979). 또한 천관우는 脫解대로부터 阿達羅대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나·제 간의 전투를 남하 중인 舊辰國=辰 韓系에 의한 對百濟戰으로, 이후 2~3세기경에 나타난 전투는 남하한 진한계가 석씨 왕계를 형성한 뒤에 북상하면서 나타난 것이라 하였다(千寬宇, 1976b). 최병운은 천관우와 거의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당시에 대백제전을 치룬 주체를 단순히 진한계라고만 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崔炳云, 1982). 그런데 이 시기 신라와 백제 간의 전투 지역이 소백산맥 일대의 중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과 비교할 때 크나큰 지리적·시간적인 공백이 있다는 점에 의문을 표하고, 후일 신라 김씨 왕족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는 영천(骨火小國)에도 미치지 못한 사로국의 국세로서 과연 의성 일대의 소문국을 정벌하여 이를 거점으로 백제와 장기간 성을 쌓고 교전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 그리고 초기 나·제 간의 전투가 대부분 백제의 선공으로 비롯되며 소위 ‘신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서 곤궁에 빠져 있었다는 점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특히 중국 사서에 신라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때가 동진 효무제 태원 2년(337)이며 그 개국의 시기가 晉·宋 교체기(356~402)라는 『翰苑』의 전승,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 신라 흘해이사금조에 “이 왕대(310~355)에 백제병이 처음으로 내침하였다.”는 기록, 『晉書』 辰韓조에 무제 태강 7년(286)까지 나타나는 辰韓의 조공 기사 등은, 나·제 간 이루어진 초기 전투 기사와 관련하여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자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신라 장수로 활약한 구도와 나음계의 세력으로, 이들 세력이 소위 백제라 하는 세력에 의하여 위축·남하함으로써 신라에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약했던 구도계의 김씨 부족이 석씨 왕족과 통혼함으로써 일시 연맹의 형태를 띠게 되나, 이후 신라 사회에서 김씨계가 형성한 정치적 기반과 군사력에 의하여 나물마립간이 즉위함으로써 신라가 고대국가의 단서를 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경주 일원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과정과 흐름을 같이하며, 후일에 신라 김씨 왕실을 구성한 구도계는 소백산맥 일대의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던 진한계가 신라 사회에 이주하여 형성한 족단이었다는 것이다(박남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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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진한(秦韓)주 004
번역주 004)
秦韓 : 신라의 기원에 대한 네 가지 견해, 곧 秦유망인설, 고구려잔민설, 변한후예설, 연망명인설 가운데 秦유망인설에 따라 나타난 명칭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후한서』·『梁書』·『晉書』·『南史』·『北史』 그리고 『翰苑』에서 이를 따르고 있다. 또한 『양서』와 『宋書』 동이전, 倭조에서는 齊나라가 建元(479~482) 중 왜국왕에게 ‘使持節·都督 倭·新 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란 작호를 내린 것이나, 송나라 大明(457~464) 연간에 왜국왕이 스스로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고 일컬은 데서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칭호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임에 분명한데, 이러한 칭호를 요청하도록 왜왕에게 권유하는 한편 송나라에게 왜왕을 책봉해 주도록 요청한 나라는 송-백제-왜국으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체제의 결성을 꾀하고 있었던 백제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金恩淑, 1997). 이 작호에 보이는 慕韓을 『滿洲源流考』에서는 마한의 별칭으로 풀이하는데, 5세기 중엽 백제·신라가 고대국가를 형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마한과 진한의 잔여 세력이 온전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백제와 마한, 신라와 진한, 그리고 임나와 가라의 중복 사실에 대한 왜나 송나라 측의 이해도 부족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때에 辰韓을 秦韓으로 일컬었던 것은 중국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 여겨진다. 더욱이 『梁職貢圖』 百濟國使조에는 백제의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하고, 언어는 중국을 참조한 것으로서 秦韓의 遺俗이라 하였거니와, 이 또한 辰韓을 秦의 유망민이 세운 것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보아 좋을 듯하다. 이와 같이 秦韓의 명칭은 진의 유망민이라는 전승 외에 진한의 언어가 마한과 다르고 중국 진나라 사람들과 유사하다는 『삼국지』·『후한서』 이래의 전승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양서』·『진서』·『남사』를 비롯하여 『책부원구』·『통전』은 모두 이를 따르고 있다. 다만 『양직공도』 百濟國使에서는 백제의 말이 중국을 참조하였으니 ‘秦韓’의 遺俗이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양직공도』에서도 진한의 언어를 秦人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한원』의 경우 옛날 유망민이 진나라의 전쟁을 피하여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하고, 秦韓의 명칭도 『齊書』의 왜국왕 책봉기사와 『위지』의 辰韓 별칭으로서의 秦韓을 인용하였을 뿐 대체로는 辰韓이라고 기술하였다. 『북사』의 경우 진한의 별칭 진한을 일컬으면서 진나라 때에 유망민이 전쟁을 피하여 왔는데 유망민이 秦人인 까닭에 진한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는 『후한서』의 진인유망민설과 최치원의 연나라유망민설을 함께 소개하였다. 아무튼 秦韓이라는 명칭은, 신라의 모체가 되는 진한의 기원을 秦人유망민설에 구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이후 중국 사서에서 辰韓의 별칭으로 일컬어졌고, 고려시대 최승로와 같은 이는 “진한(秦韓)의 옛 풍속으로 하여금 공자의 고향 노나라의 유풍을 알게 하고”(『고려사』 권3, 世家 3, 成宗 9년 12월 ; 권93, 列傳 권6, 諸臣, 최승로)라고 하였듯이 한반도의 총칭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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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도 하는데, [양나라와] 서로 1만 리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로는 진나라 때에 유망인이 역을 피하여 마한으로 가니, 마한이 또한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진나라 사람들로 살게 하였으므로, 그 나라를 진한이라고 이름하였다.주 005
번역주 005)
居之以秦人 … 秦韓 : 『三國志』 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것을 『후한서』에서 “秦之亡人 避苦役”으로 고친 이후에 『晉書』·『梁書』·『南史』·『北史』와 『翰苑』에서 『후한서』의 내용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사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곧 『삼국지』에서는 “옛날 유망인들이 秦나라의 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그 언어에 있어서는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국가(國)를 나라(邦)라 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모두 무리(徒)라고 하는 것이 秦人과 비슷하다. 비단 燕·齊의 이름과 물건만이 아니라, ‘樂浪’人을 阿殘이라 이름하며, 東方人들이 나(我)를 아(阿)라 하고, 樂浪人을 본래 그 殘餘人이라 일컬으므로, 이제 秦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후한서』에서는 “秦나라의 유망인이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국가(國)를 나라(邦)라 이름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무리(徒)라고 하는 것이 秦語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달리 秦韓이라 이름한다.”고 기술하였다. 劉宋의 范曄(398~445)은 『후한서』에서, 晉나라 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서 秦韓 관련 내용에 심각한 비약을 하였던 것이다. 곧 『삼국지』의 “옛날 유망인들이 秦나라의 役을 피하여(古之亡人避秦役)” 부분에서 그 실체가 불분명한 ‘古之亡人’을 ‘秦人’으로 확정하였는데, 이는 뒤이어 나오는 ‘秦役’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秦役’의 성격을 ‘苦役’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온 이들이 秦人임을 다시 한 번 확정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수가 “진한의 언어가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함으로 인하여 『삼국지』가 편찬된 당시에 진한을 秦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것을, “진한의 언어가 秦語와 비슷하므로, 달리 秦韓이라 이름한다.”고 함으로써, ‘辰韓 사람들은 유망한 진나라 사람들로서 진나라와 비슷한 말을 쓰고, 그러므로 秦韓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라는 논리적 서술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후한서』의 잘못을 『진서』와 『양서』에서 그대로 따르게 되었고, 『太平寰宇記』와 『册府元龜』·『通典』 등에 그대로 전재되었던 것이다. 다만 『북사』의 경우 언어의 유사함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으나, 진한의 종족적 계통이 秦人이라 함으로써 『후한서』의 내용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후한서』의 진인유망설은 『삼국유사』에 『삼국지』가 아닌 『후한서』의 설로서 소개되어, 오늘날 신라의 기원에 대한 네 가지 설, 곧 秦流亡人설, 고구려잔민설, 변한후예설, 연망명인설 가운데, 중국 측 사서의 대종을 이루는 설로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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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국가[國]를 나라[邦]라 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모두 무리[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주 006
번역주 006)
其言語名物 … 不與馬韓同 : 신라(진한) 언어의 구체적인 내용, 곧 “국가(國)를 나라(邦)라 이름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무리(徒)라고 하는 것”은 『삼국지』 진한조의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 『양서』에서 이들 진한의 언어들이 “마한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삼국지』 진한조의 기사를 따른 것이고, “중국인과 비슷하다(有似中國人).”고 한 것은 『양서』의 찬술자인 唐 姚思廉의 독자적인 서술이다. 이는 『삼국지』나 『후한서』에서 “(진한의 언어가) 秦語와 비슷하다.”는 서술과는 분명히 다른 표현이다. 『북사』에서는, 『양서』에서 진한의 언어가 “중국인과 비슷하다(有似中國人).”고 서술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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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진한의 왕은주 007
번역주 007)
辰韓王 : 『진서』와 『북사』는 『양서』를 따라 ‘辰韓王’으로 서술하였으나, 『삼국지』·『통전』·『태평환우기』·『한원』에는 “辰王”으로 기술하였다. 한편 『후한서』에는 辰王을 “삼한을 모두 다스리는 辰國王”으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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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마한 사람으로 대대로 계승하게 하고, 진한 스스로 왕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흘러들어온 사람들인 까닭이 분명하다. [따라서 진한은] 항상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주 008
번역주 008)
辰韓王 :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곧 ‘辰王’ 가운데서도 『삼국지』의 계통을 따르는 것(『통전』·『태평환우기』·『한원』)과 『후한서』의 계통을 따른 것이 있는 한편으로, 이들 양 계통과는 달리 ‘辰韓王’으로 표기한 계통(『양서』, 『진서』, 『북사』)이 있다. 먼저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서는, 韓에는 마한, 진한, 변한 3종이 있는데, “진한이란 옛 진국이다(辰韓者, 古之辰國也).”라 하고, 마한에 대해 서술하면서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辰王治月支國).”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동이전 변한조에서는 弁·辰韓은 모두 합하여 24국인데, “그 12국은 진왕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인으로써 삼아 대대로 서로 계승하게 한다. 진왕은 스스로 왕에 오르지 못하였다(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辰王, 不得自立爲王).”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옛날의 진국이 『삼국지』 찬술 당시에 진한으로 변하였고, 진왕은 마한 지역에 있는 월지국을 다스리며, 진한 12국은 그에게 예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마한조에서는 진왕이 마한 지역의 월지국을 다스리는 존재처럼 서술되었으나, 진한조에서는 진왕은 진한 12국 을 예속하지만 진왕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고, 마한인으로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대대로 승계하게 한다는 것이다. 『삼국지』에서 진왕이 다스린다는 월지국은 『翰苑』에 引用된 『魏略』에는 ‘自支國’, 『後漢書』 등에는 ‘目支國’, 『通志』에는 ‘月支國’으로 전한다. ‘月支’는 西域의 國名이므로, 『三國志』 韓傳 및 『通志』에서 ‘月支’라 한 것은, 후대 사람이 ‘月支’라는 이름에 익숙해져서 멋대로 고친 것이 아닌가 숙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는 『삼국지』의 ‘月支’나 『翰苑』의 ‘自支’는 글자 형태가 비슷한 데서 오는 오류로서, ‘目支’가 옳은 명칭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아무튼 『삼국지』의 ‘辰王治目支國’이라는 구절에서 目支國은 馬韓諸國 가운데서 영도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거니와, 그 位置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茶山 정약용의 「三韓總考」(『疆域考』)와 韓鎭書의 「地理考」(『海東繹史』)에서는 고조선의 準王이 남쪽으로 망명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는 釜山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고, 李丙燾는 직산 지방에(1976), 千寬宇는 인천에 각각 비정하였다(1979). 그러나 목지국을 『삼국지』 마한조에서 서술하였던 만큼 아무래도 그 위치를 진한 서쪽의 마한 지역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그 정확한 위치를 밝히기 위해서는 향후 지속적인 고고학적 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목지국을 다스렸다는 진왕에 대하여 천관우는 신라의 沾解王으로 보고 있다(1976a). 한편 『후한서』에도 『삼국지』와 동일한 辰王이 등장하지만, 그 성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후한서』 한조에서는, ‘韓’에는 마한, 진한, 변진 3종이 있는데 모두 78국으로 옛날 辰國이라는 것이다. 진국에 대해서는 『史記』 朝鮮列傳에 ‘眞番旁辰國(혹은 衆國)’이라고 보이지만, 판본에 따라, 그리고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辰國, 衆國說로 구분된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魏略』에도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 그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000여 戶였다’고 하여 등장한다. 이들 자료에는 모두 辰國을 과거적인 존재로서 일컬었고, 辰王이 존재한 당시에는 이미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에 진국과 진왕은 쉽게 결부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후한서』에서는 삼한 가운데 마한이 가장 크고, 함께 그 종족(마한)을 세워 진왕으로 삼았는데, 목지국을 도읍으로 삼아 모든 삼한의 땅을 다스렸으며, 각 나라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인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왕 準이 위만에게 격파되자, 그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는데, 뒤에 준왕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辰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공통되는 부분은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렸으며, 마한인으로써 진왕을 삼아 대대로 승계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지』에서 진왕은 진한 지역을 예속하였다고 한 데 대해, 『후한서』에서는 모든 삼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로써 『삼국지』의 기사를 따르게 될 경우 辰王은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통치자로 해석되지만, 『후한서』를 따른다면 삼한 전체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위치 지워진다. 학계 일반으로는 『후한서』 진왕의 경우 한국사의 역사발전단계에서 통일된 하나의 나라가 다시 78개의 소국의 분열되는 형세를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삼국지』의 기사대로 진왕을 목지국을 다스린 지배자 정도로 이해하고, 목지국이 마한 사회뿐만 아니라 주변의 진한 지역까지 통제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양서』를 비롯하여 『진서』와 『북사』에서는 변진 12국은 진한에 속하며, 진한은 항상 마한인으로 왕을 삼았다고 한다던가, 마한인으로써 진한왕을 삼는데 진한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였다 하고, 그것은 이들 진한인이 유망하여 옮겨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晉書』에서 ‘변진의 12국이 辰王에 속하였다.’ 하여 辰王을 辰韓과 연계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辰王’을 모두 ‘辰韓’으로 바꾸어 서술함으로써 문제의 소재를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어떠한 사서이든 간에 중국 측 기록에서는 마한이 진한을 통제하였다고 한 데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그것은 당시 한반도 내의 정치체들 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추세로 인정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진왕과 진한왕의 관계, 그리고 과연 진왕이 목지국에 거처하면서 진한 지역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은 향후 검토해야 할 과제이지만, 『진서』에서 변진 12국이 진한에 예속되고, 마한인의 통제를 받았다고 한 서술이 가장 합리적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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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은 처음에 6국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신라는 그중 한 나라이다.주 009
번역주 009)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 辰韓 12國의 구체적인 국명은 『삼국지』 東夷傳 진한·변진조에 보인다. 『삼국지』에는 辰韓(秦韓)에 처음 6국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弁辰에도 또한 12국이 있었다고 하였다. 『삼국지』 변진조에는 이들 진한 12국과 변진 12국을 일괄 서술하였는데, 접두어의 형태로 ‘弁辰’이 들어간 것은 변진 12국에 속하며, 그 밖의 소국의 이름 12개가 진한 12국인 셈이다. 이들 12국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그 위치를 달리 비정하는데(李丙燾, 1976 ; 千寬宇, 1976), 이는 대부분 언어학적인 방법에 따라 地名을 考證한 것으로서, 확실한 考古學的인 논증이나 뚜렷한 논거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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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연해 있고, 남북으로는 [고]구려·백제와 접하고 있다. 위나라 때는 신로(新盧)주 010
번역주 010)
新盧 : 이와 같이 전하는 기록은 『양서』 신라전을 비롯하여 『남사』, 『통전』, 『태평환우기』 신라전 등이다. 이들 기록에는 한결같이 ‘新盧’를 위나라 때에 일컫는 이름이라 하고 있어, 신라가 위나라에서 ‘신로’라고 알려져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다. ‘新羅’를 ‘新盧’라고 일컫는 것은 ‘斯羅’를 ‘斯盧’라 한 것과 같이, 고대의 음운에 ‘盧’와 ‘羅’가 서로 통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盧’와 ‘羅’는 다시 ‘良’과도 음이 통하여, 일본 측 기록에서는 “이때에 新良國의 왕이 공조 81척분을 바쳤다(此時 新良國主貢進御調八十一隻).”(『고사기』 권하)고 하여 신라를 ‘新良’이라고도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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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불렀고, 송나라 때는 신라 또는 사라주 011
번역주 011)
