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이광리(李廣利), 공손오(公孫敖), 이릉(李陵)을 보내 흉노와 전투를 벌임
그 이듬해주 001
한나라에서는 이사장군주 002을 시켜 삼만 기를 거느리고 주천에서 나가 천산(天山)주 003에서 우현왕을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만여 인을 얻어 돌아왔다. 흉노가 이사[장군의 부대]를 크게 포위하니 거의 빠져나갈 수 없었다.주 004
한나라 군대는 열에 여섯 일곱을 잃었다. 한나라에서는 또한주 005인우장군 [공손오]를 시켜 서하(西河)
주 006에서 나가 강노도위(彊弩都尉)주 007[노박덕]과 탁야산(涿邪山)
주 008에서 만났으나 얻은 바가 없었다. 또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
주 009
각주 009)
을 시켜 보병과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거연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 나아가 선우와 만나 전투를 벌여 [이]릉이 [흉노병] 만여 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였으나 병력[과] 식량이 다 떨어져 [포위를 풀고] 돌아오려고 하자주 010선우가주 011
[이]릉을 포위하니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고 그의 병사[중에서] 벗어나 한나라로 돌아온 자가 [겨우] 4백 명이었다.주 012선우는 이에 [이]릉을 귀하게 여겨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李陵(?~전74) : 자는 小卿으로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城 秦安縣) 사람이다. 명장 李廣의 손자로 병사 8백 기를 이끌고 匈奴로 쳐들어가 2천 리를 들어가 지형을 살피고 돌아와 騎都尉가 되었다. 하지만 5천 명의 보병으로 匈奴를 공격하다가 잡혔다. 그 이후 가족이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임을 당하자 匈奴에 투항하였다(『漢書』 卷54 「李廣蘇建傳」 〈李陵〉 : 2450~2458). 司馬遷은 그를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가 이후 蘇武에게 보낸 편지가 『文選』에 남아 있다(도미야 이타루, 2003 : 11~19).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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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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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색인어
- 이름
- 공손오, 노박덕, 이릉(李陵), [이]릉, [이]릉, [이]릉, [이]릉
- 지명
- 한나라, 주천, 한나라, 한나라, 서하(西河), 탁야산(涿邪山), 거연,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