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와니우라 토착과 접대
一. 칙사(통신사)는 10월 2일 [쓰시마] 와니우라에 도착했다.
一. 10월 3일 밤에는 이나군(伊奈郡) 고토우라(琴浦)에서 묵었다. 이나군에서 고키부네(漕船)주 001 담당 부교는 야마다 리에몬(山田理右衛門) 1인.
一. 10월 4일 새벽에 부젠노카미가 40인선 1척, 30인선 1척으로 세토우치(瀬戸之内)까지 마중을 나갔다. 도요사키의 불 피우는 규정이 달라 후추로 소식이 늦게 왔기 때문에, 겨우 세토우치까지 나간 것이다.
一. 첫 번째[정사]·두 번째[부사]·세 번째[종사관]주 003에게 세토우치에서 삼나무 찬합[杉重]에 1층씩 과자를 담고, 남만(南蠻) 과자주 004 1쟁반씩 더하여 보냈다.
一. 박 동지(同知)주 005에게 들고 다니는 찬합[提重]주 006 하나를 같은 곳에서 주었다.
一. 번주님[소 요시나리]주 008
각주 008)
이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50인선과 60인선 2척으로 오카지(大梶)주 009까지 나가서 배 너머로 대례(對禮)를 하셨다.쓰시마번 2대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남으로 1604년 태어났다. 1615년에 요시토시가 사망하자 막부로부터 가독(家督) 상속을 허락받고 번주가 되었다. 반쇼인(万松院)을 창건했고, 조선통신사 접대를 간소화하여 재정을 절감하고, 은(銀)광산 개발 등을 추진해 번정(藩政)의 기초를 다졌다. 1635년, 쓰시마번이 조선과의 통교 과정에서 국서(國書)를 개찬(改竄)한 사실이 막부에 폭로되어 개역(改易, 영지 몰수) 위기에 처했으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가신(家臣)인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등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해 요시나리는 영지 몰수를 면했다(『人名辞典』).
一. 통신사가 정성을 들일 무렵 후추(府重) 포구에 도착했다. 번주님이 먼저 [육지에] 오르셨다.
一. 통신사가 타고 온 배는 군(郡)에 가깝게 해두었다.주 011
一. 부젠노카미는 선원들에게 세토우치에서 후추까지 세 번 술을 돌렸다. 와키부네(脇船)의 선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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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쓰시마번 2대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남으로 1604년 태어났다. 1615년에 요시토시가 사망하자 막부로부터 가독(家督) 상속을 허락받고 번주가 되었다. 반쇼인(万松院)을 창건했고, 조선통신사 접대를 간소화하여 재정을 절감하고, 은(銀)광산 개발 등을 추진해 번정(藩政)의 기초를 다졌다. 1635년, 쓰시마번이 조선과의 통교 과정에서 국서(國書)를 개찬(改竄)한 사실이 막부에 폭로되어 개역(改易, 영지 몰수) 위기에 처했으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가신(家臣)인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등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해 요시나리는 영지 몰수를 면했다(『人名辞典』).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