斯羅 : 이와 같이 전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중국 측의 기록, 곧 본 『양서』 신라전을 비롯하여 『양직공도』 백제조와 『남사』·『한원』, 『통전』, 『책부원구』 外臣部와 『태평환우기』 신라전에 보인다. 1989년에 발견된 〈냉수리비〉에는 “斯羅의 탁부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敎하시어(斯羅喙斯夫智王 乃智王此二王教)”라고 하여 지증왕 4년(503) 9월 25일 당시에 ‘斯羅’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냉수리비〉는 국가가 직접 세운 율령적 성격의 비인 까닭에 이때 사용한 국명은 신라의 공식 국호였음을 알 수 있다. 智證麻立干 4년 겨울 10월에 ‘新羅’라는 국호를 정하기 직전까지 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이 찬술한 〈雙溪寺眞鑑禪師塔碑〉(887) 비명에는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斯羅(신라)를 교화했네(猛探虎窟 遠泛鯨波 去傳秘印 來化斯羅).”라고 하여, 신라를 ‘斯羅’로 표현하였다. 일본 측 사료에도 ‘斯羅’라는 이름이 전한다. 『日本書紀』 권17, 繼體天皇 7년 11월 5일조에는 “朝庭에서 백제의 姐彌文貴 장군과 斯羅의 汶得至, 安羅의 辛已奚와 賁巴委佐, 伴跛의 旣殿奚와 竹汶至 등을 불러 놓고 恩勅을 선포하여 己汶과 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고 하여 백제·안라와 함께 斯羅가 등장하고, 같은 책 권19, 欽明天皇 15년(554) 12월조에는 “百濟가 下部의 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과 安羅에 있는 倭臣들, 任那 여러 나라의 旱岐들은 아룁니다. 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みやけ : 官家)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라고 하여 사라가 등장한다. 대체로 여기에 등장하는 ‘사라’를 신라로 이해하는데(최원식 외, 1994), 같은 책 권19, 欽明天皇 5년(554) 3월조의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 재건에 대한 사정을 보고하는 기사에는 “신라는 봄에 㖨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久禮山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安羅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斯羅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新羅春取㖨淳 仍擯出我久禮山戍 而遂有之 近安羅處 安羅耕種 近久禮山處 斯羅耕種 各自耕之 不相侵奪).”라고 하여 신라와 함께 斯羅가 등장한다. 이 기사에서 대부분 ‘신라’라고 명기하면서도 ‘斯羅’의 명칭이 오직 한 군데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오류일 가능성이 높지만, 추후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 가운데 『魏書』 권8 世宗 景明 3년(502)조와 『魏書』 永平 원년(508)조 조공 기사에 ‘斯羅’의 명칭이 보이는데, 이를 신라와 동일시하기도 하나(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이들이 疏勒·罽賓·婆羅捺·烏萇 등등 서역의 여러 나라와 함께 등장하고, 그 협주에도 함께 나온 나라들이 ‘史籍 西域傳’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였으며, 『삼국지』 권30, 동이전 30, 倭조에 大秦國을 설명하면서 “斯羅國은 안식에 속하며 大秦과 연접하여 있다.”고 한 바, 『魏書』 景明 3년(502)조와 永平 원년(508)조에 조공하였다는 斯羅는 서역의 사라국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斯羅’라는 명칭은 ‘신라’를 국호로 정하기 직전의 것으로서, ‘新羅’를 ‘新盧’라고 일컫듯이 ‘斯盧’라고도 하였다. ‘斯盧’라는 이름은 『양서』 신라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 弁辰 12국의 하나로서 등장한다.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斯盧는 곧 신라인데, 음을 옮기면서 바뀐 것이다(斯盧, 卽新羅, 乃譯音之轉).”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진수의 견해를 따른다면 사로나 사라, 신라나 신로 등은 음역의 과정에서 나타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斯羅의 ‘斯’는 15세기의 ‘’로서 현대음의 ‘시’ 혹은 ‘사’, 羅는 ‘라’ 혹은 ‘로’ 또는 ‘루(luo)’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김영만, 1990). 『삼국지』에 斯盧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3세기 중엽 신라가 ‘사로국’으로 일컬어졌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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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주 012
번역주 012)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 이 구절은 『남사』 신라전에도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다만 『通典』 신라국조에는 “처음에는 新盧라 하고, 송나라 때에 新羅, 혹은 斯羅라고 하였다(初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 斯羅).”고 하여, 『양서』나 『남사』 신라전처럼 新盧를 위나라 때의 이름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太平寰宇記』 신라조에는 위나라 때의 新盧國이라 하였던 것이 신라국이 되었는데 달리 斯羅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하여, 『양서』 등의 사료와 서술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내용적으로 동일하게 구성되었다. 이들 중국 측 사서에서 신라의 국호를 열거한 것은 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徐耶伐 또는 徐羅伐, 雞林 등의 국호가 있었음을 전한다는 점에서 중국 측 사료와 차이가 있다. 곧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조에는 박혁거세가 개국하면서 국호를 徐耶伐이라 하였는데, 달리 斯羅, 斯盧, 新羅라고 일컬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박혁거세의 개국과 함께 국호를 徐羅伐 또는 徐伐이라 하고, 달리 斯羅 또는 斯盧라고도 하며, 또한 雞林國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계림이란 국호가 탈해왕 9년 금성 동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있어 시림에 가서 김알지를 얻게 되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의 국호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곧 박혁거세의 개국에 따른 서야벌(서라벌, 서벌), 그리고 탈해왕 9년 김알지를 얻은 설화로부터 계림국으로의 개명, 기림이사금 10년 신라의 국호로 되돌리는 변화가 있었다. 그 후 지증왕 4년(503) 10월 기림이사금 10년(307)에 회복한 국호 신라를 공식 국명으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수리비〉(503)에는 “斯羅의 탁부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敎하시어(斯羅喙斯夫智王 乃智王此二王教)”라고 하여 지증왕 4년(503) 9월 25일 당시에 ‘斯羅’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림이사금 때에 복고하였다는 ‘신라’는 ‘斯羅’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삼국유사』 왕력 光熈 정묘년(307)조에는 국호를 고쳤다고 하여 『삼국사기』 기림이사금 10년조의 기사와 동일하다. 다만 1512년에 간행된 규장각본(국보 306-2호)에는 “光熈丁夘年 是國号 曰斯羅 新者 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民 云 或系智證 法興之世”라고 하여, 당시의 국호가 ‘斯羅’였다고 하면서도, ‘新羅’ 의 명칭으로 그 의미를 풀이하고, 이 일이 혹설에는 지증왕 때의 일이라는 설을 부기하였다. 이는 ‘사라’로부터 그 음이 서로 비슷한 ‘신라’를 취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지증왕 때에 국왕호와 함께 국호의 의미를 한자식으로 풀이한 데 따른 것이었음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서기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나 5~6세기경에 세워진 〈충주비〉에는 신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나 사라가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연은 고려시대에 ‘京’을 ‘서벌’이라 훈독하는 것은 신라의 국호 ‘서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석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어학계에서는 오늘날 수도를 ‘서울’이라 일컬은 것이 ‘서벌’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韓鎭書는 그의 『海東繹史』에서 “東語 新曰斯伊 國曰羅”라 하여 새나라로 생각하였다. 梁柱東도 이에 따라 東方·東土로 간주하였다. 즉, 斯羅·新羅·斯盧·尸羅는 모두 의 借字로서 東方(東土)의 뜻으로 보고, 徐伐·鷄林·東京 등을 로 읽어 는 東·新·曙의 뜻으로, 은 光明國土로 보아 (徐那伐) 즉, 東川原으로 풀이하였다(1957). 또한 田蒙秀는 실애벌 즉, 谷川原(山谷의 나라)으로 보았으며(1940), 安在鴻은 실(谷)·시로(城)의 뜻으로 풀이하였다(1947). 李丙燾는 徐那伐·蘇伐의 뜻을 高·上·聖의 뜻으로 풀어 백제의 蘇夫里나 고구려의 수릿골과 같은 Capital의 의미로 파악하였다(1976). 趙芝薰의 경우도 의 뜻을 上國·高國·神國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1955). 이와 비슷한 주장은 李在秀에게서 계속되고 있다(1960). 그러나 末松保和는 이들 新盧·斯羅·新羅는 『晉書』 載記의 ‘薛羅’, 『삼국사기』의 徐耶(伐)·徐那(伐), 『삼국유사』의 徐羅(伐)의 對譯으로 이해하였다(末松保和, 1954). 또한 末松保和·今西龍 등은 을 金國 또는 鐵國으로 풀이하였거니와(末松保和, 1948 ; 今西龍, 1970), 일찍부터 신라는 金國의 나라로 中東에 알려진 바도 있었다(金定慰, 1977). 이에 대해 文暻鉉은 신라가 곧  혹은 의 音借 내지 訓借의 漢字同音同訓 異字로 보았다. 즉, 그는 徐那(羅)伐·斯(新)盧·尸羅는 音借이며 新羅·鷄林·鷄貴는 訓借로 생각하였다(1983). 다시 말해서 新字는 (시·쇠)란 原義를 갖고 있으니만치 란 黃金·鐵·銅의 뜻이며, 황금의 고귀하고 빛난(光輝) 속성으로부터 光明·東·新·高貴·寶物의 뜻으로 바뀐 것이며, 羅字는 那·耶와 같이 地·土·村·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奴·讓·那(고구려)·洛·耶(가라)와 같고, 伐은 新羅地名의 어미에 붙이는 것으로 光明·原·國을 의미하는 (불)로 音讀한 것으로 보았다(文暻鉉, 1983). 즉, 신라는 북방의 철기문화를 가진 민족(古朝鮮系)이 남하하여 金村()을 건설하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村名도 로, 그 支配族의 姓氏도 (金·昔)로 한 연후에 유교사상의 표현인 新羅로 雅化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문경현, 1983). 근래에 들어 주보돈은 ‘사로’ 또는 ‘사라’는 오늘날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범위의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대내적인 용도로, 신라는 사로를 포함하여 그에 예속된 다양한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뜻으로 주로 대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풀이하였다(주보돈, 1998).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정하면서 徐羅伐, 徐伐, 徐耶伐이라 하였고, 일연이 지적하였듯이 고려시대에 ‘京’을 ‘서벌’이라 훈독하는 것은 신라의 국호 ‘서벌’ 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徐羅伐, 徐伐, 徐耶伐은 모두 서벌을 음사하면서 나타난 이름이며, 사라나 신라 또한 비슷한 음가로서, 지증왕 때에 이르러 유교적 의미를 풀이하면서 신라를 공식 국호로 책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한편 신라의 음가로부터 비롯한 薛羅와 尸羅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薛羅는 『晉書』 권113, 載記 13, 苻堅전에 보인다. 곧 太元 4년 (379) 苻洛이 苻堅에 반기를 들어 거병하면서 ‘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에 사신을 보내어 징병을 하였다는 데서 고구려·백제와 함께 ‘薛羅’가 등장한다. 그런데 「海印寺 妙吉祥塔誌」(895)의 僧訓이 지은 「僧軍을 哭함(哭緇軍)」에는 “혼탁한 운세가 서쪽으로 와 薩羅에 이르러, 십 년 동안 억센 짐승들이 僧伽를 괴롭혔구나(濁數西來及薩羅, 十年狼豹困僧伽).” 라고 하여 ‘薩羅’가 보인다. 『진서』 부견전의 ‘薛羅’와 「海印寺 妙吉祥塔誌」의 ‘薩羅’는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薛羅’가 고구려·백제와 함께 언급되었고 「해인사 묘길상탑지」는 신라 말 혼탁한 신라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신라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申景濬(1712~1781)은 그의 유저 『頤齋遺藁』에서 『진서』 부견전의 薛羅를 신라라고 풀이하면서, “대개 신라는 처음에 서벌라라고 칭하였는데 서벌 두 글자가 합하면 ‘薛’음과 비슷하다. 또한 지금 서울 사람들은 內官이 관장하는 御膳을 薛里라고 하는데, 薛의 음가는 ‘셥’으로, ‘涉’의 소리와 같다. 또한 ‘서’와 ‘벌’ 초성 둘이 합한 것이니, ‘薛’의 遺語일 뿐이다(『頤齋遺藁』 권25, 雜著, 華音方言字義解).”라고 하였다. 오늘날 국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서라벌을 서벌라라고 한 것은 신경준의 오류임이 분명하나, 『진서』 부견전의 설라를 신라로 이해한 것은 옳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설라와 신라 또는 서라벌의 음운학적 관계에 대하여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양자 간의 음가가 비슷하므로 신라를 설라라고도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를 尸羅라고 일컫기도 하였는데, 이 명칭은 최치원의 「新羅迦耶山海印寺結界塲記」에 나타난다. 곧 “국호 시라는 실로 바라제가 불법을 일으킨 곳이고, 산이름을 가야라고 일컬은 것은 석가모니불이 불도를 이룬 곳이다(『東文選』 권64, 記, 新羅迦耶山海印寺結界塲記).”라고 하여, 신라를 ‘尸羅’라고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름은 『제왕운기』에도 등장하는데, 본래 尸羅는 범어(梵語) śīla, 즉 쉬일라의 음역으로, 身·口·意 三業의 죄악을 방지한다는 뜻을 지니며, 보통 戒 혹은 律을 가리키는데, 시라의 땅이란 신라를 가리키는 동시에, ‘戒行이 청정한 땅’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최치원은 범어의 시라가 신라와 음이 서로 통하고 신라의 불교가 융성한 점을 들어 계행이 청정한 신라라는 의미로 그 음가를 빌어 신라를 尸羅라고 일컫지 않았을까 한다. 말하자면 시라는 불교용어 가운데 신라와 음가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차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鷄林은 신라 전 시기에 걸쳐 두루 사용된 것으로서 탈해이사금대 김알지를 발견한 것을 기념해서 붙여졌고, 신라 왕통을 줄곧 김씨가 장악하였던 만큼 ‘신라’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후에도 별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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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는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521)에 모진이라고 이름하는 [신라]왕이주 013
번역주 013)
募秦 : 양 武帝 普通 2년(521)은 신라 법흥왕 21년이다. 당시 신라왕을 募秦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 대하여, 『북제서』 권7, 世祖武成記에는 “河淸 4年(진흥왕 25년, 565) 2월 甲寅에 新羅國王 金眞興을 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는 조칙을 내렸다.”고 하여 진흥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 왕실에서 김씨 성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봉평비〉(524)에는 법흥왕을 “另卽知寐錦王”이라 칭하였고, 〈울주천전리서석 추명〉(법흥왕 26, 539)에는 “另卽知太王”이라 일컬었다. 이는 본 『양서』 신라전(중화서국 「王姓募名秦」)에서 법흥왕의 성이 募이고, 이름을 秦이라 한 것이(남감본·무영전본 「王名募泰」, 급고각본·백 납본 「王募名秦」), 법흥왕의 이름 另卽知를 지칭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지금까지 신라에서 성씨의 출현은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格을 중국식으로 수식하고 대내적으로는 중국의 칭성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피지배층에 대한 권위를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申東河, 1979). 따라서 상고 신라의 성씨는 혼돈된 계보관념에 의해 후대에 소급하여 추가 윤색한 결과로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동일 인물에게 명명된 성씨가 김씨 혹은 박씨로서 각 사서 또는 동일 사서에조차 혼돈된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에서 朴提上으로 되었던 것이 『삼국유사』에는 金提上으로, 『삼국사기』에서도 昔利音(奈音)을 葛文王 朴奈音으로, 許婁葛文王 또한 朴氏 또는 金氏로 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박남수, 1987). 최근에는 박 또는 김의 두 가지 성씨의 전승은 일본 씨성제도, 곧 일본 고대사회에서 우지(氏)가 씨족이라 擬制하면서도 실은 제사·거주지·관직 등을 통해서 결합된 정치적 집단을 의미하는 것에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곧 ‘朴’提上의 전승은 파사이사금 때에 제상의 祖先 출신 지역인 栗浦 지역이 (박)아도갈문왕에 의하여 신라에 귀속되어 혈연적으로 의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제사·거주지·관직 등을 통해서 정치집단화되었던 것을 반영하며, ‘김’제상의 전승은 눌지왕 때에 왕제 귀환을 위해 제상이 왕경에 징발되면서 나마의 관등을 받아 김씨 왕족의 탁부 내지 사탁부에 소속되어 새로이 김씨와 의제 혈연 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박남수, 2019). 한편 『翰苑』 권30, 藩夷部 新羅國조에는 『括地志』의 “신라왕은 姓이 김씨인데 그 선조의 所出은 자세하지 않다.”는 기사를 인용하고, 아울러 『隋東藩風俗記』의 “金姓이 서로 계승한 지 30여 代에 이른다.”는 기사를 함께 실었다. 이에 대해 『通典』 권185, 邊防 1, 東夷 上, 신라국조에는 “신라 왕의 성은 金이고 이름은 眞平이다.”라 하고 이에 주석하여 『한원』과 동일하게 『수동번풍속기』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이에 대해 『동번풍속기』는 수나라 때(581~618)의 것이므로 신라 26대 진평왕대(579~632)의 정황을 기록했을 것으로 확언하고, 진평왕을 30여 대째의 김씨 왕이라고 『동번풍속기』에 전하는 사실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李基東, 1979a). 한편 『동번풍속기』 기사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약했던 仇道系가 경주 지역에 들어와 석씨 왕족과 통혼하여 연맹을 이루다가, 김씨 족단의 정치적 기반과 군사력에 의하여 나물마립간이 즉위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과정은 경주 일원에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과정과 흐름을 같이하므로, 지금까지 경주 토착세력으로 보아왔던 김씨계를, 소백산맥 일대의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던 辰韓系가 신라 사회에 이주하여 형성한 족단으로 파악함으로써 『수동번풍속기』의 “金姓이 서로 계승한 지 30여 代에 이른다.”는 기사에 대한 풀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박남수,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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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주 014
번역주 014)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 신라가 최초로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普通 2年(521)은 법흥왕 8년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도 “遣使於梁貢方物”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처럼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나물왕 26년(381) 前秦과 通交한 이후 140년만의 일이다. 이는 『梁職貢圖』 백제사신조의 행문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양직공도』는 양나라 元帝가 처음 荊州刺史에 재임할 때(526~539)에 편찬한 것으로서, 양나라 때의 신라관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곧 이 행문에는 “[백제] 주변의 소국[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 등이 부용하였다.”라고 하여, 520~530년대에 양나라는 斯羅(신라)를 백제 주변의 여러 소국과 함께 백제에 종속된 작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李弘稙, 1971). 이에 대해 末松保和는 『양서』 신라전이 원칙적으로 梁代(502~557)에 신라와 통교하면서 얻어진 當代의 상태만을 기록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 완성 시기가 당나라 초엽(629~636)인 까닭에 그간의 신라에 대한 지식도 추가되었을 것으로 전제하고, 陳代 11년간 4회의 사신 왕래를 통하여 『양서』 신라전의 기본 자료를 취했을 것으로 짐작했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대체로 『양직공도』 백제사신조의 행문은 『양서』 신라전에 보이듯이 신라가 백제를 통하여 梁과 통교할 수 있었던 때문으로 보며, 나아가 『양서』에 나타난 신라의 사정도 백제를 통하여 인식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사실과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李弘稙, 1971). 나아가 6세기 초엽 신라의 성장과 외교적 진출은 어느 정도 백제와 대등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무령왕 12년(512) 백제가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을 살필 수 있지만, 521년(무령왕 21)에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법흥왕대에 신라가 양나라에 사신을 백제 사신에게 딸려 보냈다는 『양서』의 기록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사실 末松의 견해대로 『양서』 신라전이 6세기 중엽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법흥왕·진흥왕 때의 가야 정벌 기사인 듯한 『수서』 신라전의 “그 선대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는데 후에 백제가 고구려를 정복함으로 인하여 고구려인이 戎役(전쟁)을 감내하지 못하고 서로 귀부하여 드디어 강성하게 되었다. 인하여 백제를 습격하여 迦羅國을 부용하였다.”는 내용이나,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5년조의 喪服法 규정인 듯한 상복제, 법흥왕 8년(520)에 정비된 관등제도 이미 『양서』에 소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양서』 신라전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므로 관등의 규정이나 문자 등에 있어서 오히려 신라 중고기 이전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梁職貢圖』에 나타나듯이 梁나라가 當代 신라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하며, 신라를 백제에 붙어 있는 소국으로 인식한 梁나라 史官들이 자신들의 國史를 편찬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서』를 찬술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李弘稙, 1971). 곧 姚察이 隋 開皇 9년(589) 梁代의 國史를 바탕으로 『양서』를 찬술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姚思廉이 家傳의 옛 원고를 바탕으로 『양서』를 완성하였으므로, 양나라 때의 신라관이 『양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라 하겠다(박남수, 1992). 이기동은 보통 21년에 양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하고, 그 이후 신라가 양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던 것은, 백제가 양에 대하여 동맹국인 신라를 마치 자국에 의부하는 작은 나라라고 선전하고 한편 양나라가 이를 그대로 잘못 믿었던 데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신라가 단 1회에 걸쳐 사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양나라가 신라 유학승 覺德의 귀국편에 沈湖를 사신으로 보내 불사리와 향을 보내어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게 된 배경에는 양나라와의 관계가 일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논단한 바 있다(이기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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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습속에 성을 건모라주 015
번역주 015)
健牟羅 : 『新唐書』에서는 侵牟羅로 표기했다. 健은 ‘크다(大)’의 뜻이며, 牟羅는 ‘모르·마을’의 뜻으로 ‘큰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侵(강제로 빼앗은)牟羅의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李丙燾는 原始集會所로서의 都廳·公廳·茅亭 등에 대한 해설로 그 기원을 추출하고 있다(1976). 그리하여 健牟羅는 큰모르(大村·大邑)의 字音인 바, 〈광개토왕릉비〉의 牟盧·牟婁도 같은 뜻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을’이 집회소 또는 공동체(촌락)인 것이며 슬라브족의 Mir, 영국의 Folk-mote, 게르만족의 Mark, 東濊의 읍락 등을 같은 내용으로 보았다. 따라서 健牟羅는 촌락공동체인 동시에 촌락집회소의 의미이며, 우리말의 두레와도 흡사한 것인데, 을은 정치적으로 변천하여 南堂과 같은 제도로 발전하였으며, 두레는 사회적으로 노동·예배·도의·유희 등으로 발전하였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그러나 여기서 건모라는 그러한 원초적인 뜻보다 처음에는 큰 마을(邑落) 또는 성(촌락공동체)의 뜻이었지만, 점차 왕성(王都)의 의미로 변화된 듯하다. 따라서 신라의 모체가 된 斯盧가 원래는 작은 村 또는 城에 불과했기 때문에 건모라라 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오늘의 경주로 보아도 무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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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부르며, 그 읍이 [건모라의] 안에 있는 것은 탁주 016
번역주 016)
啄 : ‘啄’은 喙·涿·梁과 함께 쓰인다. 『양서』 급고각본에는 啄, 남감본, 무영전본, 백납본, 중화서국본에는 ‘ ’으로 되어 있다. ‘ ’는 『龍龕手鑑』에 따르면 ‘啄’의 이체자이다(中華民國 敎育部 國語推行委員會, 2004, 『異體字字典』, dict.variants.moe.edu. tw 참조). 중고기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중성리비〉(501)와 〈냉수리비〉(503), 〈봉평비〉(52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독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삼국유사』 진한조에는 “최치원이 이르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온 자들이므로 탁수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점탁 등으로 불렀다.’ 고 하였다(又崔致逺云 辰韓夲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 漸涿等).” 하고, 다시 주석하여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자를 읽을 때 발음을 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沙梁이라 쓰고, 梁을 또한 道라고 읽는다(羅人方言讀涿音爲道 今或作沙梁 梁 亦讀道).”고 하였다. 이 금석문에 나타난 글자는 대체로 최치원의 말대로 ‘돌’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은데, ‘울돌목’을 ‘鳴梁’이라고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양주동은, 진흥왕비에는 梁·沙梁을 㖨·沙㖨으로, 『일본서기』 흠명천황 2년조에는 梁을 㖨으로 기술하였음을 밝히고, ‘梁·㖨·涿’ 내지 ‘吐·隄’ 등 자의 원어는 ‘터(基)’이므로 ‘沙梁·沙㖨’은 ‘새터’이나 옛 음은 氣音을 피하므로 ‘도’로 발음된 것이라고 하였다(양주동, 1965). 이에 대해 노태돈은, 喙(훼)는 새의 부리를 뜻하는 글자로서, 이는 古所夫里·古良夫里의 夫里나 신라의 徐羅伐·比子伐의 伐과 같은 것으로 ‘벌’ 또는 ‘’로 읽혔을 것이고 들(野)을 뜻한다고 보고, 훼 또는 啄·涿·梁이란 글자는 어떤 집단이 도랑이나 들을 끼고 있었던 데에서 연유하여 붙인 이름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盧泰敦, 1975). 이우태는 이 글자들은 아마 ‘돌’ 또는 ‘’이나 ‘벌’ 또는 ‘’로 읽혀졌을 것으로 보고, ‘돌’이나 ‘’은 도랑(小川)의 뜻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도랑의 고어가 ‘돌’ 또는 ‘’로 다리(橋)나 뚝(堰)의 뜻도 가지고 있었으며, 한자로는 흔히 ‘梁’을 사용하였는데, 이 ‘양’이 ‘돌’로 읽혔음은 ‘울돌목’을 ‘鳴梁’이라고 쓴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라의 6부 명칭 가운데는 이러한 梁이 붙지 않는 漢祇部 등이 있으나 안압지 출토 비편에 ‘漢只伐部’라고 되어 있어 원래는 어떤 들(伐)의 집단이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의 6부는 어떤 川邊의 집단 또는 들(野)의 집단이었던 것이라 하였다(1997). 김영만은 신라 6부명에 보이는 ‘喙’, ‘梁’, ‘涿’은 우리말 고유 지명을 차자 표기한 것으로서, ‘梁’은 훈차 표기, ‘喙’, ‘涿’은 음차 표기한 것으로 보았다. 곧 ‘喙’는 ‘啄’의 同字 또는 이체자로 보아야 하며, ‘喙’, ‘涿’, ‘啄’은 모두 ‘*돍’을 음차 표기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押梁小國의 ‘梁’을 ‘督’이라 한 데서, ‘돍’을 ‘督’으로 음차 표기한 사례를 살필 수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하고, 『삼국유사』에서 ‘梁’의 음을 ‘道’라고 한 것은 ‘돍’에서 종성을 생략한 표기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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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17
번역주 017)
啄評 : 『양서』 신라전에 보이는 ‘啄評’에 대하여 기왕에는 6세기 중엽 신라 왕성의 畿內 6停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末松保和, 1954), 〈중성리비〉에서 ‘啄評’이라는 용례가 확인되었다. 이로써 ‘部’라는 한자식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에 ‘부’를 대신하여 ‘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곧 6부 가운데 喙, 沙喙 외의 4부는 ‘部’와 동일한 의미의 ‘喙’을 사용하였는데, 그 후 喙이 탈락하여 잠탁부, 본피부 등으로 일컬었다는 주장이다(李文基, 2009 ; 전덕재, 2009). 또한 〈중성리비〉 단계의 6부는 6‘喙評’ 곧 喙, 評, 喙評으로 일컬었는데, 部名이 〈중성리비〉 단계의 喙으로부터 시작하여 524년 〈봉평비〉 이전에 6喙評으로 확산, 정착되었고, 〈봉평비〉에서 ‘六部’로 거듭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이용현, 2010). 사실 〈중성리비〉에 보이는 ‘喙評’은 뒤이어 나오는 爭人들이 모두 6부 관련 지명을 칭하였다는 점에서 喙 출신임을 밝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喙評’이 ‘喙’과 관련된 명칭임을 시사한다. ‘喙評’의 ‘評’은 『日本書紀』 繼體天皇 24년(530)조에 “背評은 地名으로 또한 能備己富里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여 ‘富里’로 일컬었다. ‘富里’는 ‘發, 夫餘, 夫里, 伐, 不, 弗, 沸’ 내지 ‘平, 坪’, ‘火, 列’에 상응하는 ‘原, 野’를 뜻하는 ‘’의 음차로서, ‘’의 ‘’에 상응한다(梁柱東, 1965). 〈중성리비〉에 보이는 ‘喙部’의 ‘部’가 한자식 표현이고, 신라의 왕경을 ‘健牟羅’ 곧 ‘큰마을’이라 했듯이 6부 또한 순수한 우리말로 일컬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터’를 뜻하는 ‘도’, ‘들·벌판’ 을 뜻하는 ‘伐·評’ 등이 적절해 보인다. 이에 ‘喙評’은 점량부를 牟旵伐, 한지부를 金評이라 일컬었듯이, 喙을 지칭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중성리비〉에 등장하는 ‘喙評公’은 고구려 고국천왕 12년(190) 沛者 於㫒留와 함께 난을 일으켰던 左可慮의 직임 評者에 상응하는 직임이 아닐까 추측된다. 일찍이 部內部說을 주장하는 논자들 중에는 부내부 집단의 명칭을 ‘評’이라 하지 않았을까 추론하기도 하였다(노태돈, 1975). 이에 〈중성리비〉의 ‘喙評’은 6부 ‘喙’의 전신 명칭으로 인정되는 바, ‘評’은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명으로서 후일 한자어 ‘部’로 바뀜으로써 ‘喙部’가 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左可慮의 직임 評者는 바로 이들 지역을 관장하는 자이며, 〈중성리비〉의 喙評公 또한 그에 상응한 직임이 아닐까 한다. 이에 『양서』 신라전의 6탁평은 국왕 출신지인 ‘喙評’의 명칭으로써 6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삼은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나타난 6부의 명칭을 6~7세기 금석문의 표기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br〉다음 표에서 살필 수 있듯이 ‘喙部’는 본래의 이름 ‘喙評’에서 ‘評’을 한자식 표현 ‘部’로 전환함으로써 나타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중성리비〉의 喙部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단위체로서의 한자식 명칭인 6部의 단초를 여는 이름이며, 이러한 명칭이 〈냉수리비〉에서 喙으로만 등장하고 部가 보이지 않는 것은 沙喙 출신 지도로갈문왕이 즉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봉평비〉에서 6부가 모두 ‘部’를 칭하였던 것은 율령의 반포로 관등제가 정비되면서 6부 또한 행정단위체로서 정비된 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전히 ‘喙’ 출신 귀족들이 등장한 것은 아직 왕권이 그 출신지인 ‘喙’을 벗어버리지 못한 단계에서, 본피부·잠탁부의 ‘간지’와 마찬가지로 ‘喙’ 출신 귀족들의 독자성 곧 ‘喙’의 족적 기반의 전통을 인정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단양신라적성비〉(이하 〈적성비〉) 단계에서 국왕은 더 이상 출신부를 칭하지 않게 되었거니와, 이제 6부가 명실상부한 행정단위체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진흥왕순수비〉에서는 비에 따라 각각 ‘部’를 생략하든지 칭하든지 하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部’를 칭하던 칭하지 않던 간에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박남수, 2010a).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초기국가론에 뒤이어 이른바 ‘부체제’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이는 〈냉수리비〉와 〈봉평비〉, 그리고 최근 〈중성리비〉의 발견으로 과속화된 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읍락국가로부터 귀족국가로 넘어가는 4~6세기의 과도기 단계를 ‘부체제’로 설정함으로써 나름대로 우리 고대국가의 발전 단계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더라도 용어상 일관성을 결여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주보돈, 2006). 그 뿐만 아니라 2009년 〈중성리비〉의 발견으로 신라에서 ‘부’의 생성이 〈중성리비〉를 건립한 501년에서 멀지 않다는 점에서 새로 검토할 단계에 와 있지 않은가 한다.
[ 금석문에 나타난 신라 6부명 표기 변천(박남수, 2013 재인용)]〈img〉04-0001〈/i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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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하니,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주 018
번역주 018)
六啄評 : 나라 안에 있다는 6개의 啄評이란, 중국의 군현에 비견되는 외읍에 대응하는 내읍의 구획명을 지칭하므로, 健牟羅(王都·王城) 안에 있는 6개의 행정구역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末松保和는 6啄評을 王都周邊의 6停, 곧 地方軍團의 6停[大幢·貴幢(上州停)·漢山停·牛首停·河西停·完山停]과는 별개로 王都 부근(畿內)에 따로 東畿停·南畿停·中畿停·西畿停·北畿停·莫耶停 등 畿內 6停으로 생각하였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6과 52의 숫자가 하나는 王都를 지키는 군단의 수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신라의 郡縣數라고 할 때, 오히려 6탁평이란 신라의 왕도 6부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중성리비〉에서 ‘喙部, 喙’과 함께 ‘喙評’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喙部만을 ‘部’로 기재한 것은 국왕 통치체제 안에서 6부를 가장 일찍 정비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문기, 2009 ; 김희만, 2009)와 喙部가 가장 우세한 부이기 때문이라는 견해(이영호, 2009)가 있다. 또한 〈중성리비〉의 ‘喙評公斯弥’에 대해서는 ‘喙評의 公斯弥’(전덕재, 2009) 또는 ‘喙의 評公과 斯弥’(강종훈, 2009 ; 김희만, 2009)라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 〈중성리비〉에 보이는 “牟旵伐喙斯利壹伐皮朱智 夲彼喙柴干支弗乃壹伐”에 대하여, 『양서』 신라전 6탁평 기사를 원용하여 ‘牟旵伐喙’, ‘夲波(彼)喙’ 등으로 석독하기도 한다. 당시에 6부 가운데 喙, 沙喙 외의 4부는 ‘部’와 동일한 의미의 ‘喙’ 을 사용하였는데, 그 후 ‘喙’이 탈락하여 잠탁부, 본피부 등으로 일컬었다는 주장이다(이문기, 2009 ; 전덕재, 2009). 또한 〈중성리비〉 단계의 6부는 6‘喙評’으로서 喙, 評, 喙評의 사례로 볼 때에 部名이 〈중성리비〉 단계의 喙으로부터 시작하여 524년 〈봉평비〉 이전에 6喙評으로 확산, 정착되었고, 〈봉평비〉에서 ‘六部’로 거듭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이용현, 2010). 또 한편으로 ‘牟旵伐喙’으로 읽을 경우 〈중성리비〉의 해당 비문 뒤의 인물들이 爭人이 될 텐데도 전혀 무관한 것처럼 나오고 있어 앞뒤 맥락에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고, ‘牟旵伐’을 인명으로 이해하여 ‘喙’과 나누어 보기도 하였다(강종훈, 2009). 또한 ‘本波喙柴干支’의 경우 〈냉수리비〉에는 왜 ‘本波喙’이나 ‘本波喙部’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함을 지적하기도 한다(강종훈, 2009 ; 주보돈, 2010). 나아가 牟旦旵伐喙과 마찬가지로 本牟子喙도 붙여볼 여지가 없을까 하는 견해가 표출되기도 하였다(주보돈, 2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牟旦伐喙’, ‘本波(彼)喙’說은 〈중성리비〉 단계에서 京外 수장급들이 이름자에 즐겨 사용하던 ‘喙’을 部名의 일부로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서, 이사금시대에 6부가 이미 성립되었다는 설을 보강하기 위해 부회한 착상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한다(주보돈, 2010). 사실 노태돈은 일찍이 部內部를 ‘評’이라 일컫다가 병합 과정을 거쳐 나중에 남은 것이 ‘6喙評’이 되고, 그것이 다시 ‘6部’로 변모한다는 가설(노태돈, 1975)을 제시한 바 있는데,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논리를 부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여러 연구자들이 두 차례 등장한다는 ‘牟旦伐’은 ‘牟旦旵’이 분명하고, 두 번째 등장한다는 ‘牟旦伐’이란 ‘至且(旦)代喙’의 誤讀이며, 중고기 금석문에서 이름의 돌림자로 ‘斯利’와 함께 ‘沙利’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에 〈중성리비〉 건립 당시에 이름자에 ‘喙’을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고, ‘喙評’의 ‘評’은 金評과 마찬가지로 탁부의 본래 거주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박남수, 2010b). 이처럼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6부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추동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석독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중성리비〉가 지니는 연구사적 폭발력은 기왕에 추정에 불과하던 국왕과 갈문왕의 출신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중고기 왕권을 장악해갔는가를 가름할 핵심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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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52개 읍륵이 있다.주 019
번역주 019)
五十二邑勒 : 『太平御覽』 권781, 四夷部 所引에는 “그 邑으로 서울에 있는 것은 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邑勒이라 하는데 또한 중국의 군현을 말한다. 나라에는 6家 탁평과 52읍의 읍륵이 있다(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家啄評·五十二邑邑勒).”고 되어 있다. 『舊唐書』 東夷列傳 新羅조에는 “[신라에는] 성읍과 촌락이 있는데, 왕이 거하는 곳은 금성으로 주위가 7~8리가 되며 위병 3,000명이 있어 獅子隊를 설치하였다(有城邑村落. 王之所居曰金城, 周七八里. 衛兵三千人, 設獅子隊).”고 하여, 『五代會要』나 『册府元龜』에서는 『구당서』의 기사를 따르고 있다. 『양서』의 본 기사에서 啄評은 健牢羅(王都·王城) 안에 있는 6개의 內邑을 말하고 外邑을 邑勒이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중국의 郡縣에 비교하고 있으므로, 啄評과 邑勒은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6啄評과 52邑勒이 內·外邑으로서 대칭을 이루고 일정한 수효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하여, 일찍이 末松保和는 6啄評을 王都周邊의 6停(地方軍事制度로서의 6停과는 다르다)으로 비정하고, 52읍륵을 신라의 군현수로 비정하였다. 특히 탁평이란 地方軍團의 6停[大幢·貴幢(上州停)·漢山停·牛首停·河西停·完山停]이 아니라 王都 부근(畿內)에 있었던 東畿停·南畿停·中畿停·西畿停·北畿停·莫耶停 등의 6정으로서, 畿內 6停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52邑勒은 대략 6세기 중엽의 현실을 바탕으로 尙州·良州·廣州 등 37郡과 漢城地域 및 東北海岸地方을 포함한 수치로서 파악하였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양서』의 편찬자가 수도인 건모라를 언급하고 서울에 6탁평이, 그리고 지방에 52읍륵을 언급하면서 이를 중국의 군현에 비교하였다면, 6탁평은 〈봉평비〉에서 언급한 신라 6부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하며, 이에 대응하여 52읍륵이란 지방행정단위로서의 州郡을 지칭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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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비옥하여 오곡주 020
번역주 020)
五穀 : 五穀은 주로 북방에서 재배되던 보리·밀·기장 등을 지칭하였다. 여기서의 5穀에는 三韓時代 이래 稻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쌀이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農桑을 권장하거나 제방을 축조한 기사 등은 신라 사회에 일찍부터 농업을 중시하고 稻作이 행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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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심기에 적합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주 021
번역주 021)
多桑麻 : 뽕나무의 경우는 「신라촌락문서」에서 보듯이 沙害漸村은 1,004그루, 薩下知村은 1,280그루, 失名村은 730그루, 그리고 西原京 부근의 失名村은 1,235그루를 재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찍부터 뽕나무를 재배하여 의복의 개발이나 調의 징수를 위한 것이었다고 풀이된다. 진한 지역의 뽕나무와 누에치기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9년(32)조에는 국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이를 둘로 나누어 王女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고 붕당을 만들어,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이 大部의 뜰에 모여 麻로써 길쌈을 하였다는 嘉俳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공동작업으로 마포를 만드는 길쌈놀이가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양서』 신라전에서 麻의 생산을 일컬은 것은 신라에서의 모시 등을 생산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사실 신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한 이후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궁중수공업장에서 생산한 비단류와 삼베를 조공하였다. 이로 미루어 각 시기별 직물 생산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거니와, 5·6세기 무렵의 絹·帛·細布류, 7세기 무렵의 金總布·錦·金帛·綾·雜彩류를 비롯하여 20升布·30승포·40승포, 8세기 무렵 朝霞紬·魚霞紬와 모직물로서의 花氈·色毛氈, 羊毛를 주성분으로 하여 직조[濕織]한 문양있는 페르시아산 직물로서 평상에 까는 자리[坐具]인 五色氍毹, 9세기 무렵의 大花魚牙錦·小花어아금·朝霞錦·30승紵衫段·40승白氎布·綺 新羅組 등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신라의 의류 발전상에서 桑麻의 생산으로부터 이에 따른 비단과 삼베를 직조하고,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모직물에 이르기까지 수공업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던 사실을 보여준다(박남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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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과 베를 만든다. 소는 수레를 끌게 하고 말은 탄다. 남자와 여자는 분별이 있다.
그 나라의 관명에는 자분한지주 022
번역주 022)
子賁旱支 : 『양서』의 신라 관등명 가운데 ‘旱支’는 〈적성비〉 단계까지 ‘干支’로서 나타난다. 또한 ‘子賁旱支’는 『일본서기』 권9, 仲哀天皇 9년조의 ‘助富利智干’으로서 ‘京長’의 뜻인 伊罰干·角干·舒發翰·舒弗邯에 상응한다고 보고 있다(양주동, 1965). 子賁旱支는 신라의 最高官等인 伊伐飡을 말하는데, 文獻이나 金石文에 각각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통일성을 찾을 수 없다. 우선 『隋書』·『北史』·『册府元龜』·『通典』 등에는 伊罰干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翰苑』에는 伊伐干으로 되어 있다. 『南史』에는 子賁旱支로, 『三國史記』에는 伊伐飡 또는 角干·酒多로 표기되고 있다. 그 외에도 舒發翰·舒弗邯 또는 角粲·一伐干 등의 명칭도 보인다. 원래 舒發(弗)翰(邯)은 徐伐·徐羅伐의 公(官·等)으로서 部族長의 뜻이다. 나아가 신라가 官位(階·等)와 官職이 분화되기 전에는 伊伐飡(子賁旱支)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 趙榮濟는 伊伐飡 등이 관직이 아니라 관위라고 하였다(趙榮濟, 1983). 그러나 伊伐飡이란 명칭은 昔氏王代에 많이 나타나며 박씨 왕대에는 伊飡을, 김씨 왕대에는 舒弗翰을 많이 사용하였다. “伊湌雄宣卒 以大宣爲伊飡 兼知內外兵馬事”(『三國史記』 「新羅本紀」 逸聖尼師今 18年 2月)에서 볼 때 伊飡(또는 伊伐飡)이 관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伊飡幢元爲中侍”(『三國史記』 「新羅本紀」 孝昭王 5年 1月)의 경우를 비교할 때 大宣의 경우는 분명히 관등이었다고 판단된다(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末松保和도 또한 子賁旱支를 제1위 角干·徐弗邯·徐 發瀚에 해당한다고 보았다(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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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지주 023
번역주 023)
齊旱支 : 新羅 官等의 제3위인 迊飡의 별칭이다. 이러한 명칭은 『梁書』와 『南史』 뿐이며, 그 외에는 迎干(『隋書』·『通典』), 迊干(眞興王巡狩碑) 또는 蘇判이라 칭한다(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양주동은, 齊旱支는 ‘城長’의 뜻인 ‘잣한’으로서 ‘迊干·迊判’ 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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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한지주 024
번역주 024)
謁旱支 : 新羅 官等의 제6위인 阿飡 곧 아간지의 별칭이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이러한 명칭은 『梁書』·『南史』 뿐이며 그 외에는 阿尺干(『隋書』·『通典』), 阿干·阿粲 등이라 칭한다. 이 阿粲은 眞骨과 非眞骨(6頭品)의 구획이 되는 관등으로서 重阿飡制度로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있다(邊太燮, 1956). 즉, 6두품은 최고상한선이 阿飡이며, 侍中·兵部令 등도 최하한의 관등이 바로 아찬인 경우가 많다. 물론 侍中·兵部令은 진골만이 될 수 있는 관직이지만, 반드시 大阿飡 이상으로 한정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융통성은 飡이란 공통분모가 級飡까지 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으나, 服色에 있어서 6位(阿飡)~9位(級飡)까지는 緋色이라는 데 주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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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고지주 025
번역주 025)
壹告支 : 신라 관등의 제7위인 一吉飡, 곧 일간지의 별칭이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그 외 乙吉干(『隋書』·『通典』)·一吉干 등이라 칭하고 있으며, 『南史』는 壹吉支라 하고 있다. 告는 吉의 잘못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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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패한지주 026
번역주 026)
奇貝旱支 : 신라 관등의 제9위인 級飡, 곧 거벌간지의 별칭이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그 외 及伏干(『隋書』)·級伐干(『通典』)·及尺干(〈진흥왕순수비〉)으로 되어 있다. 級飡 이상은 최상의 伊伐飡까지 飡字(干·汗 등의 뜻)를 쓰고 있으며, 진골출신들이 주로 처음으로 받은 관등이어서 진골이 받는 최초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申瀅植,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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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주 027
번역주 027)
신라의 관등제 : 6세기 전반의 금석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에는 『양서』와 『남사』 신라전의 5~6개 관등(법흥왕 8, 521)으로부터 『수서』의 17관등(진평왕 16, 594)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거나(曾野壽彦, 1955), 『양서』의 단계로부터 6세기 말~7세기 전반 무렵 고구려·백제의 관등제에 대응하여 12, 13관등제를 정비하였다가 진덕여왕 때에 당나라의 正從 9品 관위제를 수용함으로써 17관등제가 성립된 것으로 보아왔다(宮崎市定, 1959). 일본 학계의 대세를 이루던 이들 주장은 6세기 전반 금석문의 발견으로 잘못임이 판명되었다(武田幸男, 1977). 세부 관등의 성립 문제에 있어서도 경위 제15관등 大烏 이하의 관등이 신라 통일 이후 사회 조직의 확충과 함께 신설되었다는 주장(井上秀雄, 1974)은 〈영천청제비 병진명〉(536)에서 ‘大烏第·小 烏第’가 확인됨으로써 무너졌다. 또한 진흥왕대에 大奈麻~吉士가, 진평왕대에 大烏~造位가 추가되었다는 견해는(三池賢一, 1970) 〈울진천전리서석 추명〉(이하 〈천전리서석 추명〉)(539)과 〈영천청제비 병진명〉의 발견으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적성비〉의 발견으로, 그동안 분분했던 신라 17관등제와 외위제가 늦어도 551년까지는 성립되었음이 밝혀졌다(李基東, 1978). 그후 〈봉평비〉와 〈냉수리비〉가 발견되면서 법흥왕대에 경외 관등제가 갖추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곧 변태섭은 나물마립간 때에 수 개의 고위 관등이 성립하기 시작하여 분화하고 다시 하위 관등이 생김으로써 법흥왕대에 17관등제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고(변태섭, 1956), 이기백도 520년에 반포한 율령 가운데 17관등제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이기백, 1990). 이에 학계 일반으로 17관등제의 성립을 법흥왕의 율령 반포로 보아 왔다(李基東, 1978 ; 노태돈, 1989 ; 선석열, 1990 ; 윤선태, 1993 ; 하일식, 2006 ; 전미희, 2000 ; 이기동, 2003). 한편으로 외위제에 대해서는, 법흥왕대에 17관등제가 완성되고 532~550년 또는 524~561년 무렵에 외위제가 완비되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주보돈은 京外 官等制의 성립 시기를 법흥왕 7년 율령 반포 시로 보았다가(주보돈, 1986 ; 주보돈, 1989), 〈봉평비〉·〈창녕비〉의 외위 관련 기사를 바탕으로, 신라가 가야 일부 세력을 병합한 532년 이후 550년에 이르는 사이에 干群 外位의 분화로 11관등의 외위제가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였다(주보돈, 1990). 한편 외위제 성립 시기를, 권덕영은 지증왕, 법흥왕대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권덕영, 1985), 하일식은 536년 이전~550년 무렵으로(하일식, 2006) 각각 이해하였다. 이에 노중국은 524~561년 무렵에 상위급 외위가 정비됨으로써 외위제가 완성된 것으로 보았으나(노중국, 1997), 다시 이를 수정하여 503~521년 사이에 경위 17관등과 외위 11관등이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노중국, 2010). 서의식은 외위를 지방관으로 나간 진골들에게 僚佐의 설치와 운용을 허용한 형태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법흥왕 25년(538) 外官의 ‘携家之任’ 조치 때에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서의식, 1999). 이러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냉수리비〉와 〈봉평비〉의 발견으로 왕경 여타 4부의 수장급이 ‘간지’를 칭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喙·沙喙의 관등이 왕경 여타 4부에 확대·관철되어 감으로써 신라의 관등제가 체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武田幸男, 1990). 더욱이 〈중성리비〉가 발견되고 〈봉평비〉의 ‘五干支’가 확인됨으로써 신라의 관등제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실 『양서』 신라전의 신라 관등 “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는 〈봉평비〉의 관등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양서』의 신라 관등명 가운데 ‘旱支’는 〈적성비〉 단계까지 ‘干支’로서 나타난다. 또한 ‘子賁旱支’는 『일본서기』 권9, 仲哀天皇 9년조의 ‘助富利智干’으로서 ‘京長’의 뜻인 伊罰干·角干·舒發翰·舒弗邯에 상응하며, 齊旱支는 ‘城長’의 뜻인 ‘잣한’으로서 ‘迊干·迊判’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양주동, 1965). ‘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는 각각 ‘아간지·일간지·거벌간지’로 보아 좋을 듯하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그렇다면 『양서』 신라전의 신라 관등 기사는 〈봉평비〉에 보이는 대나마 이하의 관등을 궐하고 〈봉평비〉에 보이지 않는 子賁旱支와 齊旱支를 기술한 것이 된다. 이에 『양서』 신라전 관등 기사는 梁 普通 2년(521) 법흥왕 때의 정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양서』의 5관등이나 같은 내용의 『남사』의 6관등에 대한 기록을 신라가 양에 사신을 보낸 보통 2년(법흥왕 8년, 521)의 상황을 전한 것으로 풀이하면서, 신라 17관등제가 이로부터 비롯하여 진평왕대에 성립하였다고 보거나(曾野壽彦, 1955), 법흥왕 율령 반포 시에 경위 17관등이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중국, 1997·2010). 그러나 〈봉평비〉에는 『양서』 신라전의 子賁旱支와 齊旱支에 상응하는 관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일식은 『양서』 신라전의 기록이 521년 당대의 정보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한계성으로 인하여 관등명을 모두 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하일식, 2000). 한편 『양서』 최후의 성립이 唐 初(629~636)의 일이기에 그 이전의 신라에 대한 지식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한다(末松保和, 1954 ; 李基東, 1984). 그러나 子賁旱支와 齊旱支 등의 관등은 〈천전리서석 추명〉(539)의 珎干支와 〈적성비〉(~551)의 伊干△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따라서 『양서』의 신라 관등은 진흥왕 10년(549) 양나라가 신라 입학승 覺德과 함께 사신을 보낼 무렵에 취득한 정보를 간략히 서술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튼 武田幸男은 〈봉평비〉의 干支를 꽤 상위의 경위 상당으로서 인정하면서도, 경위체계의 전개가 부마다 달랐고, 적어도 〈봉평비〉 단계에서 喙·沙喙部의 관등체계가 다른 부로 확대·관철되어 갔으며, 본피·잠탁부 2부에서는 아직 경위체계가 관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武田幸男, 1990). 이러한 武田幸男의 가설은 〈중성리비〉가 발견되면서 새롭게 부각되는 듯하다. 박남수는 신라 상고 말, 중고기 금석문을 비교 검토하면서, 喙·沙喙이 신라 정치사회를 주도하여 관등체계를 중심으로 왕경 여타 4부의 관등체계와 단일화함으로써, 법흥왕 7년 율령을 반포하면서 경위 13~14관등, 외위 5관등으로 정비하고, 다시 〈천전리서석 추명〉으로부터 〈적성비〉·〈창녕비〉에 이르는 단계에 경위 17관등과 외위 11관등을 완비한 것으로 보았다. 〈중성리비〉에서는 喙部·沙喙이 ‘[국왕(갈문왕)]-阿干支-壹干支-沙干支-居伐干支-奈麻’의 관등체계인 데 대해, 왕경 여타 4부는 ‘干支-壹伐’, 그리고 村의 경우 ‘干支-壹金知’ 체계인데, 이는 6부의 세력이 균등하였던 때의 ‘간지-일벌’ 체계가, 喙이 사로국의 국왕 출신부로 등장하면서 사탁부와 함께 ‘국왕-阿干支-壹干支-沙干支-居伐干支’ 체계로 분화하여 여타 왕경 4부의 ‘간지-일벌’ 체계와 공존하였고, 그 후 喙·沙喙은 새로이 지방세력자를 수용함으로써 ‘奈麻’의 관등을 첨설하여 〈중성리비〉·〈냉수리비〉와 같은 관등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 후 〈봉평비〉 단계에서는 干支群(五干支·干支-太阿干支-阿干支-一吉干支-居伐干支)과 奈麻群(大奈麻-奈麻), 帝智(之)群([邪足智 : (大)舍帝智?]-小舍帝智-吉之智-[(大)烏帝智]-小烏帝智)으로 나뉘었다가, 〈천전리서석 추명〉 무렵부터 〈적성비〉·〈창녕비〉 단계에 이르는 시기에 다시 干支群 가운데 상위의 ‘干支’가 ‘大一伐干-一伐干-一尺干-(迊干)-波珎干’으로 분화·첨설되었다. 이는 〈봉평비〉에서 촌주급 下干支 휘하의 외위를 ‘一伐-一尺-波旦’으로 구분한 데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기왕의 下干(支)에 上干을 더하고 ‘嶽干-述干-高干-貴干-選干’ 등의 상위급 촌주층이 첨설된 것과 흐름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그 후 관등 명칭의 변동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체제는 진흥왕대의 그것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신라 골품제의 형성 과정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탁·사탁은 저들의 신분적 질서에 바탕하여 6부와 지방세력을 아우르는 골품제와 관등제를 정비하였거니와,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의 신분 구분은 이미 마립간기에 정립되었고, 그것이 진골과 6~1두품으로 확대, 정비됨으로써 법흥왕의 율령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진흥왕대에 眞宗의 개념을 창출함으로써 6부 진골 귀족과 신분적 구별을 꾀하였고, 중고기를 통하여 김씨 왕족 내부에서 혼인 등으로 聖骨의 개념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박남수, 201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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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서는 관을 유자례라고 하며, 저고리[襦]를 위해(尉解), 바지[袴]를 가반(柯半), 신[靴]을 선(洗)이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주 028
번역주 028)
其拜及行與高驪相類 :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고구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풍속에 대하여는 대체로 『삼국지』와 『후한서』가 동일하다. 다만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跪拜申一脚, 與夫餘異, 行步皆走”라 하고,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跪拜曳一脚, 與夫餘異, 行步皆走”라 하여, ‘다리 하나를 편다’와 ‘다리 하나를 끈다’는 표현이 다를 뿐이다. 다만 양 사서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끄니] 부여와 같지 않으며,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고 하면서, 부여의 풍속과 다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서』는 『후한서』를, 『양사』, 『남사』에서는 『삼국지』를 따르고 있으나 ‘부여와 다르다’는 내용만 없을 뿐이다. 그런데 『수서』 고구려전에는 “풍속은 쪼그려 앉기를 좋아하며, 청결한 것을 즐긴다. 종종걸음 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기고, 절을 할 때는 한쪽 발을 끈다. 서 있을 적에는 反拱을 하고, 걸을 적에는 팔을 흔든다.”라고 하여 『삼국지』, 『후한서』 계열의 사서와 내용을 달리한다. 이에 대하여 『신당서』 신라전에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 앉아 손을 땅에 짚고 공손히 절한다.”라고 하여 기왕의 사서에서 고구려의 절하는 습속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가 본래 고구려와 달라서인지, 아니면 통일신라에 들어와서 습속이 변해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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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주 029
번역주 029)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이 기사는, 元帝가 처음 荊州刺史에 재임할 때(526~539)에 편찬한 『梁職貢圖』 行文의 기사와 거의 동일하다. 곧, 『양직공도』에는 “주변의 소국[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라고 하여, 520~530년대에 양나라는 斯羅(신라)를 백제 주변의 여러 小國과 함께 백제에 종속된 작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李弘稙, 1971). 이는 신라가 백제를 통하여 梁과 통교하였기 때문에 백제를 통한 신라 인식이 『양서』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李弘稙, 1971). 그러나 신라는 지증왕 1년(501)과 3년(503)에 각각 건립한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증왕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한문을 상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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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新羅 : ‘新羅’라는 국호가 확정된 것은 『삼국사기』 지증왕 4년(503)조의 “시조가 국가를 세운 이래로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못하여 혹은 斯羅, 斯盧로 칭하거나 혹은 新羅라고 일컬었습니다. 신들이 ‘新’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것으로, ‘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것으로 여겨, 이를 국호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한 데서, 지증왕 때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새로이 정해진 新羅라는 국호를 유교적인 이상적 국가관을 드러낸 것으로 보거나(文暻鉉, 1970), 지증왕을 전후한 신라 사회의 정치적 성숙도를 반영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申瀅植, 1977a). 특히 후자의 경우 신라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은 신라의 급격한 정치적 팽창을 의미하는데,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나 5세기 중에 세워진 〈충주고구려비〉(이하 〈충주비〉)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일찍부터 사용해오던 국호를 유교적 정치이념으로 수식한 것이 지증왕대 국호 제정 기사라고 보고 있다. 다만 우리 학계에 국가 형성 이론이 도입되면서, 伯濟와 百濟, 狗耶와 加耶, 구려와 고구려 등과 마찬가지로 성읍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 발돋움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경주 일대를 지칭한 徐羅伐·斯盧로부터 고대국가로서의 국호인 신라로 고정되었다고 보고 있다(千寬宇, 1975). 아무튼 신라의 국호는 6세기 이후에는 거의 新羅로만 쓰여진 듯하며, 奈勿王 26년(381)에 前秦에 사신을 보낸 사실은 있으나, 國號를 제정(지증왕 4년, 503)한 이후 최초로 중국과 교섭을 가진 것은 법흥왕 8년(521)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때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6세기 초엽 이후 辰韓 또는 新盧의 후신으로서 『梁書』에 新羅傳이 立傳된 것이라 하겠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 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네 가지의 견해로 나뉜다. 곧 신라는 중국 秦의 流亡人과 연결된 辰韓의 후예라는 것, 고구려계 殘民이라는 것, 그리고 弁韓의 후예, 연나라의 유망민이라는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三國志』 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이를 계승한 『후한서』·『梁書』·『晉書』·『南史』·『北史』 그리고 『翰苑』의 기록이며, 둘째는 『隋書』에서 毌丘儉의 침입 때 옥저로 피난했던 고구려의 殘留民이라고 한 설로, 『通典』·『文獻通考』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셋째는 신라를 弁韓의 후신으로 간주하는 『新·舊唐書』·『册府元龜』 등의 기록으로서 전자의 두 계통과는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다. 넷째는 최치원의 연나라 사람 망명설이다. 곧 연나라 사람이 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읍리의 이름을 沙涿(沙梁)·漸 涿(漸梁) 등으로 일컬었는데, 이들은 사도·점도 등으로 읽는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연나라 망명인이 진한을 세웠다고 하는 설은, 위만이 연나라 망명객으로서 위만조선을 세웠다가 한나라의 공격으로 남하하여 진한을 세웠다는 의미로 새겨진다. 이에 秦役을 피해서 한반도로 유입된 ‘古之亡人’은 넓은 의미의 衛氏朝鮮系 유민으로 보기도 한다(李賢惠, 1984 ; 丁仲煥 , 1962). 무엇보다도 한반도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거의가 철기를 반출하지 않는 청동기가 중심이 된 반면에 경상도 일대의 유물은 북방계의 영향과 철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양 지방 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현혜, 1984). 건국신화에 있어서도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반면, 신라는 그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趙芝薰, 1996). 무엇보다도 백제·신라의 왕을 비교할 때, 고구려와 백제의 왕은 주로 善射者나 强勇者임에 반해, 신라왕은 德望·智慧者임을 강조하고 있어 양국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申瀅植, 1984).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옛날 秦의 역(役)을 피하여 유망한 사람’이라는 기사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중국 유망인의 남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秦人의 한반도 남하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동시에 辰韓을 秦韓과 결부시킨 것은 중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는 북방 유민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마한의 동쪽을 지나왔을 것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馬韓의 부용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양서』의 경우, 秦人들이 秦의 役을 피하여 마한 땅에 이르러 그 동쪽에 거주함으로써 신라를 이루었다는 『삼국지』·『후한서』 등의 전승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수서』는 신라의 기원에 관하여 『삼국지』·『후한서』·『양서』 등과 그 사료의 계통을 달리하며, 『북사』에 보이는 신라의 기원에 관한 내용은 『양서』의 계통을 따르면서도 『수서』의 내용도 아울러 전재함으로써 두 계통의 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북사』는 신라의 관등을 비롯한 풍속·형정·물산 등에 관해서는 『수서』를 그대로 전재하고 있어, 『남사』의 내용이 『양서』를 그대로 따르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申瀅植, 1985a). 『수서』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옥저 지방에 피난한 고구려 사람들이 잔류하여 신라국을 세운 것으로 풀이하고, 이로써 신라가 강성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구당서』 신라전에서 신라를 “弁韓의 苗裔”라 한 것은 왕성인 金城 주위에 3,000명의 獅子隊를 배치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수서』의 기록에 새로이 추가한 것이다. 신라를 변한의 묘예라 한 것은 『당회요』에도 보이고 있어 10세기 무렵 중국인의 인식을 반영한다. 『당회요』의 경우 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수서』를 따르면서도 신라인의 계통에 대하여는 “弁韓之苗裔”라 하여 『양서』·『수서』와 달리 『구당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풍속·제도 등의 기사는 없고 진덕왕 때부터 會昌 원년까지의 조공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通典』은 ‘상태’의 기술과 조공 등 ‘사건’에 관한 기술이 혼합된 형태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先種이라 한 「진한전」에서는 辰韓의 기원을 ‘秦之亡人’에서 찾아 『삼국지』·『후한서』·『양서』의 계통을 따르고 있으나, 「신라전」에서는 신라의 기원을 위장 관구검의 침입으로 옥저 지방에 도망 온 고구려인들의 잔류로부터 찾고 있어 『수서』의 계통을 따르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법은 양무제 때의 기사를 『양서』에서, 수 문제 때의 기사를 『수서』에서 취하면서, 신라의 풍속·지방제·물산·관등 등의 내용도 해당 사료의 내용을 각각의 시기에 그대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각각의 사료를 그대로 편집한 것으로 여겨지거니와, 이는 杜佑가 『양서』나 『수서』에 나타난 풍속 등에 관한 기사를 각 시기의 특징적 사실로 이해했던 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通典』은 부견 때에 신라 사신 위두가 조공한 사실을 새로이 편입하고 貞觀 22년 김춘추가 조공한 사실을 추가하고 있는 것만이 기존의 사서와 다른 점이다(박남수,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03)
    秦韓 : 韓에는 3개의 종족 곧 마한, 진한, 변한이 있다고 서술한 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부터이다. 이에 대해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는 마한, 진한, 변진으로 서술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후한서』의 변진을 『晉書』와 『양서』에서는 모두 변한으로 서술하고 있다. 趙一淸은 『후한서』에서 ‘변진’이라 일컬은 것은 ‘변한’의 잘못으로 보았다. 청 말기의 학자 丁謙은 삼한 가운데 마한이 가장 커서 충청·전라 2도와 경상도의 반을 차지하고, 진한과 변한은 오직 경주 일대만을 차지하였을 뿐이며, 삼한이 분립하였다고 하나 실제로 변한과 진한 2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는데, 세력이나 힘에 있어서 마한에 대적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 위치에 대하여 진한은 북쪽에, 변한은 남쪽에 거처하고, 중간에 진한과 변한이 섞여 거처하므로 이를 합쳐서 변진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이들 변진 24국 가운데 弁辰을 관칭한 11개국은 변한의 소속이고, 나머지는 모두 진한에 속한다고 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脫解尼師今條에는 “辰韓阿珍浦口”라고 하여 辰韓이 해안에 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高麗史』를 비롯하여 『世宗實錄地理志』의 “경상도는 三韓 때에 辰韓이었는데, 삼국에 이르러 신라가 되었다.”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경상도는 본래 辰韓의 땅이었는데 후에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고 하였으며, 『八域志』에서는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인데, 경상도는 옛날 卞韓과 辰韓의 땅이다. ”라고 하였다. 그 뒤에 韓百謙의 『東國地理志』나 安鼎福의 『東史綱目』에서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李丙燾는 「三韓問題의 新考察」에서 辰韓의 위치를 한반도 중심부로 비정함으로써, 학계의 새로운 쟁점이 되었다. 이병도는 韓의 명칭이 朝鮮王 準이 남쪽으로 온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 사회 전체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보았다. 곧, 그는 辰의 동북계인 유이민 사회가 韓王 準 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이 ‘辰韓’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李丙燾, 1976). 이에 대하여 任昌淳과 金貞培는 이병도설을 반대하고 ‘진한=경상도설’을 옹호하였다(任昌淳, 1959 ; 金貞培, 1968). 한편 千寬宇는 신채호의 삼한이동설을 채용하면서 辰韓을 낙동강 이동으로, 弁韓을 낙동강 이서 지방에 정착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千寬宇, 1976a). 한편 『삼국사기』에는 초기 신라·백제의 강역을 벗어난 지역에서 양국 간의 전투 기사가 보이고 있어, 申采浩는 당시 한반도의 정황, 양국의 국세 및 兵勢 등에 비추어 『삼국사기』에 전하는 전투 기사에 상당한 의문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申采浩, 1983).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백제와 소백산맥 일대에서 상쟁한 주체를 신라로 보는 입장과 진한계로 보는 입장이 있었다. 전자는 申瀅植·申東河 등으로, 후자는 千寬宇·崔炳云 등으로 대표된다. 신형식은 그 전투 지역을 보은·옥천 일대로 비정하고, 이 지역의 철 생산 및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가 상쟁하였던 것으로 설명하였다(申瀅植, 1971 ; 申瀅植, 1983). 신동하는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유형을 구분하면서, 2~3세기경 소백산맥 일대에서 벌어진 나·제 간의 전투를 신라로부터 기왕의 지위를 인정받은 족장들에 의하여 수행된 것이라 하였다(申東河, 1979). 또한 천관우는 脫解대로부터 阿達羅대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나·제 간의 전투를 남하 중인 舊辰國=辰 韓系에 의한 對百濟戰으로, 이후 2~3세기경에 나타난 전투는 남하한 진한계가 석씨 왕계를 형성한 뒤에 북상하면서 나타난 것이라 하였다(千寬宇, 1976b). 최병운은 천관우와 거의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당시에 대백제전을 치룬 주체를 단순히 진한계라고만 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崔炳云, 1982). 그런데 이 시기 신라와 백제 간의 전투 지역이 소백산맥 일대의 중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과 비교할 때 크나큰 지리적·시간적인 공백이 있다는 점에 의문을 표하고, 후일 신라 김씨 왕족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는 영천(骨火小國)에도 미치지 못한 사로국의 국세로서 과연 의성 일대의 소문국을 정벌하여 이를 거점으로 백제와 장기간 성을 쌓고 교전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 그리고 초기 나·제 간의 전투가 대부분 백제의 선공으로 비롯되며 소위 ‘신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서 곤궁에 빠져 있었다는 점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특히 중국 사서에 신라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때가 동진 효무제 태원 2년(337)이며 그 개국의 시기가 晉·宋 교체기(356~402)라는 『翰苑』의 전승,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 신라 흘해이사금조에 “이 왕대(310~355)에 백제병이 처음으로 내침하였다.”는 기록, 『晉書』 辰韓조에 무제 태강 7년(286)까지 나타나는 辰韓의 조공 기사 등은, 나·제 간 이루어진 초기 전투 기사와 관련하여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자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신라 장수로 활약한 구도와 나음계의 세력으로, 이들 세력이 소위 백제라 하는 세력에 의하여 위축·남하함으로써 신라에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약했던 구도계의 김씨 부족이 석씨 왕족과 통혼함으로써 일시 연맹의 형태를 띠게 되나, 이후 신라 사회에서 김씨계가 형성한 정치적 기반과 군사력에 의하여 나물마립간이 즉위함으로써 신라가 고대국가의 단서를 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경주 일원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과정과 흐름을 같이하며, 후일에 신라 김씨 왕실을 구성한 구도계는 소백산맥 일대의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던 진한계가 신라 사회에 이주하여 형성한 족단이었다는 것이다(박남수,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04)
    秦韓 : 신라의 기원에 대한 네 가지 견해, 곧 秦유망인설, 고구려잔민설, 변한후예설, 연망명인설 가운데 秦유망인설에 따라 나타난 명칭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이후 『후한서』·『梁書』·『晉書』·『南史』·『北史』 그리고 『翰苑』에서 이를 따르고 있다. 또한 『양서』와 『宋書』 동이전, 倭조에서는 齊나라가 建元(479~482) 중 왜국왕에게 ‘使持節·都督 倭·新 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란 작호를 내린 것이나, 송나라 大明(457~464) 연간에 왜국왕이 스스로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고 일컬은 데서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칭호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임에 분명한데, 이러한 칭호를 요청하도록 왜왕에게 권유하는 한편 송나라에게 왜왕을 책봉해 주도록 요청한 나라는 송-백제-왜국으로 이어지는 군사동맹체제의 결성을 꾀하고 있었던 백제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金恩淑, 1997). 이 작호에 보이는 慕韓을 『滿洲源流考』에서는 마한의 별칭으로 풀이하는데, 5세기 중엽 백제·신라가 고대국가를 형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마한과 진한의 잔여 세력이 온전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백제와 마한, 신라와 진한, 그리고 임나와 가라의 중복 사실에 대한 왜나 송나라 측의 이해도 부족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때에 辰韓을 秦韓으로 일컬었던 것은 중국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 여겨진다. 더욱이 『梁職貢圖』 百濟國使조에는 백제의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하고, 언어는 중국을 참조한 것으로서 秦韓의 遺俗이라 하였거니와, 이 또한 辰韓을 秦의 유망민이 세운 것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보아 좋을 듯하다. 이와 같이 秦韓의 명칭은 진의 유망민이라는 전승 외에 진한의 언어가 마한과 다르고 중국 진나라 사람들과 유사하다는 『삼국지』·『후한서』 이래의 전승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양서』·『진서』·『남사』를 비롯하여 『책부원구』·『통전』은 모두 이를 따르고 있다. 다만 『양직공도』 百濟國使에서는 백제의 말이 중국을 참조하였으니 ‘秦韓’의 遺俗이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양직공도』에서도 진한의 언어를 秦人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한원』의 경우 옛날 유망민이 진나라의 전쟁을 피하여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하고, 秦韓의 명칭도 『齊書』의 왜국왕 책봉기사와 『위지』의 辰韓 별칭으로서의 秦韓을 인용하였을 뿐 대체로는 辰韓이라고 기술하였다. 『북사』의 경우 진한의 별칭 진한을 일컬으면서 진나라 때에 유망민이 전쟁을 피하여 왔는데 유망민이 秦人인 까닭에 진한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는 『후한서』의 진인유망민설과 최치원의 연나라유망민설을 함께 소개하였다. 아무튼 秦韓이라는 명칭은, 신라의 모체가 되는 진한의 기원을 秦人유망민설에 구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이후 중국 사서에서 辰韓의 별칭으로 일컬어졌고, 고려시대 최승로와 같은 이는 “진한(秦韓)의 옛 풍속으로 하여금 공자의 고향 노나라의 유풍을 알게 하고”(『고려사』 권3, 世家 3, 成宗 9년 12월 ; 권93, 列傳 권6, 諸臣, 최승로)라고 하였듯이 한반도의 총칭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居之以秦人 … 秦韓 : 『三國志』 東夷傳에 “古之亡人避秦役”이라 한 것을 『후한서』에서 “秦之亡人 避苦役”으로 고친 이후에 『晉書』·『梁書』·『南史』·『北史』와 『翰苑』에서 『후한서』의 내용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사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곧 『삼국지』에서는 “옛날 유망인들이 秦나라의 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그 언어에 있어서는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국가(國)를 나라(邦)라 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모두 무리(徒)라고 하는 것이 秦人과 비슷하다. 비단 燕·齊의 이름과 물건만이 아니라, ‘樂浪’人을 阿殘이라 이름하며, 東方人들이 나(我)를 아(阿)라 하고, 樂浪人을 본래 그 殘餘人이라 일컬으므로, 이제 秦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후한서』에서는 “秦나라의 유망인이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국가(國)를 나라(邦)라 이름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무리(徒)라고 하는 것이 秦語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달리 秦韓이라 이름한다.”고 기술하였다. 劉宋의 范曄(398~445)은 『후한서』에서, 晉나라 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서 秦韓 관련 내용에 심각한 비약을 하였던 것이다. 곧 『삼국지』의 “옛날 유망인들이 秦나라의 役을 피하여(古之亡人避秦役)” 부분에서 그 실체가 불분명한 ‘古之亡人’을 ‘秦人’으로 확정하였는데, 이는 뒤이어 나오는 ‘秦役’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秦役’의 성격을 ‘苦役’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온 이들이 秦人임을 다시 한 번 확정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수가 “진한의 언어가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함으로 인하여 『삼국지』가 편찬된 당시에 진한을 秦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것을, “진한의 언어가 秦語와 비슷하므로, 달리 秦韓이라 이름한다.”고 함으로써, ‘辰韓 사람들은 유망한 진나라 사람들로서 진나라와 비슷한 말을 쓰고, 그러므로 秦韓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라는 논리적 서술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후한서』의 잘못을 『진서』와 『양서』에서 그대로 따르게 되었고, 『太平寰宇記』와 『册府元龜』·『通典』 등에 그대로 전재되었던 것이다. 다만 『북사』의 경우 언어의 유사함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으나, 진한의 종족적 계통이 秦人이라 함으로써 『후한서』의 내용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후한서』의 진인유망설은 『삼국유사』에 『삼국지』가 아닌 『후한서』의 설로서 소개되어, 오늘날 신라의 기원에 대한 네 가지 설, 곧 秦流亡人설, 고구려잔민설, 변한후예설, 연망명인설 가운데, 중국 측 사서의 대종을 이루는 설로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6)
    其言語名物 … 不與馬韓同 : 신라(진한) 언어의 구체적인 내용, 곧 “국가(國)를 나라(邦)라 이름하고, 궁(弓)을 활(弧)이라 하며, 도적(賊)을 도둑(寇)이라 하고,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잔을 돌린다(行觴) 하며, 서로를 부르기를 무리(徒)라고 하는 것”은 『삼국지』 진한조의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 『양서』에서 이들 진한의 언어들이 “마한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삼국지』 진한조의 기사를 따른 것이고, “중국인과 비슷하다(有似中國人).”고 한 것은 『양서』의 찬술자인 唐 姚思廉의 독자적인 서술이다. 이는 『삼국지』나 『후한서』에서 “(진한의 언어가) 秦語와 비슷하다.”는 서술과는 분명히 다른 표현이다. 『북사』에서는, 『양서』에서 진한의 언어가 “중국인과 비슷하다(有似中國人).”고 서술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7)
    辰韓王 : 『진서』와 『북사』는 『양서』를 따라 ‘辰韓王’으로 서술하였으나, 『삼국지』·『통전』·『태평환우기』·『한원』에는 “辰王”으로 기술하였다. 한편 『후한서』에는 辰王을 “삼한을 모두 다스리는 辰國王”으로 기술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辰韓王 :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곧 ‘辰王’ 가운데서도 『삼국지』의 계통을 따르는 것(『통전』·『태평환우기』·『한원』)과 『후한서』의 계통을 따른 것이 있는 한편으로, 이들 양 계통과는 달리 ‘辰韓王’으로 표기한 계통(『양서』, 『진서』, 『북사』)이 있다. 먼저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서는, 韓에는 마한, 진한, 변한 3종이 있는데, “진한이란 옛 진국이다(辰韓者, 古之辰國也).”라 하고, 마한에 대해 서술하면서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辰王治月支國).”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동이전 변한조에서는 弁·辰韓은 모두 합하여 24국인데, “그 12국은 진왕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인으로써 삼아 대대로 서로 계승하게 한다. 진왕은 스스로 왕에 오르지 못하였다(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辰王, 不得自立爲王).”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옛날의 진국이 『삼국지』 찬술 당시에 진한으로 변하였고, 진왕은 마한 지역에 있는 월지국을 다스리며, 진한 12국은 그에게 예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마한조에서는 진왕이 마한 지역의 월지국을 다스리는 존재처럼 서술되었으나, 진한조에서는 진왕은 진한 12국 을 예속하지만 진왕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고, 마한인으로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대대로 승계하게 한다는 것이다. 『삼국지』에서 진왕이 다스린다는 월지국은 『翰苑』에 引用된 『魏略』에는 ‘自支國’, 『後漢書』 등에는 ‘目支國’, 『通志』에는 ‘月支國’으로 전한다. ‘月支’는 西域의 國名이므로, 『三國志』 韓傳 및 『通志』에서 ‘月支’라 한 것은, 후대 사람이 ‘月支’라는 이름에 익숙해져서 멋대로 고친 것이 아닌가 숙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는 『삼국지』의 ‘月支’나 『翰苑』의 ‘自支’는 글자 형태가 비슷한 데서 오는 오류로서, ‘目支’가 옳은 명칭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아무튼 『삼국지』의 ‘辰王治目支國’이라는 구절에서 目支國은 馬韓諸國 가운데서 영도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거니와, 그 位置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茶山 정약용의 「三韓總考」(『疆域考』)와 韓鎭書의 「地理考」(『海東繹史』)에서는 고조선의 準王이 남쪽으로 망명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는 釜山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고, 李丙燾는 직산 지방에(1976), 千寬宇는 인천에 각각 비정하였다(1979). 그러나 목지국을 『삼국지』 마한조에서 서술하였던 만큼 아무래도 그 위치를 진한 서쪽의 마한 지역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그 정확한 위치를 밝히기 위해서는 향후 지속적인 고고학적 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목지국을 다스렸다는 진왕에 대하여 천관우는 신라의 沾解王으로 보고 있다(1976a). 한편 『후한서』에도 『삼국지』와 동일한 辰王이 등장하지만, 그 성격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후한서』 한조에서는, ‘韓’에는 마한, 진한, 변진 3종이 있는데 모두 78국으로 옛날 辰國이라는 것이다. 진국에 대해서는 『史記』 朝鮮列傳에 ‘眞番旁辰國(혹은 衆國)’이라고 보이지만, 판본에 따라, 그리고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辰國, 衆國說로 구분된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魏略』에도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 그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000여 戶였다’고 하여 등장한다. 이들 자료에는 모두 辰國을 과거적인 존재로서 일컬었고, 辰王이 존재한 당시에는 이미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에 진국과 진왕은 쉽게 결부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후한서』에서는 삼한 가운데 마한이 가장 크고, 함께 그 종족(마한)을 세워 진왕으로 삼았는데, 목지국을 도읍으로 삼아 모든 삼한의 땅을 다스렸으며, 각 나라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인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왕 準이 위만에게 격파되자, 그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는데, 뒤에 준왕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辰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공통되는 부분은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렸으며, 마한인으로써 진왕을 삼아 대대로 승계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삼국지』에서 진왕은 진한 지역을 예속하였다고 한 데 대해, 『후한서』에서는 모든 삼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로써 『삼국지』의 기사를 따르게 될 경우 辰王은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통치자로 해석되지만, 『후한서』를 따른다면 삼한 전체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위치 지워진다. 학계 일반으로는 『후한서』 진왕의 경우 한국사의 역사발전단계에서 통일된 하나의 나라가 다시 78개의 소국의 분열되는 형세를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삼국지』의 기사대로 진왕을 목지국을 다스린 지배자 정도로 이해하고, 목지국이 마한 사회뿐만 아니라 주변의 진한 지역까지 통제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양서』를 비롯하여 『진서』와 『북사』에서는 변진 12국은 진한에 속하며, 진한은 항상 마한인으로 왕을 삼았다고 한다던가, 마한인으로써 진한왕을 삼는데 진한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였다 하고, 그것은 이들 진한인이 유망하여 옮겨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晉書』에서 ‘변진의 12국이 辰王에 속하였다.’ 하여 辰王을 辰韓과 연계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辰王’을 모두 ‘辰韓’으로 바꾸어 서술함으로써 문제의 소재를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어떠한 사서이든 간에 중국 측 기록에서는 마한이 진한을 통제하였다고 한 데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그것은 당시 한반도 내의 정치체들 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추세로 인정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진왕과 진한왕의 관계, 그리고 과연 진왕이 목지국에 거처하면서 진한 지역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은 향후 검토해야 할 과제이지만, 『진서』에서 변진 12국이 진한에 예속되고, 마한인의 통제를 받았다고 한 서술이 가장 합리적일 듯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 辰韓 12國의 구체적인 국명은 『삼국지』 東夷傳 진한·변진조에 보인다. 『삼국지』에는 辰韓(秦韓)에 처음 6국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弁辰에도 또한 12국이 있었다고 하였다. 『삼국지』 변진조에는 이들 진한 12국과 변진 12국을 일괄 서술하였는데, 접두어의 형태로 ‘弁辰’이 들어간 것은 변진 12국에 속하며, 그 밖의 소국의 이름 12개가 진한 12국인 셈이다. 이들 12국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그 위치를 달리 비정하는데(李丙燾, 1976 ; 千寬宇, 1976), 이는 대부분 언어학적인 방법에 따라 地名을 考證한 것으로서, 확실한 考古學的인 논증이나 뚜렷한 논거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新盧 : 이와 같이 전하는 기록은 『양서』 신라전을 비롯하여 『남사』, 『통전』, 『태평환우기』 신라전 등이다. 이들 기록에는 한결같이 ‘新盧’를 위나라 때에 일컫는 이름이라 하고 있어, 신라가 위나라에서 ‘신로’라고 알려져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다. ‘新羅’를 ‘新盧’라고 일컫는 것은 ‘斯羅’를 ‘斯盧’라 한 것과 같이, 고대의 음운에 ‘盧’와 ‘羅’가 서로 통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盧’와 ‘羅’는 다시 ‘良’과도 음이 통하여, 일본 측 기록에서는 “이때에 新良國의 왕이 공조 81척분을 바쳤다(此時 新良國主貢進御調八十一隻).”(『고사기』 권하)고 하여 신라를 ‘新良’이라고도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斯羅 : 이와 같이 전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중국 측의 기록, 곧 본 『양서』 신라전을 비롯하여 『양직공도』 백제조와 『남사』·『한원』, 『통전』, 『책부원구』 外臣部와 『태평환우기』 신라전에 보인다. 1989년에 발견된 〈냉수리비〉에는 “斯羅의 탁부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敎하시어(斯羅喙斯夫智王 乃智王此二王教)”라고 하여 지증왕 4년(503) 9월 25일 당시에 ‘斯羅’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냉수리비〉는 국가가 직접 세운 율령적 성격의 비인 까닭에 이때 사용한 국명은 신라의 공식 국호였음을 알 수 있다. 智證麻立干 4년 겨울 10월에 ‘新羅’라는 국호를 정하기 직전까지 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이 찬술한 〈雙溪寺眞鑑禪師塔碑〉(887) 비명에는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斯羅(신라)를 교화했네(猛探虎窟 遠泛鯨波 去傳秘印 來化斯羅).”라고 하여, 신라를 ‘斯羅’로 표현하였다. 일본 측 사료에도 ‘斯羅’라는 이름이 전한다. 『日本書紀』 권17, 繼體天皇 7년 11월 5일조에는 “朝庭에서 백제의 姐彌文貴 장군과 斯羅의 汶得至, 安羅의 辛已奚와 賁巴委佐, 伴跛의 旣殿奚와 竹汶至 등을 불러 놓고 恩勅을 선포하여 己汶과 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고 하여 백제·안라와 함께 斯羅가 등장하고, 같은 책 권19, 欽明天皇 15년(554) 12월조에는 “百濟가 下部의 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과 安羅에 있는 倭臣들, 任那 여러 나라의 旱岐들은 아룁니다. 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みやけ : 官家)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라고 하여 사라가 등장한다. 대체로 여기에 등장하는 ‘사라’를 신라로 이해하는데(최원식 외, 1994), 같은 책 권19, 欽明天皇 5년(554) 3월조의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 재건에 대한 사정을 보고하는 기사에는 “신라는 봄에 㖨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久禮山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安羅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斯羅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新羅春取㖨淳 仍擯出我久禮山戍 而遂有之 近安羅處 安羅耕種 近久禮山處 斯羅耕種 各自耕之 不相侵奪).”라고 하여 신라와 함께 斯羅가 등장한다. 이 기사에서 대부분 ‘신라’라고 명기하면서도 ‘斯羅’의 명칭이 오직 한 군데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오류일 가능성이 높지만, 추후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 가운데 『魏書』 권8 世宗 景明 3년(502)조와 『魏書』 永平 원년(508)조 조공 기사에 ‘斯羅’의 명칭이 보이는데, 이를 신라와 동일시하기도 하나(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이들이 疏勒·罽賓·婆羅捺·烏萇 등등 서역의 여러 나라와 함께 등장하고, 그 협주에도 함께 나온 나라들이 ‘史籍 西域傳’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였으며, 『삼국지』 권30, 동이전 30, 倭조에 大秦國을 설명하면서 “斯羅國은 안식에 속하며 大秦과 연접하여 있다.”고 한 바, 『魏書』 景明 3년(502)조와 永平 원년(508)조에 조공하였다는 斯羅는 서역의 사라국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斯羅’라는 명칭은 ‘신라’를 국호로 정하기 직전의 것으로서, ‘新羅’를 ‘新盧’라고 일컫듯이 ‘斯盧’라고도 하였다. ‘斯盧’라는 이름은 『양서』 신라전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 弁辰 12국의 하나로서 등장한다.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斯盧는 곧 신라인데, 음을 옮기면서 바뀐 것이다(斯盧, 卽新羅, 乃譯音之轉).”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진수의 견해를 따른다면 사로나 사라, 신라나 신로 등은 음역의 과정에서 나타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斯羅의 ‘斯’는 15세기의 ‘’로서 현대음의 ‘시’ 혹은 ‘사’, 羅는 ‘라’ 혹은 ‘로’ 또는 ‘루(luo)’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김영만, 1990). 『삼국지』에 斯盧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3세기 중엽 신라가 ‘사로국’으로 일컬어졌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2)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 이 구절은 『남사』 신라전에도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다만 『通典』 신라국조에는 “처음에는 新盧라 하고, 송나라 때에 新羅, 혹은 斯羅라고 하였다(初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 斯羅).”고 하여, 『양서』나 『남사』 신라전처럼 新盧를 위나라 때의 이름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太平寰宇記』 신라조에는 위나라 때의 新盧國이라 하였던 것이 신라국이 되었는데 달리 斯羅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하여, 『양서』 등의 사료와 서술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내용적으로 동일하게 구성되었다. 이들 중국 측 사서에서 신라의 국호를 열거한 것은 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徐耶伐 또는 徐羅伐, 雞林 등의 국호가 있었음을 전한다는 점에서 중국 측 사료와 차이가 있다. 곧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조에는 박혁거세가 개국하면서 국호를 徐耶伐이라 하였는데, 달리 斯羅, 斯盧, 新羅라고 일컬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박혁거세의 개국과 함께 국호를 徐羅伐 또는 徐伐이라 하고, 달리 斯羅 또는 斯盧라고도 하며, 또한 雞林國이라고도 일컫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계림이란 국호가 탈해왕 9년 금성 동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있어 시림에 가서 김알지를 얻게 되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의 국호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곧 박혁거세의 개국에 따른 서야벌(서라벌, 서벌), 그리고 탈해왕 9년 김알지를 얻은 설화로부터 계림국으로의 개명, 기림이사금 10년 신라의 국호로 되돌리는 변화가 있었다. 그 후 지증왕 4년(503) 10월 기림이사금 10년(307)에 회복한 국호 신라를 공식 국명으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수리비〉(503)에는 “斯羅의 탁부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敎하시어(斯羅喙斯夫智王 乃智王此二王教)”라고 하여 지증왕 4년(503) 9월 25일 당시에 ‘斯羅’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림이사금 때에 복고하였다는 ‘신라’는 ‘斯羅’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삼국유사』 왕력 光熈 정묘년(307)조에는 국호를 고쳤다고 하여 『삼국사기』 기림이사금 10년조의 기사와 동일하다. 다만 1512년에 간행된 규장각본(국보 306-2호)에는 “光熈丁夘年 是國号 曰斯羅 新者 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民 云 或系智證 法興之世”라고 하여, 당시의 국호가 ‘斯羅’였다고 하면서도, ‘新羅’ 의 명칭으로 그 의미를 풀이하고, 이 일이 혹설에는 지증왕 때의 일이라는 설을 부기하였다. 이는 ‘사라’로부터 그 음이 서로 비슷한 ‘신라’를 취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지증왕 때에 국왕호와 함께 국호의 의미를 한자식으로 풀이한 데 따른 것이었음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서기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나 5~6세기경에 세워진 〈충주비〉에는 신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나 사라가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연은 고려시대에 ‘京’을 ‘서벌’이라 훈독하는 것은 신라의 국호 ‘서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석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어학계에서는 오늘날 수도를 ‘서울’이라 일컬은 것이 ‘서벌’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韓鎭書는 그의 『海東繹史』에서 “東語 新曰斯伊 國曰羅”라 하여 새나라로 생각하였다. 梁柱東도 이에 따라 東方·東土로 간주하였다. 즉, 斯羅·新羅·斯盧·尸羅는 모두 의 借字로서 東方(東土)의 뜻으로 보고, 徐伐·鷄林·東京 등을 로 읽어 는 東·新·曙의 뜻으로, 은 光明國土로 보아 (徐那伐) 즉, 東川原으로 풀이하였다(1957). 또한 田蒙秀는 실애벌 즉, 谷川原(山谷의 나라)으로 보았으며(1940), 安在鴻은 실(谷)·시로(城)의 뜻으로 풀이하였다(1947). 李丙燾는 徐那伐·蘇伐의 뜻을 高·上·聖의 뜻으로 풀어 백제의 蘇夫里나 고구려의 수릿골과 같은 Capital의 의미로 파악하였다(1976). 趙芝薰의 경우도 의 뜻을 上國·高國·神國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1955). 이와 비슷한 주장은 李在秀에게서 계속되고 있다(1960). 그러나 末松保和는 이들 新盧·斯羅·新羅는 『晉書』 載記의 ‘薛羅’, 『삼국사기』의 徐耶(伐)·徐那(伐), 『삼국유사』의 徐羅(伐)의 對譯으로 이해하였다(末松保和, 1954). 또한 末松保和·今西龍 등은 을 金國 또는 鐵國으로 풀이하였거니와(末松保和, 1948 ; 今西龍, 1970), 일찍부터 신라는 金國의 나라로 中東에 알려진 바도 있었다(金定慰, 1977). 이에 대해 文暻鉉은 신라가 곧  혹은 의 音借 내지 訓借의 漢字同音同訓 異字로 보았다. 즉, 그는 徐那(羅)伐·斯(新)盧·尸羅는 音借이며 新羅·鷄林·鷄貴는 訓借로 생각하였다(1983). 다시 말해서 新字는 (시·쇠)란 原義를 갖고 있으니만치 란 黃金·鐵·銅의 뜻이며, 황금의 고귀하고 빛난(光輝) 속성으로부터 光明·東·新·高貴·寶物의 뜻으로 바뀐 것이며, 羅字는 那·耶와 같이 地·土·村·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奴·讓·那(고구려)·洛·耶(가라)와 같고, 伐은 新羅地名의 어미에 붙이는 것으로 光明·原·國을 의미하는 (불)로 音讀한 것으로 보았다(文暻鉉, 1983). 즉, 신라는 북방의 철기문화를 가진 민족(古朝鮮系)이 남하하여 金村()을 건설하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村名도 로, 그 支配族의 姓氏도 (金·昔)로 한 연후에 유교사상의 표현인 新羅로 雅化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문경현, 1983). 근래에 들어 주보돈은 ‘사로’ 또는 ‘사라’는 오늘날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범위의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대내적인 용도로, 신라는 사로를 포함하여 그에 예속된 다양한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뜻으로 주로 대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풀이하였다(주보돈, 1998).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정하면서 徐羅伐, 徐伐, 徐耶伐이라 하였고, 일연이 지적하였듯이 고려시대에 ‘京’을 ‘서벌’이라 훈독하는 것은 신라의 국호 ‘서벌’ 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徐羅伐, 徐伐, 徐耶伐은 모두 서벌을 음사하면서 나타난 이름이며, 사라나 신라 또한 비슷한 음가로서, 지증왕 때에 이르러 유교적 의미를 풀이하면서 신라를 공식 국호로 책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한편 신라의 음가로부터 비롯한 薛羅와 尸羅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薛羅는 『晉書』 권113, 載記 13, 苻堅전에 보인다. 곧 太元 4년 (379) 苻洛이 苻堅에 반기를 들어 거병하면서 ‘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에 사신을 보내어 징병을 하였다는 데서 고구려·백제와 함께 ‘薛羅’가 등장한다. 그런데 「海印寺 妙吉祥塔誌」(895)의 僧訓이 지은 「僧軍을 哭함(哭緇軍)」에는 “혼탁한 운세가 서쪽으로 와 薩羅에 이르러, 십 년 동안 억센 짐승들이 僧伽를 괴롭혔구나(濁數西來及薩羅, 十年狼豹困僧伽).” 라고 하여 ‘薩羅’가 보인다. 『진서』 부견전의 ‘薛羅’와 「海印寺 妙吉祥塔誌」의 ‘薩羅’는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薛羅’가 고구려·백제와 함께 언급되었고 「해인사 묘길상탑지」는 신라 말 혼탁한 신라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신라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申景濬(1712~1781)은 그의 유저 『頤齋遺藁』에서 『진서』 부견전의 薛羅를 신라라고 풀이하면서, “대개 신라는 처음에 서벌라라고 칭하였는데 서벌 두 글자가 합하면 ‘薛’음과 비슷하다. 또한 지금 서울 사람들은 內官이 관장하는 御膳을 薛里라고 하는데, 薛의 음가는 ‘셥’으로, ‘涉’의 소리와 같다. 또한 ‘서’와 ‘벌’ 초성 둘이 합한 것이니, ‘薛’의 遺語일 뿐이다(『頤齋遺藁』 권25, 雜著, 華音方言字義解).”라고 하였다. 오늘날 국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서라벌을 서벌라라고 한 것은 신경준의 오류임이 분명하나, 『진서』 부견전의 설라를 신라로 이해한 것은 옳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설라와 신라 또는 서라벌의 음운학적 관계에 대하여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양자 간의 음가가 비슷하므로 신라를 설라라고도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를 尸羅라고 일컫기도 하였는데, 이 명칭은 최치원의 「新羅迦耶山海印寺結界塲記」에 나타난다. 곧 “국호 시라는 실로 바라제가 불법을 일으킨 곳이고, 산이름을 가야라고 일컬은 것은 석가모니불이 불도를 이룬 곳이다(『東文選』 권64, 記, 新羅迦耶山海印寺結界塲記).”라고 하여, 신라를 ‘尸羅’라고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름은 『제왕운기』에도 등장하는데, 본래 尸羅는 범어(梵語) śīla, 즉 쉬일라의 음역으로, 身·口·意 三業의 죄악을 방지한다는 뜻을 지니며, 보통 戒 혹은 律을 가리키는데, 시라의 땅이란 신라를 가리키는 동시에, ‘戒行이 청정한 땅’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최치원은 범어의 시라가 신라와 음이 서로 통하고 신라의 불교가 융성한 점을 들어 계행이 청정한 신라라는 의미로 그 음가를 빌어 신라를 尸羅라고 일컫지 않았을까 한다. 말하자면 시라는 불교용어 가운데 신라와 음가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차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鷄林은 신라 전 시기에 걸쳐 두루 사용된 것으로서 탈해이사금대 김알지를 발견한 것을 기념해서 붙여졌고, 신라 왕통을 줄곧 김씨가 장악하였던 만큼 ‘신라’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후에도 별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3)
    募秦 : 양 武帝 普通 2년(521)은 신라 법흥왕 21년이다. 당시 신라왕을 募秦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 대하여, 『북제서』 권7, 世祖武成記에는 “河淸 4年(진흥왕 25년, 565) 2월 甲寅에 新羅國王 金眞興을 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는 조칙을 내렸다.”고 하여 진흥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 왕실에서 김씨 성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봉평비〉(524)에는 법흥왕을 “另卽知寐錦王”이라 칭하였고, 〈울주천전리서석 추명〉(법흥왕 26, 539)에는 “另卽知太王”이라 일컬었다. 이는 본 『양서』 신라전(중화서국 「王姓募名秦」)에서 법흥왕의 성이 募이고, 이름을 秦이라 한 것이(남감본·무영전본 「王名募泰」, 급고각본·백 납본 「王募名秦」), 법흥왕의 이름 另卽知를 지칭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지금까지 신라에서 성씨의 출현은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格을 중국식으로 수식하고 대내적으로는 중국의 칭성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피지배층에 대한 권위를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申東河, 1979). 따라서 상고 신라의 성씨는 혼돈된 계보관념에 의해 후대에 소급하여 추가 윤색한 결과로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동일 인물에게 명명된 성씨가 김씨 혹은 박씨로서 각 사서 또는 동일 사서에조차 혼돈된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에서 朴提上으로 되었던 것이 『삼국유사』에는 金提上으로, 『삼국사기』에서도 昔利音(奈音)을 葛文王 朴奈音으로, 許婁葛文王 또한 朴氏 또는 金氏로 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박남수, 1987). 최근에는 박 또는 김의 두 가지 성씨의 전승은 일본 씨성제도, 곧 일본 고대사회에서 우지(氏)가 씨족이라 擬制하면서도 실은 제사·거주지·관직 등을 통해서 결합된 정치적 집단을 의미하는 것에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곧 ‘朴’提上의 전승은 파사이사금 때에 제상의 祖先 출신 지역인 栗浦 지역이 (박)아도갈문왕에 의하여 신라에 귀속되어 혈연적으로 의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제사·거주지·관직 등을 통해서 정치집단화되었던 것을 반영하며, ‘김’제상의 전승은 눌지왕 때에 왕제 귀환을 위해 제상이 왕경에 징발되면서 나마의 관등을 받아 김씨 왕족의 탁부 내지 사탁부에 소속되어 새로이 김씨와 의제 혈연 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박남수, 2019). 한편 『翰苑』 권30, 藩夷部 新羅國조에는 『括地志』의 “신라왕은 姓이 김씨인데 그 선조의 所出은 자세하지 않다.”는 기사를 인용하고, 아울러 『隋東藩風俗記』의 “金姓이 서로 계승한 지 30여 代에 이른다.”는 기사를 함께 실었다. 이에 대해 『通典』 권185, 邊防 1, 東夷 上, 신라국조에는 “신라 왕의 성은 金이고 이름은 眞平이다.”라 하고 이에 주석하여 『한원』과 동일하게 『수동번풍속기』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이에 대해 『동번풍속기』는 수나라 때(581~618)의 것이므로 신라 26대 진평왕대(579~632)의 정황을 기록했을 것으로 확언하고, 진평왕을 30여 대째의 김씨 왕이라고 『동번풍속기』에 전하는 사실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李基東, 1979a). 한편 『동번풍속기』 기사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약했던 仇道系가 경주 지역에 들어와 석씨 왕족과 통혼하여 연맹을 이루다가, 김씨 족단의 정치적 기반과 군사력에 의하여 나물마립간이 즉위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과정은 경주 일원에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과정과 흐름을 같이하므로, 지금까지 경주 토착세력으로 보아왔던 김씨계를, 소백산맥 일대의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던 辰韓系가 신라 사회에 이주하여 형성한 족단으로 파악함으로써 『수동번풍속기』의 “金姓이 서로 계승한 지 30여 代에 이른다.”는 기사에 대한 풀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박남수, 1987).바로가기
  • 번역주 014)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 신라가 최초로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普通 2年(521)은 법흥왕 8년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도 “遣使於梁貢方物”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처럼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나물왕 26년(381) 前秦과 通交한 이후 140년만의 일이다. 이는 『梁職貢圖』 백제사신조의 행문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양직공도』는 양나라 元帝가 처음 荊州刺史에 재임할 때(526~539)에 편찬한 것으로서, 양나라 때의 신라관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곧 이 행문에는 “[백제] 주변의 소국[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 등이 부용하였다.”라고 하여, 520~530년대에 양나라는 斯羅(신라)를 백제 주변의 여러 소국과 함께 백제에 종속된 작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李弘稙, 1971). 이에 대해 末松保和는 『양서』 신라전이 원칙적으로 梁代(502~557)에 신라와 통교하면서 얻어진 當代의 상태만을 기록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 완성 시기가 당나라 초엽(629~636)인 까닭에 그간의 신라에 대한 지식도 추가되었을 것으로 전제하고, 陳代 11년간 4회의 사신 왕래를 통하여 『양서』 신라전의 기본 자료를 취했을 것으로 짐작했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대체로 『양직공도』 백제사신조의 행문은 『양서』 신라전에 보이듯이 신라가 백제를 통하여 梁과 통교할 수 있었던 때문으로 보며, 나아가 『양서』에 나타난 신라의 사정도 백제를 통하여 인식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사실과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李弘稙, 1971). 나아가 6세기 초엽 신라의 성장과 외교적 진출은 어느 정도 백제와 대등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무령왕 12년(512) 백제가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을 살필 수 있지만, 521년(무령왕 21)에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법흥왕대에 신라가 양나라에 사신을 백제 사신에게 딸려 보냈다는 『양서』의 기록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사실 末松의 견해대로 『양서』 신라전이 6세기 중엽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법흥왕·진흥왕 때의 가야 정벌 기사인 듯한 『수서』 신라전의 “그 선대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는데 후에 백제가 고구려를 정복함으로 인하여 고구려인이 戎役(전쟁)을 감내하지 못하고 서로 귀부하여 드디어 강성하게 되었다. 인하여 백제를 습격하여 迦羅國을 부용하였다.”는 내용이나,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5년조의 喪服法 규정인 듯한 상복제, 법흥왕 8년(520)에 정비된 관등제도 이미 『양서』에 소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양서』 신라전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므로 관등의 규정이나 문자 등에 있어서 오히려 신라 중고기 이전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梁職貢圖』에 나타나듯이 梁나라가 當代 신라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하며, 신라를 백제에 붙어 있는 소국으로 인식한 梁나라 史官들이 자신들의 國史를 편찬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서』를 찬술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李弘稙, 1971). 곧 姚察이 隋 開皇 9년(589) 梁代의 國史를 바탕으로 『양서』를 찬술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姚思廉이 家傳의 옛 원고를 바탕으로 『양서』를 완성하였으므로, 양나라 때의 신라관이 『양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라 하겠다(박남수, 1992). 이기동은 보통 21년에 양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하고, 그 이후 신라가 양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던 것은, 백제가 양에 대하여 동맹국인 신라를 마치 자국에 의부하는 작은 나라라고 선전하고 한편 양나라가 이를 그대로 잘못 믿었던 데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신라가 단 1회에 걸쳐 사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양나라가 신라 유학승 覺德의 귀국편에 沈湖를 사신으로 보내 불사리와 향을 보내어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게 된 배경에는 양나라와의 관계가 일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논단한 바 있다(이기동, 2014). 바로가기
  • 번역주 015)
    健牟羅 : 『新唐書』에서는 侵牟羅로 표기했다. 健은 ‘크다(大)’의 뜻이며, 牟羅는 ‘모르·마을’의 뜻으로 ‘큰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侵(강제로 빼앗은)牟羅의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李丙燾는 原始集會所로서의 都廳·公廳·茅亭 등에 대한 해설로 그 기원을 추출하고 있다(1976). 그리하여 健牟羅는 큰모르(大村·大邑)의 字音인 바, 〈광개토왕릉비〉의 牟盧·牟婁도 같은 뜻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을’이 집회소 또는 공동체(촌락)인 것이며 슬라브족의 Mir, 영국의 Folk-mote, 게르만족의 Mark, 東濊의 읍락 등을 같은 내용으로 보았다. 따라서 健牟羅는 촌락공동체인 동시에 촌락집회소의 의미이며, 우리말의 두레와도 흡사한 것인데, 을은 정치적으로 변천하여 南堂과 같은 제도로 발전하였으며, 두레는 사회적으로 노동·예배·도의·유희 등으로 발전하였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그러나 여기서 건모라는 그러한 원초적인 뜻보다 처음에는 큰 마을(邑落) 또는 성(촌락공동체)의 뜻이었지만, 점차 왕성(王都)의 의미로 변화된 듯하다. 따라서 신라의 모체가 된 斯盧가 원래는 작은 村 또는 城에 불과했기 때문에 건모라라 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오늘의 경주로 보아도 무방한 듯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啄 : ‘啄’은 喙·涿·梁과 함께 쓰인다. 『양서』 급고각본에는 啄, 남감본, 무영전본, 백납본, 중화서국본에는 ‘ ’으로 되어 있다. ‘ ’는 『龍龕手鑑』에 따르면 ‘啄’의 이체자이다(中華民國 敎育部 國語推行委員會, 2004, 『異體字字典』, dict.variants.moe.edu. tw 참조). 중고기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중성리비〉(501)와 〈냉수리비〉(503), 〈봉평비〉(52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독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삼국유사』 진한조에는 “최치원이 이르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온 자들이므로 탁수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점탁 등으로 불렀다.’ 고 하였다(又崔致逺云 辰韓夲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 漸涿等).” 하고, 다시 주석하여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자를 읽을 때 발음을 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沙梁이라 쓰고, 梁을 또한 道라고 읽는다(羅人方言讀涿音爲道 今或作沙梁 梁 亦讀道).”고 하였다. 이 금석문에 나타난 글자는 대체로 최치원의 말대로 ‘돌’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은데, ‘울돌목’을 ‘鳴梁’이라고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양주동은, 진흥왕비에는 梁·沙梁을 㖨·沙㖨으로, 『일본서기』 흠명천황 2년조에는 梁을 㖨으로 기술하였음을 밝히고, ‘梁·㖨·涿’ 내지 ‘吐·隄’ 등 자의 원어는 ‘터(基)’이므로 ‘沙梁·沙㖨’은 ‘새터’이나 옛 음은 氣音을 피하므로 ‘도’로 발음된 것이라고 하였다(양주동, 1965). 이에 대해 노태돈은, 喙(훼)는 새의 부리를 뜻하는 글자로서, 이는 古所夫里·古良夫里의 夫里나 신라의 徐羅伐·比子伐의 伐과 같은 것으로 ‘벌’ 또는 ‘’로 읽혔을 것이고 들(野)을 뜻한다고 보고, 훼 또는 啄·涿·梁이란 글자는 어떤 집단이 도랑이나 들을 끼고 있었던 데에서 연유하여 붙인 이름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盧泰敦, 1975). 이우태는 이 글자들은 아마 ‘돌’ 또는 ‘’이나 ‘벌’ 또는 ‘’로 읽혀졌을 것으로 보고, ‘돌’이나 ‘’은 도랑(小川)의 뜻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도랑의 고어가 ‘돌’ 또는 ‘’로 다리(橋)나 뚝(堰)의 뜻도 가지고 있었으며, 한자로는 흔히 ‘梁’을 사용하였는데, 이 ‘양’이 ‘돌’로 읽혔음은 ‘울돌목’을 ‘鳴梁’이라고 쓴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라의 6부 명칭 가운데는 이러한 梁이 붙지 않는 漢祇部 등이 있으나 안압지 출토 비편에 ‘漢只伐部’라고 되어 있어 원래는 어떤 들(伐)의 집단이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의 6부는 어떤 川邊의 집단 또는 들(野)의 집단이었던 것이라 하였다(1997). 김영만은 신라 6부명에 보이는 ‘喙’, ‘梁’, ‘涿’은 우리말 고유 지명을 차자 표기한 것으로서, ‘梁’은 훈차 표기, ‘喙’, ‘涿’은 음차 표기한 것으로 보았다. 곧 ‘喙’는 ‘啄’의 同字 또는 이체자로 보아야 하며, ‘喙’, ‘涿’, ‘啄’은 모두 ‘*돍’을 음차 표기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押梁小國의 ‘梁’을 ‘督’이라 한 데서, ‘돍’을 ‘督’으로 음차 표기한 사례를 살필 수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하고, 『삼국유사』에서 ‘梁’의 음을 ‘道’라고 한 것은 ‘돍’에서 종성을 생략한 표기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2007). 바로가기
  • 번역주 017)
    啄評 : 『양서』 신라전에 보이는 ‘啄評’에 대하여 기왕에는 6세기 중엽 신라 왕성의 畿內 6停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末松保和, 1954), 〈중성리비〉에서 ‘啄評’이라는 용례가 확인되었다. 이로써 ‘部’라는 한자식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에 ‘부’를 대신하여 ‘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곧 6부 가운데 喙, 沙喙 외의 4부는 ‘部’와 동일한 의미의 ‘喙’을 사용하였는데, 그 후 喙이 탈락하여 잠탁부, 본피부 등으로 일컬었다는 주장이다(李文基, 2009 ; 전덕재, 2009). 또한 〈중성리비〉 단계의 6부는 6‘喙評’ 곧 喙, 評, 喙評으로 일컬었는데, 部名이 〈중성리비〉 단계의 喙으로부터 시작하여 524년 〈봉평비〉 이전에 6喙評으로 확산, 정착되었고, 〈봉평비〉에서 ‘六部’로 거듭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이용현, 2010). 사실 〈중성리비〉에 보이는 ‘喙評’은 뒤이어 나오는 爭人들이 모두 6부 관련 지명을 칭하였다는 점에서 喙 출신임을 밝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喙評’이 ‘喙’과 관련된 명칭임을 시사한다. ‘喙評’의 ‘評’은 『日本書紀』 繼體天皇 24년(530)조에 “背評은 地名으로 또한 能備己富里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여 ‘富里’로 일컬었다. ‘富里’는 ‘發, 夫餘, 夫里, 伐, 不, 弗, 沸’ 내지 ‘平, 坪’, ‘火, 列’에 상응하는 ‘原, 野’를 뜻하는 ‘’의 음차로서, ‘’의 ‘’에 상응한다(梁柱東, 1965). 〈중성리비〉에 보이는 ‘喙部’의 ‘部’가 한자식 표현이고, 신라의 왕경을 ‘健牟羅’ 곧 ‘큰마을’이라 했듯이 6부 또한 순수한 우리말로 일컬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터’를 뜻하는 ‘도’, ‘들·벌판’ 을 뜻하는 ‘伐·評’ 등이 적절해 보인다. 이에 ‘喙評’은 점량부를 牟旵伐, 한지부를 金評이라 일컬었듯이, 喙을 지칭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중성리비〉에 등장하는 ‘喙評公’은 고구려 고국천왕 12년(190) 沛者 於㫒留와 함께 난을 일으켰던 左可慮의 직임 評者에 상응하는 직임이 아닐까 추측된다. 일찍이 部內部說을 주장하는 논자들 중에는 부내부 집단의 명칭을 ‘評’이라 하지 않았을까 추론하기도 하였다(노태돈, 1975). 이에 〈중성리비〉의 ‘喙評’은 6부 ‘喙’의 전신 명칭으로 인정되는 바, ‘評’은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명으로서 후일 한자어 ‘部’로 바뀜으로써 ‘喙部’가 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左可慮의 직임 評者는 바로 이들 지역을 관장하는 자이며, 〈중성리비〉의 喙評公 또한 그에 상응한 직임이 아닐까 한다. 이에 『양서』 신라전의 6탁평은 국왕 출신지인 ‘喙評’의 명칭으로써 6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삼은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나타난 6부의 명칭을 6~7세기 금석문의 표기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br〉다음 표에서 살필 수 있듯이 ‘喙部’는 본래의 이름 ‘喙評’에서 ‘評’을 한자식 표현 ‘部’로 전환함으로써 나타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중성리비〉의 喙部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단위체로서의 한자식 명칭인 6部의 단초를 여는 이름이며, 이러한 명칭이 〈냉수리비〉에서 喙으로만 등장하고 部가 보이지 않는 것은 沙喙 출신 지도로갈문왕이 즉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봉평비〉에서 6부가 모두 ‘部’를 칭하였던 것은 율령의 반포로 관등제가 정비되면서 6부 또한 행정단위체로서 정비된 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전히 ‘喙’ 출신 귀족들이 등장한 것은 아직 왕권이 그 출신지인 ‘喙’을 벗어버리지 못한 단계에서, 본피부·잠탁부의 ‘간지’와 마찬가지로 ‘喙’ 출신 귀족들의 독자성 곧 ‘喙’의 족적 기반의 전통을 인정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단양신라적성비〉(이하 〈적성비〉) 단계에서 국왕은 더 이상 출신부를 칭하지 않게 되었거니와, 이제 6부가 명실상부한 행정단위체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진흥왕순수비〉에서는 비에 따라 각각 ‘部’를 생략하든지 칭하든지 하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部’를 칭하던 칭하지 않던 간에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박남수, 2010a).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초기국가론에 뒤이어 이른바 ‘부체제’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이는 〈냉수리비〉와 〈봉평비〉, 그리고 최근 〈중성리비〉의 발견으로 과속화된 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읍락국가로부터 귀족국가로 넘어가는 4~6세기의 과도기 단계를 ‘부체제’로 설정함으로써 나름대로 우리 고대국가의 발전 단계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더라도 용어상 일관성을 결여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주보돈, 2006). 그 뿐만 아니라 2009년 〈중성리비〉의 발견으로 신라에서 ‘부’의 생성이 〈중성리비〉를 건립한 501년에서 멀지 않다는 점에서 새로 검토할 단계에 와 있지 않은가 한다.
    [ 금석문에 나타난 신라 6부명 표기 변천(박남수, 2013 재인용)]〈img〉04-0001〈/img〉바로가기
  • 번역주 018)
    六啄評 : 나라 안에 있다는 6개의 啄評이란, 중국의 군현에 비견되는 외읍에 대응하는 내읍의 구획명을 지칭하므로, 健牟羅(王都·王城) 안에 있는 6개의 행정구역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末松保和는 6啄評을 王都周邊의 6停, 곧 地方軍團의 6停[大幢·貴幢(上州停)·漢山停·牛首停·河西停·完山停]과는 별개로 王都 부근(畿內)에 따로 東畿停·南畿停·中畿停·西畿停·北畿停·莫耶停 등 畿內 6停으로 생각하였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6과 52의 숫자가 하나는 王都를 지키는 군단의 수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신라의 郡縣數라고 할 때, 오히려 6탁평이란 신라의 왕도 6부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중성리비〉에서 ‘喙部, 喙’과 함께 ‘喙評’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喙部만을 ‘部’로 기재한 것은 국왕 통치체제 안에서 6부를 가장 일찍 정비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문기, 2009 ; 김희만, 2009)와 喙部가 가장 우세한 부이기 때문이라는 견해(이영호, 2009)가 있다. 또한 〈중성리비〉의 ‘喙評公斯弥’에 대해서는 ‘喙評의 公斯弥’(전덕재, 2009) 또는 ‘喙의 評公과 斯弥’(강종훈, 2009 ; 김희만, 2009)라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 〈중성리비〉에 보이는 “牟旵伐喙斯利壹伐皮朱智 夲彼喙柴干支弗乃壹伐”에 대하여, 『양서』 신라전 6탁평 기사를 원용하여 ‘牟旵伐喙’, ‘夲波(彼)喙’ 등으로 석독하기도 한다. 당시에 6부 가운데 喙, 沙喙 외의 4부는 ‘部’와 동일한 의미의 ‘喙’ 을 사용하였는데, 그 후 ‘喙’이 탈락하여 잠탁부, 본피부 등으로 일컬었다는 주장이다(이문기, 2009 ; 전덕재, 2009). 또한 〈중성리비〉 단계의 6부는 6‘喙評’으로서 喙, 評, 喙評의 사례로 볼 때에 部名이 〈중성리비〉 단계의 喙으로부터 시작하여 524년 〈봉평비〉 이전에 6喙評으로 확산, 정착되었고, 〈봉평비〉에서 ‘六部’로 거듭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이용현, 2010). 또 한편으로 ‘牟旵伐喙’으로 읽을 경우 〈중성리비〉의 해당 비문 뒤의 인물들이 爭人이 될 텐데도 전혀 무관한 것처럼 나오고 있어 앞뒤 맥락에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고, ‘牟旵伐’을 인명으로 이해하여 ‘喙’과 나누어 보기도 하였다(강종훈, 2009). 또한 ‘本波喙柴干支’의 경우 〈냉수리비〉에는 왜 ‘本波喙’이나 ‘本波喙部’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함을 지적하기도 한다(강종훈, 2009 ; 주보돈, 2010). 나아가 牟旦旵伐喙과 마찬가지로 本牟子喙도 붙여볼 여지가 없을까 하는 견해가 표출되기도 하였다(주보돈, 2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牟旦伐喙’, ‘本波(彼)喙’說은 〈중성리비〉 단계에서 京外 수장급들이 이름자에 즐겨 사용하던 ‘喙’을 部名의 일부로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서, 이사금시대에 6부가 이미 성립되었다는 설을 보강하기 위해 부회한 착상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한다(주보돈, 2010). 사실 노태돈은 일찍이 部內部를 ‘評’이라 일컫다가 병합 과정을 거쳐 나중에 남은 것이 ‘6喙評’이 되고, 그것이 다시 ‘6部’로 변모한다는 가설(노태돈, 1975)을 제시한 바 있는데,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논리를 부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여러 연구자들이 두 차례 등장한다는 ‘牟旦伐’은 ‘牟旦旵’이 분명하고, 두 번째 등장한다는 ‘牟旦伐’이란 ‘至且(旦)代喙’의 誤讀이며, 중고기 금석문에서 이름의 돌림자로 ‘斯利’와 함께 ‘沙利’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에 〈중성리비〉 건립 당시에 이름자에 ‘喙’을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고, ‘喙評’의 ‘評’은 金評과 마찬가지로 탁부의 본래 거주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박남수, 2010b). 이처럼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6부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추동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석독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중성리비〉가 지니는 연구사적 폭발력은 기왕에 추정에 불과하던 국왕과 갈문왕의 출신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중고기 왕권을 장악해갔는가를 가름할 핵심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五十二邑勒 : 『太平御覽』 권781, 四夷部 所引에는 “그 邑으로 서울에 있는 것은 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邑勒이라 하는데 또한 중국의 군현을 말한다. 나라에는 6家 탁평과 52읍의 읍륵이 있다(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家啄評·五十二邑邑勒).”고 되어 있다. 『舊唐書』 東夷列傳 新羅조에는 “[신라에는] 성읍과 촌락이 있는데, 왕이 거하는 곳은 금성으로 주위가 7~8리가 되며 위병 3,000명이 있어 獅子隊를 설치하였다(有城邑村落. 王之所居曰金城, 周七八里. 衛兵三千人, 設獅子隊).”고 하여, 『五代會要』나 『册府元龜』에서는 『구당서』의 기사를 따르고 있다. 『양서』의 본 기사에서 啄評은 健牢羅(王都·王城) 안에 있는 6개의 內邑을 말하고 外邑을 邑勒이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중국의 郡縣에 비교하고 있으므로, 啄評과 邑勒은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6啄評과 52邑勒이 內·外邑으로서 대칭을 이루고 일정한 수효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하여, 일찍이 末松保和는 6啄評을 王都周邊의 6停(地方軍事制度로서의 6停과는 다르다)으로 비정하고, 52읍륵을 신라의 군현수로 비정하였다. 특히 탁평이란 地方軍團의 6停[大幢·貴幢(上州停)·漢山停·牛首停·河西停·完山停]이 아니라 王都 부근(畿內)에 있었던 東畿停·南畿停·中畿停·西畿停·北畿停·莫耶停 등의 6정으로서, 畿內 6停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52邑勒은 대략 6세기 중엽의 현실을 바탕으로 尙州·良州·廣州 등 37郡과 漢城地域 및 東北海岸地方을 포함한 수치로서 파악하였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양서』의 편찬자가 수도인 건모라를 언급하고 서울에 6탁평이, 그리고 지방에 52읍륵을 언급하면서 이를 중국의 군현에 비교하였다면, 6탁평은 〈봉평비〉에서 언급한 신라 6부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하며, 이에 대응하여 52읍륵이란 지방행정단위로서의 州郡을 지칭한다고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五穀 : 五穀은 주로 북방에서 재배되던 보리·밀·기장 등을 지칭하였다. 여기서의 5穀에는 三韓時代 이래 稻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쌀이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農桑을 권장하거나 제방을 축조한 기사 등은 신라 사회에 일찍부터 농업을 중시하고 稻作이 행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多桑麻 : 뽕나무의 경우는 「신라촌락문서」에서 보듯이 沙害漸村은 1,004그루, 薩下知村은 1,280그루, 失名村은 730그루, 그리고 西原京 부근의 失名村은 1,235그루를 재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찍부터 뽕나무를 재배하여 의복의 개발이나 調의 징수를 위한 것이었다고 풀이된다. 진한 지역의 뽕나무와 누에치기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9년(32)조에는 국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이를 둘로 나누어 王女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고 붕당을 만들어,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이 大部의 뜰에 모여 麻로써 길쌈을 하였다는 嘉俳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공동작업으로 마포를 만드는 길쌈놀이가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양서』 신라전에서 麻의 생산을 일컬은 것은 신라에서의 모시 등을 생산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사실 신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한 이후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궁중수공업장에서 생산한 비단류와 삼베를 조공하였다. 이로 미루어 각 시기별 직물 생산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거니와, 5·6세기 무렵의 絹·帛·細布류, 7세기 무렵의 金總布·錦·金帛·綾·雜彩류를 비롯하여 20升布·30승포·40승포, 8세기 무렵 朝霞紬·魚霞紬와 모직물로서의 花氈·色毛氈, 羊毛를 주성분으로 하여 직조[濕織]한 문양있는 페르시아산 직물로서 평상에 까는 자리[坐具]인 五色氍毹, 9세기 무렵의 大花魚牙錦·小花어아금·朝霞錦·30승紵衫段·40승白氎布·綺 新羅組 등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신라의 의류 발전상에서 桑麻의 생산으로부터 이에 따른 비단과 삼베를 직조하고,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모직물에 이르기까지 수공업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던 사실을 보여준다(박남수, 1996).바로가기
  • 번역주 022)
    子賁旱支 : 『양서』의 신라 관등명 가운데 ‘旱支’는 〈적성비〉 단계까지 ‘干支’로서 나타난다. 또한 ‘子賁旱支’는 『일본서기』 권9, 仲哀天皇 9년조의 ‘助富利智干’으로서 ‘京長’의 뜻인 伊罰干·角干·舒發翰·舒弗邯에 상응한다고 보고 있다(양주동, 1965). 子賁旱支는 신라의 最高官等인 伊伐飡을 말하는데, 文獻이나 金石文에 각각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통일성을 찾을 수 없다. 우선 『隋書』·『北史』·『册府元龜』·『通典』 등에는 伊罰干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翰苑』에는 伊伐干으로 되어 있다. 『南史』에는 子賁旱支로, 『三國史記』에는 伊伐飡 또는 角干·酒多로 표기되고 있다. 그 외에도 舒發翰·舒弗邯 또는 角粲·一伐干 등의 명칭도 보인다. 원래 舒發(弗)翰(邯)은 徐伐·徐羅伐의 公(官·等)으로서 部族長의 뜻이다. 나아가 신라가 官位(階·等)와 官職이 분화되기 전에는 伊伐飡(子賁旱支)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편, 趙榮濟는 伊伐飡 등이 관직이 아니라 관위라고 하였다(趙榮濟, 1983). 그러나 伊伐飡이란 명칭은 昔氏王代에 많이 나타나며 박씨 왕대에는 伊飡을, 김씨 왕대에는 舒弗翰을 많이 사용하였다. “伊湌雄宣卒 以大宣爲伊飡 兼知內外兵馬事”(『三國史記』 「新羅本紀」 逸聖尼師今 18年 2月)에서 볼 때 伊飡(또는 伊伐飡)이 관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伊飡幢元爲中侍”(『三國史記』 「新羅本紀」 孝昭王 5年 1月)의 경우를 비교할 때 大宣의 경우는 분명히 관등이었다고 판단된다(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末松保和도 또한 子賁旱支를 제1위 角干·徐弗邯·徐 發瀚에 해당한다고 보았다(1954).바로가기
  • 번역주 023)
    齊旱支 : 新羅 官等의 제3위인 迊飡의 별칭이다. 이러한 명칭은 『梁書』와 『南史』 뿐이며, 그 외에는 迎干(『隋書』·『通典』), 迊干(眞興王巡狩碑) 또는 蘇判이라 칭한다(국사편찬위원회 편, 1987). 양주동은, 齊旱支는 ‘城長’의 뜻인 ‘잣한’으로서 ‘迊干·迊判’ 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965).바로가기
  • 번역주 024)
    謁旱支 : 新羅 官等의 제6위인 阿飡 곧 아간지의 별칭이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이러한 명칭은 『梁書』·『南史』 뿐이며 그 외에는 阿尺干(『隋書』·『通典』), 阿干·阿粲 등이라 칭한다. 이 阿粲은 眞骨과 非眞骨(6頭品)의 구획이 되는 관등으로서 重阿飡制度로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있다(邊太燮, 1956). 즉, 6두품은 최고상한선이 阿飡이며, 侍中·兵部令 등도 최하한의 관등이 바로 아찬인 경우가 많다. 물론 侍中·兵部令은 진골만이 될 수 있는 관직이지만, 반드시 大阿飡 이상으로 한정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융통성은 飡이란 공통분모가 級飡까지 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으나, 服色에 있어서 6位(阿飡)~9位(級飡)까지는 緋色이라는 데 주목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壹告支 : 신라 관등의 제7위인 一吉飡, 곧 일간지의 별칭이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그 외 乙吉干(『隋書』·『通典』)·一吉干 등이라 칭하고 있으며, 『南史』는 壹吉支라 하고 있다. 告는 吉의 잘못으로 추측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奇貝旱支 : 신라 관등의 제9위인 級飡, 곧 거벌간지의 별칭이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그 외 及伏干(『隋書』)·級伐干(『通典』)·及尺干(〈진흥왕순수비〉)으로 되어 있다. 級飡 이상은 최상의 伊伐飡까지 飡字(干·汗 등의 뜻)를 쓰고 있으며, 진골출신들이 주로 처음으로 받은 관등이어서 진골이 받는 최초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申瀅植, 1984).바로가기
  • 번역주 027)
    신라의 관등제 : 6세기 전반의 금석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에는 『양서』와 『남사』 신라전의 5~6개 관등(법흥왕 8, 521)으로부터 『수서』의 17관등(진평왕 16, 594)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거나(曾野壽彦, 1955), 『양서』의 단계로부터 6세기 말~7세기 전반 무렵 고구려·백제의 관등제에 대응하여 12, 13관등제를 정비하였다가 진덕여왕 때에 당나라의 正從 9品 관위제를 수용함으로써 17관등제가 성립된 것으로 보아왔다(宮崎市定, 1959). 일본 학계의 대세를 이루던 이들 주장은 6세기 전반 금석문의 발견으로 잘못임이 판명되었다(武田幸男, 1977). 세부 관등의 성립 문제에 있어서도 경위 제15관등 大烏 이하의 관등이 신라 통일 이후 사회 조직의 확충과 함께 신설되었다는 주장(井上秀雄, 1974)은 〈영천청제비 병진명〉(536)에서 ‘大烏第·小 烏第’가 확인됨으로써 무너졌다. 또한 진흥왕대에 大奈麻~吉士가, 진평왕대에 大烏~造位가 추가되었다는 견해는(三池賢一, 1970) 〈울진천전리서석 추명〉(이하 〈천전리서석 추명〉)(539)과 〈영천청제비 병진명〉의 발견으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적성비〉의 발견으로, 그동안 분분했던 신라 17관등제와 외위제가 늦어도 551년까지는 성립되었음이 밝혀졌다(李基東, 1978). 그후 〈봉평비〉와 〈냉수리비〉가 발견되면서 법흥왕대에 경외 관등제가 갖추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곧 변태섭은 나물마립간 때에 수 개의 고위 관등이 성립하기 시작하여 분화하고 다시 하위 관등이 생김으로써 법흥왕대에 17관등제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고(변태섭, 1956), 이기백도 520년에 반포한 율령 가운데 17관등제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이기백, 1990). 이에 학계 일반으로 17관등제의 성립을 법흥왕의 율령 반포로 보아 왔다(李基東, 1978 ; 노태돈, 1989 ; 선석열, 1990 ; 윤선태, 1993 ; 하일식, 2006 ; 전미희, 2000 ; 이기동, 2003). 한편으로 외위제에 대해서는, 법흥왕대에 17관등제가 완성되고 532~550년 또는 524~561년 무렵에 외위제가 완비되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주보돈은 京外 官等制의 성립 시기를 법흥왕 7년 율령 반포 시로 보았다가(주보돈, 1986 ; 주보돈, 1989), 〈봉평비〉·〈창녕비〉의 외위 관련 기사를 바탕으로, 신라가 가야 일부 세력을 병합한 532년 이후 550년에 이르는 사이에 干群 外位의 분화로 11관등의 외위제가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였다(주보돈, 1990). 한편 외위제 성립 시기를, 권덕영은 지증왕, 법흥왕대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권덕영, 1985), 하일식은 536년 이전~550년 무렵으로(하일식, 2006) 각각 이해하였다. 이에 노중국은 524~561년 무렵에 상위급 외위가 정비됨으로써 외위제가 완성된 것으로 보았으나(노중국, 1997), 다시 이를 수정하여 503~521년 사이에 경위 17관등과 외위 11관등이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노중국, 2010). 서의식은 외위를 지방관으로 나간 진골들에게 僚佐의 설치와 운용을 허용한 형태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법흥왕 25년(538) 外官의 ‘携家之任’ 조치 때에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서의식, 1999). 이러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냉수리비〉와 〈봉평비〉의 발견으로 왕경 여타 4부의 수장급이 ‘간지’를 칭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喙·沙喙의 관등이 왕경 여타 4부에 확대·관철되어 감으로써 신라의 관등제가 체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武田幸男, 1990). 더욱이 〈중성리비〉가 발견되고 〈봉평비〉의 ‘五干支’가 확인됨으로써 신라의 관등제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실 『양서』 신라전의 신라 관등 “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는 〈봉평비〉의 관등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양서』의 신라 관등명 가운데 ‘旱支’는 〈적성비〉 단계까지 ‘干支’로서 나타난다. 또한 ‘子賁旱支’는 『일본서기』 권9, 仲哀天皇 9년조의 ‘助富利智干’으로서 ‘京長’의 뜻인 伊罰干·角干·舒發翰·舒弗邯에 상응하며, 齊旱支는 ‘城長’의 뜻인 ‘잣한’으로서 ‘迊干·迊判’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양주동, 1965). ‘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는 각각 ‘아간지·일간지·거벌간지’로 보아 좋을 듯하다(曾野壽彦, 1955 ; 武田幸男, 1977). 그렇다면 『양서』 신라전의 신라 관등 기사는 〈봉평비〉에 보이는 대나마 이하의 관등을 궐하고 〈봉평비〉에 보이지 않는 子賁旱支와 齊旱支를 기술한 것이 된다. 이에 『양서』 신라전 관등 기사는 梁 普通 2년(521) 법흥왕 때의 정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양서』의 5관등이나 같은 내용의 『남사』의 6관등에 대한 기록을 신라가 양에 사신을 보낸 보통 2년(법흥왕 8년, 521)의 상황을 전한 것으로 풀이하면서, 신라 17관등제가 이로부터 비롯하여 진평왕대에 성립하였다고 보거나(曾野壽彦, 1955), 법흥왕 율령 반포 시에 경위 17관등이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중국, 1997·2010). 그러나 〈봉평비〉에는 『양서』 신라전의 子賁旱支와 齊旱支에 상응하는 관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일식은 『양서』 신라전의 기록이 521년 당대의 정보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한계성으로 인하여 관등명을 모두 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하일식, 2000). 한편 『양서』 최후의 성립이 唐 初(629~636)의 일이기에 그 이전의 신라에 대한 지식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한다(末松保和, 1954 ; 李基東, 1984). 그러나 子賁旱支와 齊旱支 등의 관등은 〈천전리서석 추명〉(539)의 珎干支와 〈적성비〉(~551)의 伊干△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따라서 『양서』의 신라 관등은 진흥왕 10년(549) 양나라가 신라 입학승 覺德과 함께 사신을 보낼 무렵에 취득한 정보를 간략히 서술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튼 武田幸男은 〈봉평비〉의 干支를 꽤 상위의 경위 상당으로서 인정하면서도, 경위체계의 전개가 부마다 달랐고, 적어도 〈봉평비〉 단계에서 喙·沙喙部의 관등체계가 다른 부로 확대·관철되어 갔으며, 본피·잠탁부 2부에서는 아직 경위체계가 관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武田幸男, 1990). 이러한 武田幸男의 가설은 〈중성리비〉가 발견되면서 새롭게 부각되는 듯하다. 박남수는 신라 상고 말, 중고기 금석문을 비교 검토하면서, 喙·沙喙이 신라 정치사회를 주도하여 관등체계를 중심으로 왕경 여타 4부의 관등체계와 단일화함으로써, 법흥왕 7년 율령을 반포하면서 경위 13~14관등, 외위 5관등으로 정비하고, 다시 〈천전리서석 추명〉으로부터 〈적성비〉·〈창녕비〉에 이르는 단계에 경위 17관등과 외위 11관등을 완비한 것으로 보았다. 〈중성리비〉에서는 喙部·沙喙이 ‘[국왕(갈문왕)]-阿干支-壹干支-沙干支-居伐干支-奈麻’의 관등체계인 데 대해, 왕경 여타 4부는 ‘干支-壹伐’, 그리고 村의 경우 ‘干支-壹金知’ 체계인데, 이는 6부의 세력이 균등하였던 때의 ‘간지-일벌’ 체계가, 喙이 사로국의 국왕 출신부로 등장하면서 사탁부와 함께 ‘국왕-阿干支-壹干支-沙干支-居伐干支’ 체계로 분화하여 여타 왕경 4부의 ‘간지-일벌’ 체계와 공존하였고, 그 후 喙·沙喙은 새로이 지방세력자를 수용함으로써 ‘奈麻’의 관등을 첨설하여 〈중성리비〉·〈냉수리비〉와 같은 관등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 후 〈봉평비〉 단계에서는 干支群(五干支·干支-太阿干支-阿干支-一吉干支-居伐干支)과 奈麻群(大奈麻-奈麻), 帝智(之)群([邪足智 : (大)舍帝智?]-小舍帝智-吉之智-[(大)烏帝智]-小烏帝智)으로 나뉘었다가, 〈천전리서석 추명〉 무렵부터 〈적성비〉·〈창녕비〉 단계에 이르는 시기에 다시 干支群 가운데 상위의 ‘干支’가 ‘大一伐干-一伐干-一尺干-(迊干)-波珎干’으로 분화·첨설되었다. 이는 〈봉평비〉에서 촌주급 下干支 휘하의 외위를 ‘一伐-一尺-波旦’으로 구분한 데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기왕의 下干(支)에 上干을 더하고 ‘嶽干-述干-高干-貴干-選干’ 등의 상위급 촌주층이 첨설된 것과 흐름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그 후 관등 명칭의 변동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체제는 진흥왕대의 그것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신라 골품제의 형성 과정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탁·사탁은 저들의 신분적 질서에 바탕하여 6부와 지방세력을 아우르는 골품제와 관등제를 정비하였거니와,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의 신분 구분은 이미 마립간기에 정립되었고, 그것이 진골과 6~1두품으로 확대, 정비됨으로써 법흥왕의 율령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진흥왕대에 眞宗의 개념을 창출함으로써 6부 진골 귀족과 신분적 구별을 꾀하였고, 중고기를 통하여 김씨 왕족 내부에서 혼인 등으로 聖骨의 개념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박남수, 2010a).바로가기
  • 번역주 028)
    其拜及行與高驪相類 :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고구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풍속에 대하여는 대체로 『삼국지』와 『후한서』가 동일하다. 다만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跪拜申一脚, 與夫餘異, 行步皆走”라 하고,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跪拜曳一脚, 與夫餘異, 行步皆走”라 하여, ‘다리 하나를 편다’와 ‘다리 하나를 끈다’는 표현이 다를 뿐이다. 다만 양 사서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끄니] 부여와 같지 않으며,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고 하면서, 부여의 풍속과 다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서』는 『후한서』를, 『양사』, 『남사』에서는 『삼국지』를 따르고 있으나 ‘부여와 다르다’는 내용만 없을 뿐이다. 그런데 『수서』 고구려전에는 “풍속은 쪼그려 앉기를 좋아하며, 청결한 것을 즐긴다. 종종걸음 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기고, 절을 할 때는 한쪽 발을 끈다. 서 있을 적에는 反拱을 하고, 걸을 적에는 팔을 흔든다.”라고 하여 『삼국지』, 『후한서』 계열의 사서와 내용을 달리한다. 이에 대하여 『신당서』 신라전에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 앉아 손을 땅에 짚고 공손히 절한다.”라고 하여 기왕의 사서에서 고구려의 절하는 습속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가 본래 고구려와 달라서인지, 아니면 통일신라에 들어와서 습속이 변해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이 기사는, 元帝가 처음 荊州刺史에 재임할 때(526~539)에 편찬한 『梁職貢圖』 行文의 기사와 거의 동일하다. 곧, 『양직공도』에는 “주변의 소국[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라고 하여, 520~530년대에 양나라는 斯羅(신라)를 백제 주변의 여러 小國과 함께 백제에 종속된 작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李弘稙, 1971). 이는 신라가 백제를 통하여 梁과 통교하였기 때문에 백제를 통한 신라 인식이 『양서』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李弘稙, 1971). 그러나 신라는 지증왕 1년(501)과 3년(503)에 각각 건립한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증왕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한문을 상용했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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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립과 풍속, 제도 자료번호 : jd.k_0008_0054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